PDF문서2019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자료집(전쟁 희생자 추념기설의 국제 비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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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International Comparison of Memorial Facilities 

for War Victims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2019.11.8.(금)  13:00~17:00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4층(서울 중구 정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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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일제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념시설 조성의 목적과 발전방향
-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 공간 및 시설 조성의 방향성에 대해 -
오일환 박사(ARGO 인문사회연구소)

沖縄戦の全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の意義
-アジア太平洋戦争で日本軍と米軍が最後の地上戦となった沖縄戦―
石原昌家(沖縄国際大学名誉教授)

오키나와 전투의 전(全) 전쟁사망자 각명비・평화의 주춧돌의 의의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미군의 마지막 지상전이 된 오키나와 전투―
이시하라 마사이에(石原昌家) 명예교수(오키나와 국제대학)

南京大屠杀纪念性设施的设立、 史学研究及其国家公祭
朱成山(常州大学近现代史与红色文化研究院)

남경대학살 기념 시설과 사학연구 및 국가공식제례
주성산(朱成山) 교수(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Memories and commemorations of the victims 
of  World War II in Poland
Malgorzata Glowacka Grajper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강제동원 된 폴란드인 희생자 실태와 
추념시설의 세계사적 의의
- 폴란드의 제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 -
Malgorzata Glowacka Grajper 교수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양조훈 이사장님(제주 4·3 평화재단)

서  승 석좌 교수(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박경석 교수(연세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서강대학교 사학과)

일정표

개회사

축   사

발표문-1

발표문-2

번역문

발표문-3

번역문

발표문-4

번역문

토론문-1

토론문-2

토론문-3

토론문-4

13p

43p

52p

63p

92p

5p

6p

8p

127p

139p

151p

154p

156p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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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

※ 불가피한 사정에 따라 시간, 발표자, 토론자가 일부 변경될 수 있음

시  간

내  용

                             개회식 

13:00-13:15

개회사

김용덕 (재단 이사장)

축   사

정구창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단장)

                            세션 1 주제발표                                              좌장: 김민영 교수 (군산대학교)

13:15-13:45

일제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념시설 
조성의 목적과 발전방향

오일환 박사
(

ARGO 인문사회연구소)

13:45-14:15

오키나와 전투의 전(全) 전쟁사망자 각명비·
평화의 주춧돌의 의의

이시하라 마사이에(石原昌家) 명예교수
(오키나와 국제대학)

14:15-14:45

남경대학살 기념 시설과 사학연구 및 
국가공식제례

주성산(朱成山) 교수
(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14:45-15:15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강제동원 된 
폴란드인 희생자 실태와 추념시설의 세계사
적 의의

Malgorzata Glowacka Grajper 교수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15:15-15:30

휴식 및 장내정리

                            세션 2 지정토론                                             좌장: 김민영 교수 (군산대학교)

15:30

-

16:40

지정토론

양조훈 이사장님
(제주 

4·3 평화재단)

서  승 석좌 교수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박경석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16:40

폐   회

사회: 이재철 (재단 국장)

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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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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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인 가을에 개최하는 이 회의에 참석해 주신 내외빈 

여러분을 환영하오며, 특히 외국에서 오신 연구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강제동원으로 희생된 분들 대부분은 그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 채 잊혀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족들의 한은 도저히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재단은 지난해부터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과 실태조사 등을 적극적

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해발굴과 봉환은 많은 시일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실제 유골과 유족

의 확인도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80세를 전후한 유족들은 생존해 있을 때 부친의 위패라도 모시는 것이 유일

한 숙원입니다. 

우리 재단은 다행히 올해 부산에 있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내에 위패를 

봉안할 수 있는 추념시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 추념시설 공사가 완공되면 강제동원 희생자 

2만 여명에 대한 위패를 

안치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 될 것입니다. 혼이 깃들어 있는 위패만이라도 눈앞에 

보며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념시설이 구체화됨에 따라 다른 나라의 추념시설을 비교하고 우리에게 바람

직한 추념시설이 어떠해야 하는지 토론해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란 주제의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중국, 일본은 물론 폴란드의 경우까지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은 각 국별 비교를 넘어 국제적인 보편성을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각 나라가 입은 피해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 피해의 의미를 평화를 위한 희생

이라는 시각에서도 살펴보고 싶습니다. 

끝으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참석해주신 유족과 학계, 행정안전

부 관계자, 관련단체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환절기 건강

에 유의하시길 당부 드립니다.

2019. 11. 8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김 용 덕 

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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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축 사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오늘 전쟁희생자 추념시설 국제 비교를 위한 국제학술대회에 행정안전부장관님

을 대신하여 축하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늘 행사를 주관하여 준비해 주신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 김용덕 

이사장님과 관계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발표와 토론을 맡아주신 전문가 분들을 비롯하여 유족 여러분과 

이 자리에 함께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국제학술대회는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의 위패관 조성사업의 의의를 모색

하는 자리로,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은 강제동원 희생자의 넋을 기릴 뿐만 아니라, 

강제동원역사의 진실을 기억하고 공감하는 역사교육의 장입니다.

이처럼 의미 있는 곳에 일제강제동원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패관 조성을 위한 

추념시설의 국제비교 국제학술대회를 갖게 된 것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겼기에 수많은 우리 선조

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끌려가 전쟁터와 탄광 등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

려야 했습니다.

그 동안 정부는 희생자와 유족 분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강제동원 피해의 진상을 규명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정부차원의 진상조사와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해외 강제동원 희생자 

유해봉환을 지속 추진하고 강제동원 진상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노력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협력하여 강제동원 희생자를 추모

하고 유족을 지원하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국제학술대회는 전쟁 희생자 추념 시설의 국제비교의 의의를 확인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발표와 토론을 맡아주신 분들과 행사개최에 수고하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오늘 행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 11. 8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장  

정 구 창 

축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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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념시설 조성의 목적과 발전방향

-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 공간 및 
시설 조성의 방향성에 대해 

-

오일환 박사
(ARGO 인문사회연구소)

발표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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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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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념시설 조성의 목적과 발전방향

 

-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 공간 및 

시설 조성의 방향성에 대해 -

/

오일환

1) 박사

(ARGO 인문사회연구소)

Ⅰ . 들어가면서

일제강점기 일본과 중국, 동남아와 태평양 도서, 사할린 등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또는 귀환하는 도중에 사망하여 생환하지 못한 희생자와 그 유골의 숫자는 이루 헤아리

기 힘든 상황이다. 한편, 그동안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중 일부는 국내로 봉환되어, 

개인과 단체가 조성한 납골당이나 사찰에 모셔지거나 정부가 운영중인 해외동포 전용 

묘지, 또는 시립공동묘지 등에 안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강제동원 희생자만을 위한 전용 추모 공간이나 

시설이 전무했으며, 해방 이래 

70년만인 2015년경에 부산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이하 ‘강제동원역사관’)이 개관함으로써 그 역할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당초 강제동원역사관은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 제

3조 

2항에서 정한 ‘사료관 및 위령공간 조성’과 동 법 제21조에서 정한 ‘위령사업’에 따라 설

1) 중앙대학교대학원겸임교수(Ph.D),현재ARGO인문사회연구소대표연구위원.2007~2014년간일제강점하강제

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나중에‘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로변경)의전

문위원겸유해팀장으로재직함.

발표문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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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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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1948년이 처음이다. 당시 일본과 한국은 연합군총사령부(SCAP/GHQ)와 미군정의 치하
에 있었는데, 일본 후생성이 보관하고 있던 한반도출신 군인·군속 유골의 한국 송환을 

결정하고 이를 주선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2월에 유골 456위와 위패 4,141위, 그리

고 

5월에 유골 330위와 위패 2,716위가 부산항을 통해 송환되었다.

당시 과도정부는 각 도와 군별로 유골과 위패를 분산하여 유족에게 전달하도록 했지

만, 상당 수의 유골과 위패는 유족들의 항의와 수령 거부,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다 유실되었다. 따라서, 해방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유골과 위패가 국내로 송환되

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정확하게 몇 분의 유골과 위패가 유족들에게 온전히 전달

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수의 유골과 위패가 유실되었는지 여부가 불확실하다.

3)

이후 일본 정부가 보관한 한반도출신 군인·군속 유골은 

2005년까지 10여 차례에 걸

쳐 간헐적으로 국내로 봉환되었는데, 

22위 이하의 봉환인 경우는 모두 유족들에게 전

달되었기에 별도의 수용 시설이나 추모 시설이 요구되지 않았다.

그런데, 

1971년의 246위, 1974년의 911위가 봉환되었을 때에는 대부분 유족들에게 

전달되었지만 유족에게 전달되지 못한 약 

300위 가량의 유골은 부산 영락공원(일명 부

산영원)에 안치되었다. 이때의 유골 안치는 당시 부산영원의 이사장이었던 장기영 씨 

자신이 학도지원병 출신으로서 강제동원 피해자이자 동료들의 유골을 봉환하는 데 앞

장섰고, 정부 차원에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등을 수용할 수 있는 추모 공간을 마련

하지 못한 임시방편의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의 추모 공간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천안 망향의동산을 건립할 무렵인 

70년대 중반이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동포

들이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함에 따라 영령들의 넋이라도 조국의 품안에 돌아와 영면할 

수 있도록 해외동포 전용묘지를 조성해 달라는 민원을 정부에 제기하였다. 당시 정부

는 국내 유공자 관리도 어려운 실정인 이유로 인하여 해외동포들을 위한 전용묘지 건립

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1975년 9월부터 시작된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사업

이 예상외의 큰 성과를 거둠에 따라 정부도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상

황의 변화에 따라 모국방문후원회가 

1976년 4월 묘지 조성에 필요한 기금을 제공하겠

3)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1948년한국으로송환된유골에대한진상조사」진상결과보고서(Ⅶ

-2),2007.12.참조.

립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위령공간 조성의 실제와 설계 단계에서는 개인별 ‘묘역’과 ‘위

패’ 공간이 배제되었다.

그 사이 유골이 확인되지 않거나 찾을 수 없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유골 미확인 희생

자에 대한 ‘위패’ 봉안의 요구가 급증하였다.

일반적인 ‘위패’이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위패’이든, ‘위패’에 관한 법률적 정의는 ‘장

사 등에 관한 법률’에 언급되지 않으며,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서만 

다루어지고 있다. 동 법률에 따르면, "위패봉안(

位牌奉安)"이란 유골이나 시신이 없어

서 매장되거나 안치되지 못한 사망자와 매장기간 또는 안치기간이 지난 사람의 이름 등

을 석판(

石板) 등에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2) 다시 말해, 위패를 안치 또는 안

장하는 행위는 ‘국립묘지’의 경우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사람’의 ‘이름 등’을 ‘석판 등’에 

‘기록하여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석판 등의 위패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이름을 새겨 기억하고 추모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며, 우리 사회와 국가, 시민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

외로 공론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부산의 강제동원역사관에 위패관을 조성하는 문제에 대한 검토를 

포함하여, 해방 이후 국내로 봉환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과 위패는 어떻게 처리되었으

며 향후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강제동원 희생자의 추모 공간이 지닌 사회적 의미

와 방향성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 국내 강제동원 추모 공간 조성 경위

1.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및 위패의 봉환

1)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봉환과 안치

해방 이후 일본 등 해외에 산재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해가 국내에 봉환된 것은 

2) 「국립묘지의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제2조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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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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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자유족회의 고(

故) 김경석 회장이 주도한 납골당이다. 고 김경석 회장은 1991년 춘천시 

동내면 학곡리에 납골당을 마련하여 일본 각 지역에서 수습해 온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약 

500여 위를 안치하고 해마다 위령제를 지냈다. 2005년 김경석 회장이 별세한 후, 그

의 부인인 홍영숙 씨가 뒤를 이었다. 홍 회장은 

2011년 4월 납골당에 모셔진 유골을 망

향의동산 합장묘(

19호)로 이장하였다. 현재 춘천 납골당은 없어졌지만, 이 납골당은 민

간 차원에서 노무동원 희생자의 유골을 안치해 왔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유족단체와 기타 단체 등이 일본 각지에서 수습한 유골의 대다수는 국내의 여러 사

찰에 안치해 왔는데, 현재 이 유골의 진위 여부와 개체성 여부, 그리고 현재 보존 상태 

등에 관해서는 종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19년 

3월 일본 오사카 통국사(統國寺)에 있던 한국인 여성과 어린이 등 유골 74위를 민화협
이 주관하여 제주도 애월읍의 선운정사에 안치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공원묘지에 안장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정부 차

원의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 공간이 없던 시절인 

1970년대에는 부산의 영락공원이 군

인·군속 유골을 안치해 왔다. 최근 들어 여러 민간 단체가 일본 지역에서 강제동원 희

생자와 한국인 추정 유골을 수습하여 국내로 봉환한 후 시립공동묘지에 안장하는 사례

가 늘고 있다. 예를 들면, 

2015년 9월에는 평화디딤돌과 일본 홋카이도의 시민단체 등

이 홋카이도 지역의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115위를 봉환하여 파주의 서울시립공원묘지

에 안장하였고, 

2017~2018년 간 3차례에 걸쳐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 등 종교단체

가 일본 도쿄도의 국평사(

國平寺)에 있던 한국인 유골 총 101위를 봉환하여 서울시립승

화원에 안장하였다.

2) 천안 망향의동산 위패 봉안 경위

2008년 1월 강제동원위원회가 일본으로부터 군인·군속 희생자 유골 101위를 봉환

하여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에 안장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유골을 보관중이거나 

일본 내에 유골이 확인되지 않는 대다수 ‘유골 미확인 유족’들의 탄원과 민원이 강제동

원위원회에 쇄도하였다. 그것은 유골이 확인되지 않거나 유골이 찾을 수 없는 희생자에 

대해서도 ‘위패라도 만들어서 안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군인·군속 희생자 유골 봉환이 

2차(2008년 11월), 3차(2009년 7월)로 이어지는 가운

데 이러한 요구와 민원은 더욱 빈번해졌고, 청와대에 탄원서가 제출되기도 했다.

다는 약속을 함에 따라 정부가 부지를 마련하는 등의 대응에 나서면서 천안 망향의동산 

조성이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마침내 망향의동산 준공식과 더불어 재일동포 유골 212

구의 합동위령제가 개최되었는데, 이때의 유골은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니라 해방 이후 

일본에서 사망한 재일동포들의 유해였다.

4)

망향의동산에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이 안장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77년부터이다. 

1977년 가나가와현 민단이 현 내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조선인과 강제동원 희생자 무
연고 유골 

36위를 취합하여 망향의동산 제1호 합장묘에 안장하였다. 이후 야마구치현, 

후쿠오카현, 사가현, 홋카이도 지역의 민단과 국내 단체, 그리고 일본 단체 등이 주도

하거나 협조하여 관동대지진, 강제동원, 원폭 희생자 등의 유골을 합장묘에 안장해 오

고 있다. 그밖에 티니안 섬의 강제동원 희생자, 사할린 지역의 한인 등에 대한 합장묘

를 포함해 현재까지 모두 

19기의 합장묘가 있다.

이상의 유골들은 그 신원이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개체성이 모호하거나 합골, 분골

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에 비해 

2008년부터 일본 정부와 재협상을 통해 국내로 봉환

한 군인·군속 유골은 모두 개체성이 확인된 경우이다. 이 무렵 군인·군속 유골은 당

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5)(이하 ‘강제동원위원회’)의 주도로 네 차례

에 걸쳐 

2008년 1월 101위(1차), 2008년 11월 59위(2차), 2009년 7월 44위(3차), 2010

년 

5월 219위(4차)가 봉환되었으며, 모두 망향의동산 봉안당에 안장되었다.

그밖에 ‘강제동원위원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러시아 정부와 협의를 통해 사할린 지

역의 한인 묘를 발굴하여 

2013년부터 현재까지 해마다 망향의동산 봉안당에 유골을 안

장해 오고 있다. 

2019년 10월 현재 7차례에 걸쳐 모두 83위의 사할린한인 유골이 안장

되었다.

그밖에 노무자 유골 등을 민간이 수습하여 국내에 봉환한 사례가 다수 있다. 이 경우 

유골은 개인 또는 단체가 마련한 추모 시설에 안치하거나, 사찰 또는 시립공원묘지 등

에 안장하고 있다.

개인 또는 단체가 마련한 추모 시설 중 대표적인 사례는 춘천 태평양전쟁한국인희생

4) 이삼식·이지혜,「국립망향의동산안장시설수급등종합계획수립을위한연구」(보건복지부·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책보고서2013-57),9~11쪽.

5) 나중에‘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로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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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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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다.

7)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사자들의 죽음은 각 국가의 대표적인 국립묘지와 국가기

념물 조성을 통해 숭고한 죽음으로 기려졌고, 국가는 이 공간과 기념물을 통해 시민과 

대중의 집단기억을 형성하고 공공 행사에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8)

한반도에서의 국가적 집단묘지의 원형은 일제(

日帝)의 식민지배 기간에 시작되었다.

조선에 상주했던 일본군의 전사자 유해는 주둔지, 즉 조선으로 이송되었는데, 주로 

조선군 제

19사단, 제20사단이 이에 해당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전

사자 유해의 귀환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고, 격전지에 유해가 방치되는 현상이 급증했

다. 그러나 그 이전까지 조선으로 귀환한 전사자를 추모하는 공간은 일본 육군묘지, 호

국신사, 충령탑의 세 가지 형태

9)였다. 육군묘지는 서울 용산, 함북 나남에 조성되었다.

일제가 조선에 전사자 추모공간을 조성한 것은 식민지 전시동원체제의 강화를 위한 

상징과 의례 공간의 필요성 때문이다. 일제는 이러한 추모 공간에서 수시로 추모 행사

와 기원제 등을 개최하여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숭고한 죽임이라는 것을 강

조했다.

일제는 유해와 영혼을 분리하여 안치하였는데, 유해보다는 영혼을 안치한 공간에 더 

많은 상징성과 권위를 부여하였다. ‘영령’ 칭호 부여와 야스쿠니신사(

靖国神社) 합사가 

그것이다.

조선에도 호국신사가 건립되었다. 서울에는 남산신궁을 위시하여 경성신사, 노기신

사, 용산중학교 뒤편의 경성호국신사가 그것이며, 나남의 천명산 중턱에도 호국신사가 

세워졌다. 이는 지역별로 전사자의 영혼을 안치하고 식민지 신민의 통합의 상징적 장소

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국가적 추모 공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가장 먼저 실현된 

것은 육군묘지였다. 국군의 모태인 국방경비대가 육군묘지 조성의 필요성을 검토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 29일 국무회의에서 서울 

7) G.KurtPiehler,“TheWarDeadandtheGoldStar:AmericanCommemorationoftheFirstWorldWar,”in

Commemorations:ThePoliticsofNationalIdentity,ed.JohnR.Gillis(PrincetonUniversityPress,1994),

pp.168~170;GeorgeL.Mosse,宮武実知子訳, 『慰霊-創られた世界大戦の記憶』,栢書房,2002,pp.87~98.

8) GeorgeL.Mosse,TheNationalizationofMasses,(CornellUniversityPress,1975),p.72.
9) 정호기,「국민국가의신성성과‘죽은자모시기’-국립묘지의조성과유지를중심으로」『호남문화연구』36,2005년6

월,p.216

당초 강제동원위원회는 강제동원 희생자 위령 공간 조성에 관한 검토 차원에서 위패 

등의 업무는 부산에 건립 중인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담당할 것으로 전망했지만, 유

족들의 민원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 

2009년 국립 망향의동산 측과 임시 위패실 설치에 

합의하였다. 이후 위패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의 일부를 자비 부담하는 조건 등으로 유

족들의 신청을 접수하여 

2009년 12월 8일 131위의 위패를 망향의동산 봉안당 임시 위

패실에 안치하였다.(제

1차) 이듬해인 2010년 10월 6일 257위의 위패를 같은 방식으로 

안치하였다.(제

2차)

그리고 제

3차 위패 안치를 위해 2011년 말까지 신청자 약 900여 건을 접수하였지만, 

망향의동산 측에서 난색을 보임에 따라 위패 안치가 지연되었다. 망향의동산 측은 기존

의 봉안당에 위패를 임시 안치하는 것보다 망향의동산 부지 내에 별도의 위패관을 건립

하여 위패를 안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위패관의 건립에 필요한 예산을 강제동원위원

회가 제공하거나 예산획득에 나서 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강제동원위원회

는 한시적 활동 기간이 임박하고 조직과 예산, 인력 등을 축소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

에 위패관 건립을 위한 별도의 예산 획득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2012년 2월 망향의동산 측이 항구적인 대책, 즉 기존의 별도 위패관 건립 전까

지 추가적인 위패 안치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강제동원위원회에 보내 옴에 

따라 신청을 받아 둔 제

3차 위패 안치는 중단되었다.6)

2. 국내 위패봉안 시설

1) 국민국가와 국립묘지의 발생 배경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람들은 국민국가(

nation-state)라는 공동체가 제시하는 모범

적 죽음의 표상이다. 이들의 죽음은 주로 전쟁과 혁명, 내전 등에서 양산되었다. 국가

가 집단 묘지를 조성하여 전사자를 안치하고 이들의 죽음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19세

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제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널리 확산되고 보편화되었

6) 2011년까지제3차위패안치신청자는921건이었으며,심사결과비대상자를제외하고832위의대상후보자가확

인되었다.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위패관긴립추진기본계획안」,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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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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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2) 국내 추모 시설의 위패관

국내의 주요 추모 공간 중 위패와 관련된 시설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립 서울현충원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국립 서울현충원은 군인 및 군무원으로 전사·순직하거나 임

무 중 순직한 경찰관 등 국가 또는 사회에 공헌한 공로가 인정되는 사망자를 안장대상

으로 하는 국립묘지이다.

14)

국립 서울현충원은 

1954년 3월에 착공하여 1957년 4월에 준공되었으며, 1965년 3월 

국군묘지에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서울현충원 내에 위패와 관련된 시설은 위패봉안

관(현충탑. 

67년), 무후선열제단(75년), 부부위패관(09년)으로, 총 세 개가 있다.

위패봉안관의 벽에는 ①안장대상자로서 

6·25전쟁, 베트남전쟁(월남전) 등에서 전

사·순직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유골 또는 시신을 찾지 못한 경우와, ②순국선열 및 국

가유공자,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 소방공무원, 의사상자 중 사망당시 안장

대상이 아니었던 자가 법령개정으로 안장대상자로 되었으나 유골이나 시신이 없는 자, 

102,196위(2018년 11월말 현재)의 계급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15)

국립 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과 벽에 새겨진 전몰장병 관등성명

14) 「국립묘지의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제5조제1항1호참조.
15) 국립서울현충원,주요묘역·시설물중‘위패봉안관’에관한설명에서참조,http://www.snmb.mil.kr/

mbshome/mbs/snmb/subview.jsp?id=snmb_020202000000.

동작동이 국군묘지 부지로 결정되었다. 

이때 우선적으로 고려된 추모 대상은 무명(

無名) 용사였다. ‘무명용사비’ ‘무명용사문’ 

건립과 무명 전사자의 안장이 유명(

有名) 전사자보다 9개월 먼저 이루어졌다.10)

무명 전사자의 안장이 비교적 용이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이는 불특정 전사자 전체

를 국가와 사회가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를 반영한 것이다.

11) 

‘상상의/상상된

12)  공동체’(

Imagined Communities)를 역설한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근대적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무명용사의 무덤과 기념비보다 더 인상적
인 것은 없다. … 그 무덤들에는 신원이 확실한 시체 또는 불멸의 영혼들이 없음에도 불

구하고, 매우 민족적인 상징물이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13)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인 

1965년 3월 30일

이다. 이는 현충원에 안장된(그리고 미래에 안장될) 

死者의 범위와 기준이 확대되고 그 

위상이 최상의 국가 지정 집단묘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자의 범위와 기준이 

확대된다는 것은 한국전쟁 동안 전사한 국군뿐만 아니라 경찰과 학도병 등 다양한 국가

유공자, 베트남전쟁 파병 전사자,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 전직 대통령이 망라된다는 

의미이다. 이를 통해 국립묘지라는 공간 자체는 신성한 곳(

sanctuary)의 위상을 획득하

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안장된 사자의 죽음은 국가적, 민족적, 애국적 이데올

로기와 상징으로 기능하고, 국가적 추모행위와 제의를 통한 국민국가적 통합을 주도하

는 소도(

蘇塗)의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군부독재 시대를 지나 민주화시대에 접어들자, 우리 사회는 민주화운동의 희생자와 

국가폭력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립묘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현충원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차원에서 

4.19묘지(1963년 9월)를 

‘국립

4.19묘지’(1995년 4월 완공)로 변경했고, 이어서 5.18묘지도 ‘국립3.15묘지’(1997

년 

5월 완공)로 승격되었다.

10) 국립현충원,『민족의얼』제4집,1999.,p.21,pp.169~170.
11) 김영범,「집합기억의사회사적지평과동학」『사회사연구의이론과실제』,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8.,p.197
12) 기존에‘상상의공동체’(IC)라는용어가‘허구적민족주의를비판한다’는‘오해’를불식시키기위해,최근에는‘상상

된공동체’라는번역이등장했다.베네딕트앤더슨지음·서지원옮김,『상상된공동체』,도서출판길,2018.

13) B.Anderson著,崔錫英譯,『민족의식의역사인류학』,서경문화사,1995.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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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에 모셔진 영정과 위패

19)

(4)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2001년 1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됨에 따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2016년 6월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공원로에 기념공원을 조성하였

다.

20) 일반 묘역에는 약 

136명의 묘를 매장 또는 이장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21)

이곳의 유영봉안소에는 민주묘역에 안장된 분들의 영정과 향나무 위패 

50여 위가 모

셔져 있는 추모공간으로서 기념관과 묘역의 연계성 확보를 위한 ‘전이공간’이다.

22)

(5) 서대문 독립공원

서대문 독립공원은 

1945년 광복 이전까지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수감했던 서대

문형무소 자리로서 

1960년대까지 서울구치소로 사용되었다. 1992년 공원으로 조성되

기 시작하여 

2009년 10월 독립공원으로 재조성되었다. 공원 내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

19)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일제강제동원희생자위패관건립타당성조사및기본계획수립용역」,2017.3.,

28쪽.

20) 행정안전부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민주화운동보상지원,민주화운동기념공원현황,http://pasthistory.go.kr/

cms/CmsPageLink.do?link=/minjoo/info2.do.;민주화운동기념공원,http://icheon.go.kr/site/eminju/sub.

do?key=8400.

21) 당초묘역조성당시에는1987년민주화운동때희생된박종철열사(경기남양주시모란공원민주열사묘

역),이한열열사(광주망월동5·18묘역)의묘를이장할계획이었지만,성사되지못했다.

22) 묘역에안장된희생자의영정을별도로조성한대표적시설은광주의‘국립5.18민주묘지’이다.이곳의유영봉안

소에는묘역에안장된희생자들의영정이안치되어있다.

(2) 국립 대전현충원

대전현충원은 당초 사병들의 안장 공간으로 

1979년 4월 착공되었다. 이후 장교와 경

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등의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국립묘지로 확대되었다.

16)

대전현충원의 위패 관련 시설로 위패봉안실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위패봉안실에는 

유격군

8240부대 전몰자 10,000여 위, 부부위패 488위 등 총 41,276위(2019년 9월 30

일 현재)의 관등성명이 새겨져 있다. 위패의 각 출신 배경과 구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17) 

2019년9월30일현재

국가사회 

공헌자

부부위패

독립

유공자

의사상자

장병

경찰

종군자

41,276

2

269

101

3

29,872

146

10,883

(3) 국립 4·19민주묘지

국립 

4·19민주묘지는 1960년 3월 15일 부정성거에 항거하여 발생한 4.19혁명에

서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1961년 2월 국무회의에서 공원묘지 설립을 결정하여 서울

시 강북구 

4·19로에 건립된 묘역이다. ‘국립’로 지정된 된 것은 1997년 4월(대통령령 

15360호)이며, 현재의 ‘국립 4·19민주묘지’로 개칭된 것은 2006년 1월이다.

국립 

4.19 민주묘지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유영봉안소(遺影奉安所)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총, 칼에 대항하여 맨손으로 불의와 싸우다 희생된 

224위의 영정과 향

나무로 된 위패 

370여 위가 봉안되어 있다.18)

16) 국립대전현충원으로준공및지정된것은1985년11월이다.
17) 국립대전현충원정보마당‘안장위패현황’참조.http://www.dnc.go.kr/_prog/stats/stats1.php?site_dvs_

cd=kr&menu_dvs_cd=040301

18) 국립4·19민주묘지이용마당정보공개,https://419.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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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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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평화공원 내 위패봉안실과 각명비

(7) 거창사건 추모공원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

군 병력 중 일부가 공비 토벌을 빌미로 양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

해 조성된 추모 공간이다.  

1996년 1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

치법’에 따라 

2004년 10월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에 추모공원이 준공되었다.

이곳의 위패봉안각에는 일반 묘역에 안장된 전체 희생자 

719명의 이름이 새겨진 오

석 위패가 모셔져 있다.

25)

(8)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산청·함양사건이란, 한국전쟁 중 

1951년 2월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작전의 일환으

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산청군과 함양군의 3개면 4개 마을 일대 양민 70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1996년 1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된 이래 

2004년 10월 무렵 산청군 금서면 화계오봉로에 합동묘역이 조성되었다.

이곳의 위패봉안각에는 일반 묘역에 안장된 희생자 중 

386명의 이름이 새겨진 향나

무 위패가 모셔져 있다.

26)

25) 거창사건추모공원시설안내도,https://www.geochang.go.kr/case/Index.do?c=CS0201000000.;일제강제

동원피해자지원재단,「일제강제동원희생자위패관조성추진상황」(작성일시미상),4쪽.

26)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소개,http://www.sancheong.go.kr/shchumo/contents.do?key=2267.;일제

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일제강제동원희생자위패관조성추진상황」(작성일시미상),4쪽.

국하신 애국지사들의 고 귀한 넋을 기리기 위해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별

도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의 현충사 

1층에 위패봉안실이 조성되어, 가로 15cm, 세로 25cm, 두께 1.5cm

의 옥돌로 만든 위패에 

2,835위가 모셔져 있다.

서대문 공원묘지 현충사 내 위패실의 위패

23)

(6) 제주 4·3평화공원

제주 

4·3평화공원은 1947년 제주 4·3사건의 민간인 희생자와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리고 추념하기 위해 

2000년 4·3특별법 공포에 따라, 2008년 3월 28일 평화기

념관이 건립되었다.

이곳의 위패봉안실에는 

4·3 당시 희생된 희생자의 신위 14,100여 기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공원의 핵심공간인 위령탑을 중심으로 한 중앙부의 환상(

環狀)통로를 끼고 각

명비가 들어서 있다. 각명비는 

4·3 당시 희생당한 사람들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사

망 일시와 장소 등을 간결하게 기록한 것이며, 당시의 마을별 단위로 각명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추모를 위한 비석이 아니라, 

4·3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죽음

의 사실에 대한 기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기념물이다.

24) 

23)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일제강제동원희생자위패관건립타당성조사및기본계획수립용역」,2017.3.,

32쪽.

24) 제주4·3평화재단4·3평화공원시설안내,https://jeju43peace.or.kr/kor/sub04_02_02.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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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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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이상 

9개 추모 공간의 위패 관련 시설물의 안장대상자와 위패 현황을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

구 분

안장대상자

위패 형태 및 개수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

순국선열등(한국전쟁등)

오석위패102,196위

국립대전현충원

위패봉안실

순국선열등(한국전쟁등)

오석위패41,276여위

국립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4·19혁명희생자

향나무위패370여위

민주화운동기념공원

유영봉안소

민주화운동희생자

향나무위패383위

서대문독립공원

현충사

순국선열

(일제강점기독립운동)

옥돌위패2,835위

제주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및각명비

제주4·3희생자

오석위패14,100여위

거창사건추모공원

위패봉안각

거창사건희생자

오석위패719위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

위패봉안각

산청·함양사건

향나무위패386위

천안국립망향의동산

봉안당

강제동원희생자,해외동포

오석위패385위

Ⅲ . 강제동원 희생자 위패관 및 추모 공간 조성 방향성에 대한 소고

1. 위패제사의 사회화 기능

‘위패제사’

29)는 한중일 

3국과 이들의 해외동포가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유교·불교·

29) 이하위패제사에관해서는조기호,「동(東)아시아의조상숭배와위패제사」『원불교사상연구원학술대회』

Vol.2013No.10,원광대학교원불교사상연구원,2013.를참조함.

(9)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은 당초 재일동포들의 사후 유해를 안장하는 묘지로서 재일동

포들의 헌금을 기반으로 

1976년에 조성된 추모 공간이다. 이후 망향의동산은 일본 지

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홍콩,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

티나, 말라위, 프랑스, 독일 등 세계 각국의 해외동포 영령들이 영면하는 공원묘지로 

확대되었다.

준공 이듬해인 

1977년 일본 가나가와현 지역의 재일민단이 가나가와현에서 취합한 

관동대지진 및 강제동원 희생자 무연고 유골 

36위를 합장한 이래, 19개의 합장묘가 조

성되었다.

그리고 화장된 유골을 안치하는 봉안당에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강제동원위원

회가 추진한 군인군속 유골 

423위와 2013년 강제동원위원회가 처음으로 남사할린 지

역에서 발굴한 한인 묘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85위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아울러, 이 봉안당에는 강제동원위원회의 추진으로 

2009년과 2010년의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85위27)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28)

천안 국립 망향의동산 봉안당 내 위패

27) 2009.12.8제1차위패봉안(131위),2010.10.6제2차위패봉안(257위),총388위였는데,현재는385위로

확인되고있다.3위는유족의요청으로회수된것으로추정된다.

28)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위패관건립추진기본계획(안)」(작성일시미상), 4쪽;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일제강제동원희생자위패관조성추진상황」(작성일시미상),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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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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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단과 사회의 ‘기억’에 관하여

1)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의 ‘집단기억’

기억사회학을 선도했던 모리스 알박스에 따르면, ‘집단기억’이란 ‘집단구성원들이 같

은 사건을 겪고 이를 공유하는 것’이며, ‘타인들이 어떤 사건에 대한 개인의 기억을 촉

발하거나 그 기억의 형성과 보존에 관여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의 기억을 촉발, 형성, 

보존하는 데 타자가 관여한다는 것은 집단기억의 성립 상황과 과정, 즉 환경을 의미한

다. 나아가 알박스는 개인의 기억은 파편화돼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소속 집단 내 

타인과 의사소통함으로써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주장했다. 집단기억은 곧 ‘의사소통적 

기억’인 것이다.

32) 

알박스는 집단기억이 갖는 

6가지 특성을 설명했다.

첫 번째는 ‘상호관계성’이다. 집단기억은 개인이 집단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소통함으로써 서로 영향을 끼치는 의사소통적인 기억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재성’이다. 집단기억은 그 당시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그대

로가 아닌 현재적 관점에서 기억한다.

세 번째는 ‘지속성’이다. 개인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파편화되어 있어 지속성이 결여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기억은 공간이나 관습, 사고방식 등의 사회적 틀을 

통해 영위하며 과거부터 현재, 미래까지 지속가능하다. 

네 번째는 ‘재구성’이다. 이는 집단기억 뿐만 아니라 기억이라는 큰 개념에서도 적용

이 되는 특성이다. 기억이라는 단어에서 조차도 재구성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성’이라는 특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는데 기억은 과거 그대로를 

기억할 수 없고, 기억하는 과정에서 가감하고 재배치하면서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선택성’이다. 이는 집단기억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으로 인해 집단기억의 사회적 틀을 영위하기 위한 기억은 선택된

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장소성’이다. 집단기억은 공간을 통해서 실체화되고 재구성된다. 여기

32) 김영범,「알박스의기억사회학연구」『사회과학연구』Vol.6No.3(1999),pp.576-577.

도교·신흥종교를 망라하고 나타나는 공통적 현상이다. 위패제사는 종교학, 문화인류

학, 민속학적 의미를 지닌다. 위패로 상징되는 조상숭배의 주요 목적은, 첫째 조상의 

영혼은 후손에게 ‘

神’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란다는 뜻이고, 둘째, 조상숭배를 통

한 사회조직 내에서의 ‘재산상속’ ‘가계계승’ ‘의례 의무 할당’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

다.

30) 

그러나 이처럼 위패제사 행위가 종교적 관습과 풍속의 영향, 사회문화적 기능을 수

행한다고 하더라도, 강제동원 희생자의 ‘국가적, 사회적 위패(관) 만들기’가 과연 종교

적 성격을 갖는다고 볼 수 있을지, 재산상속, 가계계승, 의례의무 할당의 기능을 수행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개인의 조상숭배 사상과 사회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무방하지만, 사회적·국

가적 차원의 ‘위패(관) 만들기’는 성격이 달라야 할 것이다.

사회적·국가적 차원의 ‘위패(관) 만들기’에는 치유와 기억, 전수라는 사회화 기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서구화와 근대성을 보편화한 현대사회는 집단적 기억

과 치유, 전수라는 사회적 기능을 통칭, 추모 공간과 시설, 즉 메모리얼(

Memorial)로 

통칭하기도 한다. 추모 공간에 기념비 등의 추도 시설을 조성하는 행위를 통해 사회와 

공동체는 과거의 흔적을 이해하고 그 기억을 강화시킨다. 또한 참담하고 비극적인 장소

와 사건을 직시함으로써 대중이 참사와 비극적 사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

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31)

동아시아 

3국에서는 위패제사가 이러한 사회화 기능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서구적 개념의 ‘메모리얼’이 과연 반드시 ‘위패제사’여야만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최근 건축학계와 추모 공간 조성 전문가 집단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인식 변화가 감지되

고 있으며 이는 향후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필자는 ‘위패’ 문제를 우리 사회가 강제동원 희생자를 어떻게 추모하고 기

억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집단기억’에 관해 간

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30) 조기호,「동(東)아시아의조상숭배와위패제사」『원불교사상연구원학술대회』Vol.2013No.10,원광대학교원불

교사상연구원,2013,50~52쪽.

31) 한별·이영수,「스토리텔링을적용한현대건축의기념비성표현에관한연구」대한건축학회추계학술발표대회논

문집Vol.31No.2(2011),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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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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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을 말하며 한 집단이 시간 속에서 스스로 연속적인 실체로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동

시에 연속성 인식의 표현이자 이를 강화하는 노력인 것이다.

39) 사회는 기억의 근거를 

제공하며, 개인으로 하여금 특정한 것을 기억하도록 하고, 또 어떤 것은 망각하도록 한

다. 게다가 사회는 개인이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사건도 기억하도록 만들어 준다. 

따라서 기억은 모든 과거 경험을 간직한 보관소가 아니며, 시간이 흐르고 사회적 조건

이 변함에 따라 일반화한 ‘심상’이 된다. 이러한 심상으로서 기억은 사회적으로 활용되

는 상징과 이야기 그리고 이를 저장하고 전수하는 사회적 수단의 산물이 된다.

40)

올릭은 알박스의 집단기억의 

6가지 특성 외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

첫 번째는 ‘심상성’이다. 사회적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일반화되고 그것은 심

상으로써 기능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분위기나 이미지 등과 함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두 번째는 ‘시간성’이다. 사회적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실천들이 진행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41)

서희정과 이재규는 이상의 집단기억의 특성을 기념공간의 구성요소인 기념(추모)대

42), 관람자, 공간의 표현적 측면으로 나누어 각각의 관련성에 대해 살펴보았다.43)

구성요소

집단기억 특성

기념공간

기념(추모)대상

선택성,시간성

관람방문자

상호작용성,재구성

공간

현재성,지속성,심상성,장소성

39) 제프리K.올릭,강경이옮김,『기억의지도-집단기억은인류의역사와사회,그리고정치를어떻게뒤바꿔놓았나?』,

옥당(북커스베르겐),2011,,pp.146-147

40) 제프리K.올릭,강경이옮김,『기억의지도-집단기억은인류의역사와사회,그리고정치를어떻게뒤바꿔놓았나?』,

옥당(북커스베르겐),2011,pp.146-147.올릭은집단기억의기능적측면을‘기억실천’이라는개념으로설명하고

있다.이는곧시간이지남에따라사회적기억이변화하는것을의미한다.

41) ‘심상성’과‘시간성’에관해서는,제프리K.올릭,위의책,pp.145-198.,pp.287-314.참조.
42) 기념대상은곧본고에서강제동원희생자이므로,필자는이를‘기념(추모)대상’으로바꾸었다.
43) 서희정·이재규,「기념공간에서의집단기억특성과공간연출요소의상관관계에관한연구」,『한국공간디자

인학회논문집』제12권4호통권46호,2017년8월,p.161.에서인용.

에서 공간은 기억의 장소로서 기능을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억의 장소를 체험하면서 

기억을 되살릴 뿐만 아니라 기억이 장소를 되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33)

이 중에서 ‘재구성’과 ‘선택성’은 ‘현재적 관점’(‘현재성’)에서 ‘편집’하는 것을 의미한

다. 이는 곧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Norbert Elias)34)의 ‘기억’에 대한 사회(국가)의 태도

와 필립 아리에스(

Philippe Aries)35)로 대표되는 ‘죽음의 역사’에 관한 ‘편집적 재구성’

(에디톨로지)를 연상시킨다.

이러한 사회적 기억은 집단 경험의 구체적이고 특별한 소통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집단이 인식하는 과거에 대한 관점과 미래를 위한 열망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

는 가능성을 지니고, 동시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형성되므로 사회 구성원

들의 특별한 아비투스(

Habitus)36)를 강화하거나 변화시키게 한다.37)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과 이를 추모하기 위한 ‘위패’ 또는 관련 공간과 시설물은 

곧 우리 사회의 집단적 기억과 경험의 구체적, 소통적, 지속적 소통이며 시간이 지날수

록 재형성되고 특별한 의미를 넘어 일상의 아비투스로 변화되고 이를 재강화하는 기능

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8)

2) 제프리 올릭(Jeffrey K. Olick)의 ‘사회적 기억’

한편, 제프리 

K. 올릭은 알박스의 집단기억을 기반으로 ‘사회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정체성을 다룬 학술연구에서 집단기억은 집단을 위한 ‘과거재현’이나 ‘기억실

33) 알라이다아스만지음,변학수·채연숙옮김,『기억의공간』,그린비,2011,p.24.
34) 사회적인식과태도의재구성(편집)에관해서는,노르베르트엘리아스,박미애옮김,『문명화과정2』한길그레이트

북스34,한길사,2012.의‘제2장국가의사회발생사’와제3장문명화이론의초안‘을참조할것.

35) 죽음에대한사회적인식에관해서는,필립아리에스지음,고선일옮김,『죽음앞의인간』,새물결,2004.을참조할

36) 부르디외의‘아비투스(Habitus)’개념중에서‘문화적(사회적)자본’에초점을맞춘글로서,김상준.「부르디외,콜

만,퍼트남의사회적자본개념비판」.『한국사회학』38집(6호),2004.참조할것.

37) 태지호,『기억문화연구』,커뮤니케이션북스,2014.,pp.32-34.
38) ‘어떠한’형태의아비투스일것이냐,또는그것에대한평가에관해서는논외로하며,필자의견해가이에반드시일

치한다거나부합한다는것이아님을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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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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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와 감정, 사상과 기억, 경험과 소망을 유기적으로 표현한 결과’

48)라고 요약할 수 있는

데, 세월호 사건의 ‘노란 리본’과 일본군위안부 ‘소녀상’ 등이 그 예이다.

필자는 사회적 죽음을 추념하고 추모하는 공간과 의례야말로 사회적 트라우마 상징

의 하나라고 본다. 이에 필자는 고유식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 상징이 지닌 

기능과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고유식은 트라우마 상징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 ‘사회적 트라우마 상징’의 기능과 역할

(1) ‘함께 기억하기’

인간은 불안을 느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회피와 기억의 왜곡을 원한다. 사회적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이 아무리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기억 자체를 왜곡시키

거나 회피하면 증상은 더욱 커진다. 대면되지 않은 기억은 현실 속에 다시 등장할 수밖

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억을 직면해야 하는데 직면의 괴로움과 회피 및 

왜곡의 위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징화(

Symbolization)이다. 상징화를 

통해 트라우마를 야기시키는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감정의 회피가 아닌 사건의 내용을 기

억하고 그로 인해 발생된 감정을 유지하며 노출의 지속으로 인해 이를 순화시킬 수 있

다. 기억으로 인한 감정의 강도는 상징화를 통해 순화되지만, 기억의 내용과 감정의 본

질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다.

49)

강제동원 피해라는 고통스런 기억은 상징화 과정을 통해 ‘함께 기억될 수 있다.’ 강제

동원 추모 공간이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 사회는 그 고통은 순화하되 강제동원에 대한 

기억과 감정의 본질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48) KristinMerle&BirgitWeyel,

SeelsorgeQuel envonSchleiermacherbiszurGegenwart(Tübingen:

Mohr-Verlag,2009),p.24.;JoachimScharfenberg,

EinführungindiePastoralpsychologie(Göttingen:

Vandenhoeck&Ruprecht,1985),p.86.이상은고유식,「사회적트라우마의돌봄을위한‘트라우마상징’연구」

『목회와상담』제28호,2017.p.21.에서재인용.

49) 고유식,「사회적트라우마의돌봄을위한‘트라우마상징’연구」『목회와상담』제28호,2017.pp.24~25.

3) 사회적 트라우마

전쟁이나 지진,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건물붕괴 등의 대규모 참사를 겪은 사람들

은 그 경험을 연상시키는 상황을 접하게 되면 조절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

러나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겪은 상처가 아닌 타인이 겪은 상처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

응한다. 이렇듯 타인이겪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부정적 사건 및 사고를 간접적으로 경

험한 후 그에 따른 감정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산되어 

사회 전반적으로 부정적 분위기를 형성한 심리적 상처가 바로 ‘사회적 트라우마’이다.

44)

이때 ‘사회적 트라우마’로 인해 형성된 ‘불안’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공동체가 함께 감당해야 하며 불안의 진정과 완화 역시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가야 

한다. 개인에게로 집중했던 에너지의 방향을 공동체로 전환해야 한다. 개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의 치유 방법 중 하나는 이를 유발시킨 트라우마 경험을 반복적인 

노출을 통해 대면하면, 불안과 공포가 반감된다.

45) 

하지만 사회적 트라우마의 경우는 다르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그 원인이 되는 경험

을 본인이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는 개인은 이를 직접 체

험한 사람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 트라우마를 겪는 공동체가 불안을 완

화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를 겪으며 형성된 감정들을 외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때 

공동체는 개인의 사회적 트라우마가 표현되고 치유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역동적 

힘을 발휘해야 한다.

46)

공동체는 상호간의 책임과 자유를 보장하며 그 안에서 위로와 평안을 함께 얻는다. 

트라우마후에 찾아오는 분노, 답답함, 무기력 등의 

2차적 감정 역시 공동체를 통해 이

를 함께 공유함으로 사회적 트라우마는 완화된다.

47)

고유식은 메를레(

K

. Merle), 바이엘(B. Weyel), 그리고 샤르펜베르크(J. Schafenberg)의 

연구를 원용하여 ‘사회적 트라우마 상징’에 주목하였다. 이는 ‘사회적 주체와 객체가 정

44) 권석만,『현대이상심리학』,학지사,2013.,pp.227~241.;고유식,「사회적트라우마의돌봄을위한‘트라우마상

징’연구」『목회와상담』제28호,2017.p.11.

45) 권석만,『현대이상심리학』,학지사,2013.,p237
46) 김진,「애도과정의목회상담적이해」『목회와상담』제15호,2010.,p.125.에서참조.
47) 권진숙,「세월호참사트라우마치유를위한관계문화적목회돌봄」『목회와상담』제26호,2016.,p.75.에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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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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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5) 르상티망(ressentiment)에 대한 경계

트라우마와 더불어 연상되는 개념 중 하나는 르상티망이다. 약자, 패배자, 피해자가 

품는 질투, 증오, 열등감이 표출되거나 특정 대상에게 투영되는 일련의 사회심리학적 

가치 체계이다. 이 가치 체계는 선망의 원천을 객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식별함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분개한 사람이 자신의 불안정과 결함을 

극복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 기제로 작용한다. 자아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단

절시키기 위해 적을 만들고 원망의 대상을 노정한다. 이는 원망과 보복을 갈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치유와 극복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병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53)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피해, 희생자의 문제, 특히 추모 공간이 우리 사회의 집단기

억과 사회적 트라우마의 문제인 것이 분명한 만큼, 이것이 내포하는 르상티망과의 필연

적 연관성 또는 부정하기 어렵다. 추모 공간에 한정한 경우일지라도, 이러한 공간과 시

설, 상징들이 반드시 긍정적인 기능과 효용만을 담보한다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르상티망의 기제가 내포되고 작동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바로 역설적이게도 해결되지 

못한 가해와 피해라는 트라우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강제동원 희생자 추모 공간과 시설, 상징들을 대면

할 때마다 사회적 트라우마 만큼이나 그것이 원래 지향해야 할 궁극적 ‘치유’로 나아가

기 위해서는 르상티망이 사회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것의 병리적 기제를 이해하고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는 태도를 단련시켜야 할 것

이다.

Ⅳ . 나오면서

이상과 같이, 우리는 집단기억과 사회적 기억의 의미와 필요성, 그리고 사회적 트라

우마 상징이 지닌 기능과 역할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강제동원 희생자를 

53) 본고에서는르상티망에관한니체와막스베버,막스셀러,한나아렌트등의개념을세분화하거나구분짓지않으

며,강제동원피해자추모공간을언급하는데필요한정도로만간략히언급하고자한다.

(2) ‘함께 애도하기’

애도의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대상을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을 자기 밖으로 충분히 

표현하기 위함이며 이 과정을 통해 대상과 건강한 분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 애도

는 비록 그 대상을 상실했지만, 그 대상 없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극복의 과정

이다. 사회적 트라우마의 경우 현재의 사회적 자아와 잃어버린 대상 간에 개인적, 직접

적, 공시적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함께 기억하고 함께 애도해야 할 필

요성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 트라우마 상징, 즉 추모 공간이 바로 상실한 대상

과 사회적 개인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추모 공간(상징)을 통해 공동체 

구성원은 자신의 감정을 추모 대상과 소통하며 타인들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애도를 통해 사회는 건강한 현실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51)

(3) ‘함께 희망하기’

트라우마 상징은 피해자에 대한 애도, 불안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를 나타내지

만, 나아가 동일한 참사와 고통, 슬픔이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소망

을 소환하기 마련이다. 상징은 소망, 즉 현실과 반대되는 가상의 현실을 창조하면서 현

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기대와 소망을 대신 실현시켜주는 장소이다. 인간은 상징을 통

해 부정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현실과 반대되는 경험을 하길 원한다.

52)

강제동원 추모 공간과 시설은 국가와 사회, 체제를 넘어, 보편적 인간에 대한 가혹한 

강제노동과 착취, 억압이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되며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소망

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장소여야 한다.

50) 김진,「애도과정의목회상담적이해」『목회와상담』제15호,2010.,p.123.
51) 고유식,「사회적트라우마의돌봄을위한‘트라우마상징’연구」『목회와상담』제28호,2017.pp.27~28.에서참조.
52) 고유식,「사회적트라우마의돌봄을위한‘트라우마상징’연구」『목회와상담』제28호,2017.p.28.에서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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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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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걸림돌은 인도(

人道)의 보도블록과 함께 박아 넣은 겨우 10×10cm 크기의 작은 비

돌출형 동판 표지석이다. 걸림돌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강제이송되기 전 마지막으

로 살았던 집이나 일했던 장소 앞의 인도에 설치되었다. 이를 통해 걸림돌이 밖힌 인도

는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기억하는 역사의 장소로 변모하였다. 걸림돌은 보

행자를 진짜 걸려 넘어지게끔 만드는 물리적 걸림돌이 아니라 정신적 걸림돌로 이해되

어야 한다. 뎀니히는 “머리와 가슴으로 걸려 넘어진다”

55)라고 표현하고 있다. 

걸림돌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이웃들을 외면하고 침묵했으며, 몰랐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독일인 이웃들이 공범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 홀로코스트의 출

발점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억 교정”

56)을 시도하는 것이다.

여타의 추모비들이 의례화와 추상화될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지만 걸림돌은 

구체적이며 가까운 일상 속에서 나치의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

에서 혁신적이다.

57)

뎀니히가 “탈중심적 추모비”

58)라 칭한 바처럼 걸림돌은 “지역의 기억장소”59)로서 각 

지역과 지방에 분산되어 설치되었다.

뎀니히는 걸림돌을 어느 한 희생자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태인, 신티와 로마

(

Sinti und Roma) 집시, 사회주의자, 노조원, 동성연애자,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등 

나치에 의해 박해당하고 살해당했던 모든 희생자들을 위해 놓고 있다.

걸림돌의 형태는 실명을 명확하게 새겨 넣는 데 있다. 뎀니히는 “인간은 자신의 이름

이 잊혀질 때 비로소 잊혀진다.”

60)고 여겼고 걸림돌 프로젝트에서 망각에 저항하는 예

술을 구체화시켰다. 즉 걸림돌은 “망각에 저항하기 위해 이름을 다시 불러준다는 전제

55) IreneAllerborn,ManstolpertmitdemKopfunddemHerzen.In:WestdeutscheAllgemeineZeitungvom

31.01.2017.

56) AndreaKabus,Stolpersteine.In:https://www.bibelwissenschaft.de/fileadmin/buh_bibelmodul/media/

wirelex/pdf/Stolpersteine,2017-10-10_11_13.pdf.

57) 이홍경,위의글,p.134.
58) GunterDemnig,GunterDemnigimGesprächmitJoachimRönneper.ZwischenMutterundVaterdas

Kind.In:Rönneper,Joachim(Hrsg.):VonmeinerHaustür,StolpersteinevonGunerDemnig.Weimar,12-

14.2010.,p.13.

59) AndreaKabus위의글,2017.
60) UtaFranke,Stolpersteine.Idee,VorgeschichteundEntwicklungeinesKunstprojektes,GunterDemnigim

GesprächmitUtaFranke.In:http://www.stolpersteine-elmshorn.de/artikel/demnig/demnig.htm.

추모하는 공간과 행위, 사회적 소통의 표상과 수단이 반드시, 국립묘지 또는 위패에 한

정되지 않으며 이에 한정해서도 곤란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제동원 희생자를 추모하는 공간과 시설, 표상과 상징이 특정 기관이나 위패관의 

건립에 있지 않으며, 이를 더욱 사회와 집단 속에 확장하며 공감을 이끌어 내고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에 필자 나름의 대안적 모색의 하나로 다음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독일의 홀로코스트 추모문화의 새로운 흐름54)

2차 세계대전의 유태인 학살 사건 희생자에 대한 추모에 관해서는 비교적 널리 알

려져 있다. 이 가운데 예술가인 군터 뎀니히(

Gunter Demnig)의 구상과 운동에서 비롯

된 ‘걸림돌(

Stolperstein)’에 관해 살펴보자.

걸림돌 작업은 

1995년 뎀니히에 의해 퀼른에서 시작된 이래 시민들의 자발적 동참

으로 전 독일, 나아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우크라이나, 

폴란드, 체코, 노르웨이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다. 

2017년 말까지 전 유럽에 약 

63,000여 개의 걸림돌이 설치되었다. 2005년 10월 이 걸림돌 프로젝트는 사회적 중요
성을 인정받아 독일 연방공로 십자훈장을 받았다.

걸림돌(Stolperstein)

54) 이홍경,「독일의홀로코스트추모문화의새로운흐름-‘걸림돌프로젝트’연구」『독어독문학』제146집,2018년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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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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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2

. 국내의 실천 사례

국내에도 이미 뎀니히의 걸림돌 운동을 차용하여 실천에 나서고 있다. 

90년대 초 탈

북청소년 지원 사업, 홋카이도 지역 시민단체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한일공동워크숍 등

을 추진한 ‘동아시아 공동워크숍’이라는 단체가 

2015년 8월 ‘사단법인 평화디딤돌’로 명

칭을 변경하고, 최근에 “

70년만의 귀향”이라는 유골 봉환 사업을 추진하였다.

일찍이 홋카이도 지역에서는 노무자로 동원되었다가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1997년

부터 한국, 재일동포, 일본 학생, 시민들이 직접 발굴해 왔는데, 

2015년 평화디딤돌과 

홋카이도 지역의 시민단체 등이 ’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프로젝트를 주도하여 지역 내 

사찰 등에 모셔져 있던 

115위의 유골을 국내 모셔와 파주시립묘지에 안치한 바 있다.

이후 평화디딤돌은 

2016년부터 뎀니히의 ‘걸림돌’ 작업에 착안하여 강제동원 희생자 

분들을 기릴 수 있는 동판, 소위 ‘이 동네 사람-디딤돌’의 설치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동네 사람-디딤돌’은 당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고향 어귀에 

그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프로젝트이다.

조건”

61)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걸림돌 운동의 특징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을 두는 데 있다. 걸림돌 프로젝트

를 통해 지역 주민과 시민, 지자체, 지역 사회 단체, 지역 언론 등이 나치의 과거에 대

한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배우고 상호교환하고 논쟁하고 연대하

고 참여”

62)가 이루어졌다. 이는 “참여적 추모문화”63)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걸림돌 운동은 교육적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바

가  매우  크다.  크니게는  “도덕적  호소의  기억  패러다

임,  파토스  형식들,  습관적인  상투어나  의례로부터의 

이별”을 단행하고, “텅 빈 기억명령 대신 성찰하는 역

사의식의 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

거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과 감정적 접근의 연계”를 통

해 과거 역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 과정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64)

이런 점에서 걸림돌은 기존의 추모비와는 달리 한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감정적 

접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나치과거의 의미를 적극적

으로 발견하는 ‘인식론적 접근’이 가능한 효과적인 역사적 학습장소이다. 실제로 걸림돌

이 설치된 지역의 각 시민네트워크는 지역 내 학교와 연대해 역사 교육적 효과를 거두며 

미래세대를 위한 기억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걸림돌은 대학생, 청소년 및 아이

들에 이르기까지 적극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학생들이 활동했던 분야는 특히 세 분야 

로 나눌 수 있다. 사료조사, 홍보 그리고 걸림돌 후속관리가 바로 그것이다.

65) 이 점에서 

걸림돌은 바로 “기억의 추모비”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추모비”

66)인 것이다.

61) HaraldSchmid,StolpersteineundErinnerungskultur-eineZwischenbilanz.》VortragaufderTagung

Stolpersteine-IrritationenderErinnerung《,9./10.September2》011,EvangelischeAkademieder

NordelbischenKirche,KatholischeAkademieHamburg.Hamburg.,p.18.

62) BrindaSommer,위의책,p.103.
63) AnnaWarda,EinKunstdenkmalwirftFragenauf.Die“Stolpersteine”zwischenAnerkennungundKritik.

In:ZeitgeschichteOnline,21.März2017.

64) VolkhardKnigge,ZurZukunftderErinnerung.In:bpd,21.6.2010.
65) 이홍경,위의글,p.140
66) GunterDemnig,위의글,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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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오키나와 전투의 전(全) 전쟁사망자 

각명비・평화의 주춧돌의 의의

-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미군의 
마지막 지상전이 된 오키나와 전투 

-

이시하라 마사이에(石原昌家) 명예교수
(오키나와 국제대학)

沖縄戦の全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
の意義
-アジア太平洋戦争で日本軍と米軍が最後の地上
戦となった沖縄戦―

石原昌家
(沖縄国際大学名誉教授)

발표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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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争犠牲者追念施設の国際比較

沖縄戦の全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の意義

 

-アジア太平洋戦争で日本軍と米軍が最後の地上戦となった沖縄戦―

/

石原昌家

(沖縄国際大学名誉教授)

はじめにー刻銘対象者とその数

1945年3月から6月にかけての沖縄戦で、直接・間接の戦争死没者総数は、沖縄

県が「平和の礎」に刻銘した数でみると、2019年6月23日現在、24万1,566名であ
る(遺族の刻銘の申請があれば、その数はさらに増加する可能性がある)。その
内訳は、琉球(沖縄)人(八重山・宮古・沖縄諸島)14万9,529名、琉球を除く
日本人(日本兵)7万7,448名、米国人(米国兵)1万4,009名、英国人(英国兵)
82名、大韓民国人382名、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人82名、台湾人34名となって
いる。大韓民国、朝鮮の戦争犠牲者の数はわずかな人数しか分かっていない。日
本政府が調査をしていないので、正確な犠牲者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ていない。
それで、一部の戦争被害者しか刻銘されていない。平和の礎の最大の特徴は、全
戦没者ということだから、国籍や敵・味方の関係だった日本軍と米軍の戦闘員、
さらに戦争指導者や一般住民への加害者の区別もしないで刻銘している。さらに
日本軍に朝鮮半島から強制連行されてきた「朝鮮人軍夫」・「朝鮮人慰安婦」や
「台湾人軍夫」などの戦争死没者が刻銘対象者となった。このような刻銘の対象
者について、琉球(沖縄)【以下、慣例にしたがって沖縄とだけ記す】住民にと
って、自分たちの肉親を殺した敵軍兵士やスパイ視して殺害したり、死に追いや
った日本兵も住民と同じように刻銘することについて、「平和の礎刻銘検討委員
会」(石原昌家委員長)の会議でも、まったくなんの反対意見もでなかった。沖

발표문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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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2019年度下半期の国際学術大会

に刻銘されているので、いっそう、それぞれの遺族にとって、戦争の無意味さや
虚しさを際立たせている。

また。戦争指導者や住民への加害者の日本兵も、戦闘中に、「スパイだ、非

国民だ」と、住民を殺したり、死に追いやったりしても、自らも被弾死、あるい
は死に追い込まれていった。そのような兵士や戦争指導者も死んだという事実
は、沖縄戦の歴史の事実を記録する意味でも被害者同様に、加害者の名前を刻ま
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わかりやすく説明するならば、ドイツを例にあげる
と、戦争被害者のアンネ・フランクの名前と同じように、殺した側のヒットラー
の名前も記録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して、その記録碑とリンクした資料館で
は、なぜ、アンネ・フランクは殺されたのか、ヒットラーはなぜ死ぬようなこと
になったのか、ということを次世代の人たちが理解できるように戦争の原因を解
明し、二度と戦争が起こさないように、平和を希求する心を形成することが大事
だということである。それで沖縄戦の実態を解明した「沖縄県平和祈念資料館」
は、「平和の礎」とセットであり、絶対に切り離してはいけない。

さらに、刻銘の仕方について、平和の礎を建設した沖縄出身者だけは家族単位

になっている。家族の中には、日本軍兵士として他国のひとを殺したひともおれ
ば、米軍や日本軍に殺されたひともいるということも想定できる。つまり、家族
のなかに戦争加害者もおれば被害者も存在するはずだ。しかし、沖縄戦で生き残
ったか死没したのかいうことを家族単位、集落単位で勤務する大学の学生たちと
調査してきた私には、戦争での加害者や被害者を区別して、その名前を刻むとい
う発想は生まれなかった。

2.「平和の礎」除幕式の特徴

沖縄島の南部南端の糸満市(いとまんし)摩(ま)文(ぶ)仁(に)(地名)の平和公園

に創設された「平和の礎(いしじ)」は1995年6月23日に除幕した。それはアジア太
平洋戦争・沖縄戦終結50周年を記念したものだった。その除幕式には、沖縄住民
をはじめ日本の総理大臣、衆議院と参議院の議長、最高裁判所長官という司法・
行政・立法を司る機関の長、つまり「三権の長」も参列するという特別な式典に

縄住民の戦争体験は、被害の部分が圧倒的に多かったので、ともすれば、沖縄の
人の加害の部分は存在しないかのような印象を与えてきた。しかしながら、その
会議で「沖縄遺族会」の要望をうけ、沖縄出身者だけは、中国などの東南アジ
ア、南洋諸島など海外での戦争死没者も刻銘の対象にすることにした。それで帝
国日本が外国に侵入した土地で、植民者としてあるいは日本軍兵士としての役割
を沖縄のひとも担ってきたので、結果的に沖縄のひとの中には戦争に加害責任が
あるということも刻まれることになった。つまり、戦時中に沖縄のひとが中国で
戦死したということは、そのひとが中国への侵略軍に加わっていたということに
なるからである。しかしながら、平和の礎には刻銘者の戦死地は刻んでいないの
で、この客観的事実について、多くの人は知ることができない。

1.「平和の礎」への問題提起をうけ

戦争の加害者と被害者を同じ敷地内で刻銘して、「追悼」することは日本国家

の戦争責任をあいまいに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問題提起が、除幕以前から存在し
た。委員長だった私に対して、住民と同じ敷地の日本軍兵士の刻銘版は破壊する
という抗議の電話やなんどか沖縄の新聞などで私を批判する投稿もあった。そこ
で私は、つぎの個人的見解をのべて、批判者と応答してきた。

戦争における敵・味方、加害者・被害者、戦争指導者などを区別なく、また国

籍も問題にしないで、戦争で死んでいった人たちの名前を国別、出身県、市町村
字(あざ)別に家族単位で刻銘するということは、まず、戦争の実態、事実をあり
のままに記録するということである。当時の敵兵も戦争指導者や住民に加害を加
えた日本兵もその名前に官位をつけずに、一個人に還元して刻むことにする。そ
れは、いったん戦争が起これば、戦争に勝利した国もこれほどの多くの兵士が死
んでしまうということを世界に知らせることになる。また、政府・国家は戦争の
勝利を喜んでも、その国の遺族にとっては、悲しみしか残らない。したがって、
戦争というものがいかに虚しいものであるかを伝えていくことになる。とくに
陸、海、空を制して圧勝している米軍の最高指揮官が、日本軍を掃討している最
中に戦死して、その後敗北して自殺した日本軍の最高指揮官とともに、平和の礎

戦争犠牲者追念施設の国際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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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2019年度下半期の国際学術大会

ある。

「かえりみれば、我が祖国が国権を簒奪(さんだつ)された悲痛の時代に、国家

と民族そして個々人の意思とは関係なしに、この南冥(なんめい)の地に強制的に
連れてこられ、あらゆる差別、虐待、苦難を強いられたあげく、祖国の光復(解
放独立)を見ずに無念にも命をなくした無数のみ霊よ!さぞかし残念無念だった
でしょう。30余万人に上るわが同胞が帝国主義日本によって強制連行され、戦
後50年が経過した今日に至るまで10余万人がどこで、どのように犠牲になった
かについて連行していった日本当局からなんら説明がありません。」「(今日の
平和の礎除幕式典は)日本政府当局の無誠意、責任感の欠如を全世界にさらけだ
したものです。」「平和理念の発信地になるべく、戦後50年の節目に事業の一つ
として平和の礎が今日除幕され平和のともしびが点灯されますが」「姓名も犠牲
になられた場所も判明しないみ霊たちよ!どうか不義の侵略と戦争をたくらむ者
たちを目ざめさせ、世界平和と和睦の道へお導きください。」「どうか長年の恨
み、つらみを忘却のかなたに押しやり、とこしえにみ霊の安らかんことを祈念し
ます」。

つぎに「総連」代表の金 洙變(キム スソプ)委員長のあいさつの肝要部分であ

る。

「朝鮮の解放50周年に当たる意義ある年に、ここ沖縄にて『平和の礎』除幕式

が厳かに執り行われることに際し、私は朝鮮人民の名において全犠牲者のごめい
福を祈り平和への誓いを新たにするものです。日本の朝鮮に対する植民地支配と
無謀な戦争により沖縄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同胞は『従軍慰安婦』を含め数千
人がその尊い生命を失いました。しかし犠牲者のうち氏名が刻まれたのは、わず
か133人にすぎず、ほとんどの人々が半世紀を経た今日も、人知れず遠く異郷の
地に埋もれているのです。私はこれらの惨劇に思いをはせる時、数多くの無辜(む
こ)の民に犠牲を強いた蛮行への憤りを新たにし、民族の念願である南北朝鮮の統
一、日本との国交正常化、アジアと世界の平和実現への決意をさらに固くするも
のです。私たちは、ここ沖縄での『平和の礎』が日本の過去の真の清算に結びつ
き、朝鮮と日本の善隣外交を築き、世界の恒久平和の道へ強く、太くつながって
いくものと確信してやみません。」

以上のお二人のあいさつは、帝国日本の蛮行を糾弾し、犠牲者の悔しい思いを

なった。さらに、駐日アメリカ大使、各政党の有力者、アメリカ本国からも沖縄
戦に参戦した退役軍人や戦死した米兵の遺族、在日本大韓民国民団沖縄地方本部
代表、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沖縄県本部常任委員会代表、県内から知事をはじめ
とする各市町村自治体長、県内外の遺族関係者らが出席した。当日、NHKが式典
の模様を中継放送したが、「平和の礎」の刻銘検討委員会の委員長を務めていた
私はその解説者を務めることになった。日本政府は、1910年、大日本帝国が「韓
国併合ニ関スル条約」を口実にして、朝鮮半島を統治し、朝鮮韓国の人たちに
苦難の歴史を強いてきた。しかし、戦後、朝鮮人強制連行による「朝鮮人軍夫」
「慰安婦」「徴用工」問題等として日本で顕在化しても、日本政府は個々人への
謝罪や補償を果たさないで、朝鮮半島への苦痛の歴史を清算することなく、戦後
50年を迎えていた。

3. 日本の三権の長への激白

「平和の礎」は、敵・味方区別なく刻銘したので、結果的に戦闘に加わった元

軍人、その遺族や子孫、加害者、被害者がその刻銘版の前で一堂に顔を合わせる
場所になった。つまり、戦争を反省し、平和を志向する「対話」の場となりうる
機会が物理的に生み出される場所になったのである。

その機会は、まさに「除幕式」当日に生まれた。
招待された各界のあいさつの中で、資料1、資料2、で紹介した韓国の「民

団」代表と朝鮮の「総連」代表が、日本国家の「三権の長」を前にして、その思
いの丈を激白した後、日本の「三権の長」へ「和睦」や「善隣外交」を呼びかけ
る機会が生まれたのである。それは、「平和の礎」の見えない力が、思いもよら
ないその機会を作ったといえる。日本政府は、沖縄県にその二人のあいさつ文の
内容を知らせるように求めたが、それに応じなかったというのを当時の知事公室
長から直接聞いたのは、本年6月のことであった。私は、二人の母語による挨拶
は、日本語に翻訳されたあいさつ文を直接読みながら、その場で聞くことができ
た。(資料1、資料2参照)

まず、「民団」代表の全 泰慶(ジョン テギョン)団長のあいさつの肝要部分で

戦争犠牲者追念施設の国際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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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2019年度下半期の国際学術大会

いう「平和のこころ」が根底にあったから、全戦没者の刻銘という発想が自然に
うまれた、といえる。

つまり、「平和の礎」という刻銘版群(石碑)は、「ぬちどぅたから(命こそ

宝)」という平和思想を具体的な形に表わしたものだということは、除幕後、平
和の礎を作った多くの人たちの共通の認識になっている。そこで、いまや「命(ぬ
ち)どぅ宝のマブイ(魂)を継承し、平和の礎を創設した沖縄の人びとにノーベル
平和賞を」実行委員会が結成され、その活動は継続している。それは、いま、必
死に民主主義を守ろうと行動を起こしている「香港市民にノーベル平和賞を」と
いう動きに通底しているといえるだろう。

【参照論文】

•  石原昌家「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が意味するもの」
 (季刊「戦争責任研究」第8号1995年夏季号)
•  石原昌家/新垣尚子「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の機能と役割」
 (「南島文化」沖縄国際大学南島文化研究所紀要第18号1996年3月)
•  石原昌家「全戦没者刻銘碑『平和の礎』の本来の位置づけと変質化の動き」
 (田中伸尚編「国立追悼施設を考えるー『国のための死』をくり返さないために」樹花舎

2003年)

代弁している。しかし、さいごは「和睦」「善隣外交」をキーワードにして未来
にむけ、世界平和を築いていくことを訴えている。「平和の礎」が敵・味方、加
害者・被害者をこえ、「対話の場」となる第一声を発した価値あることばとして
歴史に刻まれた。

おわりにー「命こそ宝」を形にした「平和の礎」

沖縄住民が「平和の礎」を創設しようと思いついたのは、「人間が人間でなく

なる」ほどの地獄と化した激戦場のなかを三か月余も奇跡の連続でかろうじて生
き残ったという体験がその背景にあったからであろう。歴史的に戦争に明け暮れ
てきた人間に二度と戦争を起こさせない、戦争に参加させない最善の方法は、過
去に大量殺戮(さつりく)の場となった戦場を戦死・戦争死没者の遺骸とともに、
そのまま残しておくことである。沖縄戦を例にあげると、20数万人の戦死・戦
争死没者をそのままの状態で残して、戦場の光景を風化させなければ、そこで二
度と戦争をおこそうとする人たちは現れないはずである。そのような戦場の光景
を前にしてはいかなる正戦論者も戦争を正当化できないし、「軍事力の行使」を
容認することはできないはずである。しかし、そのような方法を具体化すること
は現実的ではなく、一般的に不可能である。だが、それに代わる一つの方法があ
る。戦死・戦争死没した具体的個人の存在を表わす名前を一堂に刻めば、少なく
とも戦争犠牲者の抽象的数字がより具体的な人間としてみえてくるであろう。あ
とは、個々人の想像力、感性と理性の問題となる。ひとによっては、その名前が
戦場に累々(るいるい)と横たわる遺体、遺骨に見えてくるはずである。それゆえ
に、「平和の礎」が発信するメッセージは、世界で起きるすべての戦争・紛争を
否定するという普遍性・思想性を内在しているといえる。

それは戦争の事実を記録することに徹することによって、生きとし生けるすべ

ての生命が大事である、という人類に普遍的な「平和のこころ」、「平和を希求
(ききゅう)するこころ」が自然に生まれてきたのであろう。最初は明確に見通し
た考えでなく、心のうちに「もやもや」と思うところから出発したと思える。そ
れはまた琉球沖縄の伝統的平和思想といえる「ぬちどぅたから(命こそ宝)」と

戦争犠牲者追念施設の国際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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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2019年度下半期の国際学術大会

【資料 1】

【資料 2】

戦争犠牲者追念施設の国際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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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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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오키나와 전투의 전(全) 전쟁사망자 

각명비・평화의 주춧돌의 의의

 

-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미군의 마지막 지상전이 된 오키나와 전투-

/

이시하라 마사이에(石原昌家) 명예교수

(오키나와 국제대학)

프롤로그 - 각명 대상자와 그 수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발생한 오키나와 전투의 직접/간접 사망자 총수는 오키나

와 현이 「평화의 주춧돌」에 새긴 수를 보면 

2019년 6월 23일 현재 24만1,566명이다(유

족이 각명을 신청하면 그 수는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그 내역은 유구(오키나와)

인(아에야마/미야코/오키나와제도) 

14만9,529명, 유구를 제외한 일본인(일본군) 7만

7,448명, 미국인(미군) 1만4,009명, 영국인(영국군) 82명, 한국인 382명, 북한인 82
명, 대만인 

34명이다. 한국과 북한의 전쟁 희생자 수는 적은 수밖에 확인되지 않고 있

다. 일본 정부가 조사하지 않고 있어 정확한 희생자를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일부 전

쟁 피해자만 새겨져 있다. 평화의 주춧돌의 최대 특징은 국적, 적, 아군 관계였던 일본

군과 미군의 전투원, 전쟁지도자, 일반주민에 대한 가해자를 구별하지 않고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의 이름을 새겼다는 점이다. 여기에 한반도에서 일본군으로 강제 연행

되어온 「조선인 군부」, 「조선인 위안부」, 「대만인 군부」 등의 전쟁 사망자가 각명 대상자

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각명 대상자에 대해 유구(오키나와)【이하 관례에 따라 오키나와

로만 기재】 주민 입장에서 자신들의 육친을 죽인 적군병사나 간첩으로 보고 살해하거나 

죽음으로 몰아넣은 일본군도 주민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새기는 것에 대해 「평화의 주춧

번역문

돌 각명 검토 위원회」(이시하라 마사이에 위원장) 회의에서도 어떠한 반대 의견이 나오

지 않았다. 오키나와 주민은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부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자칫 오키나와인은 가해한 부분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회의에서 「오키나

와 유족회」의 요청에 따라 오키나와 출신자만은 중국 등의 동남아시아, 남양군도 등 해

외에서 발생한 전쟁사망자도 각명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일본이 외국에 침입한 땅에

서 식민자로서 또는 일본군 병사로서의 역할을 오키나와인도 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

로 오키나와인 중에는 전쟁에 가해 책임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점도 새기게 되었다. 전

시 중에 오키나와인이 중국에서 전사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중국 침략군에 가담했었다

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평화의 주춧돌에는 각명자가 전사한 장소는 새겨지 않아 이 객

관적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1. 「평화의 주춧돌」에 대한 문제 제기

전쟁 가해자와 피해자를 같은 부지 내에 각명해 「추도」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에 대한 

책임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문제 제기가 제막 이전부터 있었다. 위원장이었던 나

에게 주민과 같은 부지에 있는 일본군 병사의 각명판을 파괴하겠다는 항의전화가 오거

나 몇 번인가 오키나와 신문 등에서 나를 비판하는 투고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개

인적 견해를 밝히며 비판자들에 응답했다.

전쟁에서의 적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 전쟁지도자 등을 구별하지 않고, 또 국적도 

문제로 삼지 않고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국가별, 출신현, 시정촌(

市町村: 

일본의 행정구역 명칭)별로 나누어 가족 단위로 각명하는 것은 우선 전쟁의 실태 및 사

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다. 당시 적병과 전쟁지도자나 주민에게 가해를 가한 

일본군 모두 그 이름에 관위를 달지 않고 한 개인으로 환원해 새기기로 한다. 그것은 일

단 전쟁이 일어나면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에서도 이렇게 많은 병사가 죽는다는 것을 세

계에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또 정부와 국가는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기뻐해도 그 국가

의 유족에게는 슬픔밖에 남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전하게 된다. 특히, 육해공을 제압하며 압승하고 있던 미군의 최고지휘관이 일본군을 

소탕하던 중 전사해 이후 패배로 자살한 일본군 최고지휘관과 함께 평화의 주춧돌에 각

명되었기 때문에 유족에게 있어 전쟁의 무의미함이나 덧없음을 더욱더 두드러지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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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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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고 있다.

또 전쟁지도자나 주민에 대한 가해자인 일본군 중에서 전투 중 “스파이다, 비국민이

다”라고 말하며 주민을 죽이거나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도 총에 맞아 죽거나 죽음에 몰

렸다. 그러한 병사나 전쟁지도자가 죽었다는 사실은 오키나와 전투의 역사적 사실을 기

록하는 의미에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피해자와 마찬가지로 가해자의 이름을 새겨야 한

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독일에서 피해자인 안네 프랑크의 이름

과 같이 가해자인 히틀러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한 비석과 연

결된 자료관에서는 안네 프랑크가 왜 죽임을 당했는지, 히틀러는 왜 죽게 되었는지를 

다음 세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전쟁의 원인을 해명하고,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

나지 않도록 평화를 희망하는 마음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키나와 전투의 

실태를 해명한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은 「평화의 주춧돌」과 세트이며 절대 떼어 

놓아서는 안 된다.

아울러 각명 방법과 관련해서는 평화의 주춧돌을 건설한 오키나와 출신자만 가족 단

위로 새기고 있다. 가족 중에는 일본군 병사로 다른 나라 사람을 죽인 사람이 있다면 미

군이나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상정할 수 있다. 즉, 가족 중에 

전쟁 가해자가 있다면 피해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살아남았는지 

죽었는지를 가족 단위, 취락 단위로 학생들과 함께 조사해온 나는 전쟁의 가해자와 피

해자를 구별해 이름을 새긴다는 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2. 「평화의 주춧돌」 제막식의 특징

오키나와 섬의 남부 남단에 위치한 이토만 시 마(

摩)부(文)니(仁)(지명) 소재 평화공

원에 창설된 「평화의 주춧돌」은 

1995년 6월23일 제막했다. 그것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오키나와 전투 종결 

50주년을 기념한 것이었다. 그 제막식에는 오키나와 주민을 시작

으로 일본 총리, 중의원과 참의원 의장, 대법원장 등 사법, 행정, 입법을 담당하는 기관

의 수장, 즉 「삼권의 수장」이 모두 참석한 특별한 식전이었다. 또 주일 미국대사, 각 정

당의 유력자뿐만 아니라 미국 본국에서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한 퇴역군인, 전사한 미군

의 유족이 찾아왔으며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오키나와지방본부 대표, 재일본조선인총연

합회 오키나와현 본부 상임위원회 대표, 오키니와 현지사를 비롯한 각 시정촌의 자치

단체장, 유족 관계자들이 출석했다. 당일 

NHK가 식전 모습을 중계했는데 「평화의 주춧

돌」 각명검토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해설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1910년 대일본제국이 「한국 합병에 관한 조약」을 구실로 한반도를 통치해 한국인들에
게 고난의 역사를 안겼다. 그러나 전후 조선인 강제 연행에 의한 「조선인 군부」, 「위안

부」, 「강제 징용 피해자」 문제 등이 일본에서 표면화되어도 일본 정부는 개개인에 대한 

사죄나 보상을 하지 않고 한반도에 안긴 고통의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채 전후 

50년을 

맞았다.

3. 일본 삼권의 수장을 향한 토로

「평화의 주춧돌」은 적과 아군 구별 없이 각명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군인, 그 유족과 자손, 가해자, 피해자가 각명판 앞에서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하

는 장소가 되었다. 즉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대화」의 장이 될 수 있는 기회

가 물리적으로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기회는 마침 「제막식」 당일 탄생했다.

초대받은 각계의 인사말 중에서 자료

1, 자료2에서 소개한 한국의 「민단」 대표와 조선

의 「조총련」 대표가 일본 「삼권의 수장」을 앞에 두고 생각을 전부 토로한 후 일본 「삼권

의 수장」에게 「화해」와 「선린외교」를 호소하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평화의 주춧돌」의 

보이지 않는 힘이 뜻밖의 기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현에 그 

두 명의 인사말 내용을 알리도록 요구했으나 그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당시 지사실

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올해 

6월의 일이었다. 나는 모국어로 말하는 두 사람의 이

야기를 일본어로 번역된 글을 직접 읽으면서 그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자료

1, 자료2 

참조).

우선 「민단」 대표인 전태경 단장의 인사말 중 주요 부분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조국이 국권을 찬탈당한 비통의 시대에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개개

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 남명(

南冥)의 땅에 강제로 끌려와 모든 차별, 학대, 고난을 

당한 끝에 조국의 광복(해방독립)을 보지 못하고 원통하게 목숨을 잃은 무수한 영혼들

이여! 분명 분하고 원통하시겠지요. 

30만여명에 달하는 우리 동포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전후 

5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0만여명이 어디에서 어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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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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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게 희생되었는지에 대해 연행해간 일본 당국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오늘 평화

의 주춧돌 제막식전은) 일본 정부당국의 무성의함과 책임감 결여를 전 세계에 속속들이 

드러낸 것입니다.”, “평화 이념의 발신지가 되기 위해 전후 

50년을 맞아 진행한 사업 중 

하나로 평화의 주춧돌이 오늘 제막되어 평화의 등불이 켜집니다만”, “이름도 희생된 곳

도 판명되지 않은 영혼들이시여! 부디 불의의 침략과 전쟁을 꾀하는 자들을 깨어나게 

하시고 세계 평화와 화해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부디 오랜 한과 고통을 망각의 저

편으로 밀어놓고 영원히 영혼이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조총련」 대표인 김수섭 위원장의 인사말 중 주요 부분이다.

“조선 해방 

50주년을 맞은 의의 있는 해에 여기 오키나와에서 「평화의 주춧돌」 제막

식이 엄숙하게 거행되는 자리에서 저는 조선인민의 이름으로 모든 희생자의 명복을 빌

며 평화에 대한 다짐을 새롭게 맹세합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와 무모한 

전쟁에 의해 오키나와에 강제 연행된 조선인 동포는 「종군위안부」를 포함해 수천명이 

그 귀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희생자 가운데 이름이 새겨진 것은 겨우 

133명

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머나먼 이국땅에 묻혀 있습

니다. 저는 이러한 참극을 생각할 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만행에 

또다시 분노하고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실현에 대한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집니다. 우리는 여기 오키나와에 있는 「평화의 주춧돌」

이 일본의 과거사 청산으로 이어져 조선과 일본의 선린외교를 구축하고 세계의 항구적 

평화의 길로 강하고 굵게 이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두 사람의 인사말은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희생자의 억울함을 대변하고 있다. 그

러나 마지막에는 「화해」, 「선린외교」를 키워드로 내세워 미래로 나아가며 세계평화를 구

축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평화의 주춧돌」이 적과 아군, 가해자와 피해자를 넘어 「대화

의 장」이 된 최초의 연설이 이루어진 가치 있는 말로 역사에 새겨졌다.

에필로그 - 「생명은 보물」을 형상화한 「평화의 주춧돌」

오키나와 주민이 「평화의 주춧돌」을 창설하고자 한 것은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

는」 만큼의 지옥으로 변한 격전장 속에서 

3개월 남짓의 시간동안 기적의 연속으로 간신

히 살아남은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일삼은 사람이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게 하지 않고 전쟁에 참가하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과거에 대량 살

육이 일어난 전장을 전사자와 전쟁사망자의 유골과 함께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오키

나와 전투를 예로 들면 

20만여명의 전사자 및 전쟁사망자를 그대로 남겨두어 전장의 광

경을 풍화시키지 않으면 거기에서 두 번 다시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타나

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전장의 광경을 앞에 두고서는 어떠한 정의로운 전쟁론자도 전

쟁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군사력 행사」를 용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

을 구체화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을 대신할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전쟁으로 사망한 구체적인 개인의 존재를 나타내는 이름을 한곳

에 새기면 적어도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의 추상적인 숫자가 더욱 구체적인 인간으로 보

이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개개인의 상상력, 감성과 이상의 문제가 된다. 사람에 따라

서는 그 이름이 전장에 겹겹이 쌓인 시체, 유골로 보일 것이다. 그렇기에 「평화의 주춧

돌」이 발신하는 메시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과 분쟁을 부정하는 보편성, 사

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의 사실을 철저히 기록함에 따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가 소중하다는 

인류에게 보편적인 「평화의 마음」, 「평화를 희망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일 

것이다. 처음에는 명확히 확립된 생각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것에서

부터 출발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또 유구 오키나와의 전통적 평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생명은 보물」이라는  「평화의 주춧돌」이 근저에 있었기에 모든 전쟁사망자의 이름

을 새긴다는 발상이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평화의 주춧돌」이라는 각명판군(비석)은 「생명은 보물」이라는 평화사상을 구

체적인 형태로 나타낸 것이라는 점이 제막 후 평화의 주춧돌을 만든 많은 사람들의 공

통된 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현재 「생명은 보물의 정신을 계승해 평화의 주춧돌

을 창설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실행위원회가 결성되어 그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이는 현재 필사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고 있는 「홍콩시민에

게 노벨상을」 이라는 움직임과 공통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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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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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 참고문헌 】

•  이시하라 마사이에 「전쟁사망자 각명비 『평화의 주춧돌』이 의미하는 것」(계간 「전쟁책임연구」 제8

호 1995년 여름호)

•  이시하라 마사이에/아라가키 나오코 「전쟁사망자 각명비 『평화의 주춧돌』의 기능과 역할」(「남도문

화」 오키나와국제대학 남도문화연구소 기요 제18호 1996년 3월)

•  이시하라 마사이에 「전쟁사망자 각명비 『평화의 주춧돌』의 본래 위치와 변질화 움직임」(다나카 노

부마사 편 「국립 추도시설을 생각하다ー『국가를 위한 죽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기노하나샤 
2003년).

【 첨부파일 1 】

【 첨부파일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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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대학살 기념 시설과 

사학연구 및 국가공식제례

주성산(朱成山) 교수
(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南京大屠杀纪念性设施的设立、
史学研究及其国家公祭

朱成山
(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발표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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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朱成山,男,1954年7月生,江苏南京人,中兯党员,教授。曾任中兯江苏省
委外宣办副主任、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纨念馆馆长,现任常州大学马兊思主
义学院名誉院长、近代史不红色文化研究院院长、中国抗日战争史学会副会长、中国
博物馆协会陈列艺术与委会副会长、 中国作家协会会员、江苏省近代史学会副会长、
南京社会科学院国际和平研究所所长、南京师范大学和扬州大学特聘硕士研究生导师、
上海师范大学等12所高校兼职教授、江苏省333人才、国家文物局和江苏省、山东省、
辽宁省、广东省、四川省、重庆市与家库与家。 
 

       20多年来,他潜心研究和平学、中日兰系史、日军侵华史特别是南京大屠杀史、博物馆学及展陈艺术,先后独著、合著、
主编《为300000冤魂呐喊——朱成山研究南京大屠杀史文集》《为未来讴歌——朱成山研究和平学文集》《文化无域——朱成
山散文集》《第21次是国家公祭》等190部书籍,在《人民日报》《光明日报》等报刊上发表了400多篇各类文章,在《求是》
《中国近代史》《抗日战争史研究》等核心期刊上发表40多篇论文。 
        
        主持《微观史视域下癿南京大屠杀研究》《和平文化研究》等10多项国家、省(部)级研究项目,幵先后在美国、德国、
俄罗斯、波兮、日本等近20个国家和地区,参不国际学术研讨、演讲不和平交流活劢。  
 
        获得 “全国道德模范提名奖”、 “全国爱国主义教育示范基地先进巟作者”、“全国红色旅游先进个人”、“全国社区志
愿者先进个人”、“全国五一劳劢奖章获得者”、“江苏省爱岗敬业先进个人”、“江苏中华文化名人”、“南京文化名人”、
“南京好市民”等一系列荣誉。 
 
 
         

朱成山教授 简介 

발표문 - 3

战争牺牲者缅怀设施的国际比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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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怎样定性定位定义南京大屠杀? 

内 容 

杀  30多万人惨遭杀害 

其中平民20多万人 
中国被俘军人10多万人 

烧  南京城有三分之一

癿建筑倍毁坏 

淫  在南京沦陷最初癿

一个月内,发生了

超过事万起癿强奸

轮奸亊件 

掠  无数公私财物遭日

军抢劫,这个数字

永远无法统计 

▲日本报纸有兰日军杀人竞赛癿报道 

▲被日军炮火击毁癿中山门城墙 

    

十六

岁癿

南京

少女

遭日

军轮

奸后

痛丌

欲生 

    

被日

军飞

机炸

毁癿

图书

室 

怎样定性定位定义南京大屠杀? 

时 间 

性  质 

 

▲长江边遭日军屠杀癿南京大屠杀遇难者尸体 

定位 

   中国近代史上抗日战争阶段发生的一个震惊中外、惨绝人寰的特大惨案 

是ᷯ

   日军侵华战争期间一例最集中、最突出、最有代表性的暴行 

是ᷯ

   战后经过两个军事法庭(远东国际军事法庭和南京审判战犯军事法庭)判定的 

   二战史上一桩典型案例 

是ᷯ

   国家贫弱人民遭殃的一段刻骨铭心的国耻和苦难记忆 

是ᷯ

   中华民族裸露出的,并值得子孙后代永久记取遭受外敌侵略和奴役的一道历史 

,伤痕 

是ᷯ

   一本对内进行爱国主义教育和对外进行国际和平交流的教科书 

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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战争牺牲者缅怀设施的国际比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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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第三阶段     

2005年12月13日,纨念馆三期扩建巟程正式奠基,至2007年12月13日新

馆如期建成开放,扩建后癿总面积是原馆癿3倍多,达到111亩,总建筑面

积扩大10倍,达到25000平斱米,展陈面积达到12000平斱米,是原来癿

15倍。 

  新世纨十年间 

“南京纨念馆”两次大规模再扩建 

▲纨念馆入口雕塑群 

▲和平广场 

第事阶段     

1994年至1995年,纨念馆进行首次扩建改造。事期巟程癿主要项目有,标

志碑、和平大钟钟架、《古城癿灾难》雕塑、遇难者名单墙、铜板路等。 

 事十世纨九十年代 

“南京纨念馆”扩建 

 

▲中国巟程院院士、东南大学建筑研

究所所长齐庩教授设计癿标志碑 

    

《古

城癿

灾难》

大型

组合

雕塑 

    

架 

    ▲南京大屠杀遇难者名单墙 

第一阶段     

事十世纨八十年代日本教科书亊件,促使中国建成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

难同胞纨念馆(下简称“纨念馆”)和侵华日军南京大屠杀草鞋峡遇难同

胞纨念碑等一批纨念性设斲。 

事十世纨八十年代 

南京城市癿“建馆立碑编史” 

 

▲1985年8月15日,南京人民政府二

建成幵开放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

同胞纨念馆。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

难同胞纨念馆,座落在中国南京江东

门街418号。纨念馆建立在南京大屠

杀江东门集体屠杀场地及“万人坑”

遗址之上。 

    侵华

日军南

京大屠

杀中山

码头遇

难同胞

纨念碑 

    侵华

日军南

京大屠

杀草鞋

峡遇难

同胞纨

念碑 

    

碑 

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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贰 

“南京纨念馆”接待国外领导人 

侵华日军南京大屠杀

遇难同胞纨念馆 

为卡特总统及夫人讲

解 

2012年 

12月15日 

日本前首相鸠山由纨夫

访纨念馆低首默哀 

2013年 

1月17日 

接待丹麦女王玛格丽特事世陛下

一行 

2014年 

4月27日 

接待日本前内阁总

理村山富市先生 

1998年 

5月24日 

 

接待日本前首相海

部俊树一行 

2001年 

8月19日 

“南京纨念馆”多次接待国家领导人 

朱成山向中兯中央总书记、国家主席

习近平作汇报讲解 

中兯中央原总书记、国家原主席江泽

民同志到纨念馆参观幵题词“纨念中

国人民抗日战争胜利60周年” 

中兯中央原总书记、国家原主席胡锦

涛同志来纨念馆参观指导 

侵华日军南京大屠杀

遇难同胞纨念馆 

2014年 

12月13日 

2005年 
5月5日 

2004年 
5月4日 

第三阶段     

       2013年12月31日,南京市人民政府决定在纨念馆北侧新征土地48亩,不现有场馆连成一

片,成为新癿扩容巟程(四期巟程),在已有癿“历史”不“和平”两大主题基础上,再新增

“顺利”癿主题内容。 
      不此同时,2015年12月1日,由纨念馆负责筹建和改造癿中国第一座以“慰安妇”为主题癿

博物馆——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正式开馆,成为纨念馆所管辖癿一座分馆。 
 
 

  新世纨十年间 

“南京纨念馆”两次大规模再扩建 

▲“人民必胜、正义必胜、和平必胜”展馆外围 

    南

京利

济巷

慰安

所旧

址陈

列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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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阶段    事十一世纨以来 

南京大屠杀史学研究成为热点问题,引进学界高度癿重

视,各种研究成果呈管涌式癿出现。 

▲ 2005年6月9日,酝酿三年癿

《东亚三国癿近现代史》中文版

终二出版,仅仅10天之后,该书已印

刷5次,发行量超过10万册。这是

中日韩三国癿百位历史学家和教

师合作癿成果。 

▲2015年10月10日,南京大屠杀档案

成功申报“中国记忆遗产”和联合国教

科文组织癿“世界记忆遗产项目”。图

为朱成山在阿联酋阿布扎比申遗现场。 

▲2014年12月13日,国家公祭仪式在侵华

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纨念馆丼行。习

近平主席亲自出席仪式。根据国务院批复,

自2014年起,每年12月13日在南京大屠杀

死难者国家公祭仪式主会场下半旗。 

第三阶段   事十世纨九十年代 

▲20世纨30年代,明妮·魏特琳女士担

任金陵女子文理学院院长和教育系主任,

身后留下了一部日记,其中详细记载了

她亲身经历癿侵华日军南京大屠杀癿罪

行,以及此后数年间日军在南京实斲殖

民统治癿情况。  

 ▲夏淑琴,女,南京大屠杀癿亲历者和

并存者。1937年12月13日,夏全家祖

孙9口人中7人惨遭日军杀害,时年8岁

癿夏淑琴在身中3刀后,因昏死过去并克

二难。 

 ▲1998年4月30日,侵华日军南京

大屠杀遇难同胞纨念馆癿职巟在整理

草坪时,挖出四具排列密集癿遗骨骨

架。南京有兰部门立即组织了“南京

大屠杀江东门遇难同胞遗骨埋葬地考

古发掘队”,经过2年癿发掘,在这

块只有40平斱米癿坡地上,发掘出

208具死者遗骨。 

南京开始成立南京大屠杀与门性癿学术研究组织,二1997年在南京

状元楼召开建国后首次南京大屠杀国际学术研讨会,呈现出学术性研

究癿特点,一批南京大屠杀癿研究成果公开出版。 

第事阶段   事十世纨八十年代 

日本教科书亊件引发对南京大屠杀史学研究癿论争,

中日两国开始对南京大屠杀进行有组织癿研究,收集

和公布了一些史料,出版了一些与著。 

高共祖教授担任了“南

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

会”负责人,组织南京

地区癿部分与家、学者

收集史料,先后编辑出

版了这些书籍。 

▲庨审现场留下癿珍贵照片。中间为倪征

,巠边为向哲浚。 

第一阶段    建国初期~70年代 

▲南京大屠杀并存者李秀英。建国后,

李秀英、王芝如(夏淑琴癿舅母)等南

京大屠杀并存者和受害者遗属,曾经在

一些群众集会上以“忆苦思甜”癿斱式,

控诉过日军南京大屠杀癿暴行,新华日

报等媒体也作过相应癿报道。 

     南京大

学历史系高

共祖教授,

带领一个日

本史小组开

始研究南京

大屠杀历史,

二1962年

写成《日本

帝国主义在

南京癿大屠

杀》内部版

教材 

国内外部分与家学者开始兰注南京大屠杀史癿研究,撰

写了一些论文,呈现出个体癿、自发癿研究特点。 

     1971

年,日本

朝日新闻

记者本多

胜一访问

中国,撰

写幵出版

了《中国

之旅》癿

书籍,引

发了中国

学者癿兰

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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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国家公祭带来了对南京大屠杀历史认知癿兯识 

纨念“中日和平友好条约”缔结40周年 

2018年度江苏省重大题材文学作品创作巟程图书 

  

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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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次 

战后“两个法庨”法律

审判和判定 

第事次 

上世纨八十年代癿“建

馆、立碑、编史”对南

京大屠杀史实癿记忆予

以俅存、展示和传承 

第三次 

设立“南京大屠杀死难

者国家公祭日”以来,

以“国家癿名义,法律

癿决定”对南京大屠杀

史实再次固化 

(事) 国家公祭带来了南京大屠杀癿史实进一步固化 

(事)国家公祭带来了南京大屠杀癿史实进一步固化 

国家国祭带来了对南京大屠杀历史认知癿兯识 

 

(一) 

在南京大屠杀死难对象的称谓上形成共识。 

在南京大屠杀“死难者”的称谓上形成了共识。  

南京大屠杀死难人数30多万形成了共识。  

4  在国家公祭的对象上形成

了共识。  

 

▲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者同胞纨念馆和平广场

夜景 

5  对南京大屠杀历史“6

个最”定论形成了共识。 

 

 

国家国祭带来了对南京大屠杀历史认知癿兯识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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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构建和平之舟 
B. 建设和平公园 
C. 塑造和平女神像 
D. 放飞白色和平鸽 
E. 种植“紫金草花园” 
F. 种植丹麦“辛徳贝格玫瑰” 
G. 成立“和平鸽艺术团” 
H. 成立“和平学校” 
I. 成立“南京国际和平研究所” 
J. 编辑出版和平书籍和杂志 
K. 丼办“国际和平论坛” 

3.遇难同胞纨念馆建设不发展过程中秉持癿和

平理念及其做法 

放飞和平鸽 

丼办“世界和平法会” 

丼办“和平烛光祭” 

撞响和平大钟 

丼办中日韩三国学者 

“历史认知不东亚和平论坛” 

1.20次江苏省暨南京市地斱性公祭过程中, 

单一性历史纨念主题到“历史不和平”双主题癿确立。 

 

2.国家公祭仪式中俅留癿“地斱公祭”癿活劢项目。 

 

(四)国家公祭带来了和平主题癿进一步拓展 

(三)国家公祭带来了人民主体地位癿进一步彰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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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公祭癿规格由地斱规格提升到国家规格,由城

之祭上升到国之祭,除北京城外在国内具有唯
一性。 

2. 迄今为止,已丼办5次国家公祭。习近平作为

党、国家和军队癿最高领导人,两次亲自带队
参加国家公祭活劢。 

3. 国家公祭仪式感强,5次都是国家仪仗队和国

家军乐团来现场参不。 

4. 以国家名义广泛邀请海内外和平友好人士参不

国家公祭仪式,扩大在海内外癿影响力。 

(五) 国家公祭给江苏省暨南京带来了海内外影响力

癿进一步提升 

(五)国家公祭给江苏省暨南京带来了海内外影响力

癿进一步提升 

▲2017年9月19日,南京成为第169座“国际和平城市”

(中国首个) 

 

▲南京国际和平日活劢 

 

4.国家公祭是对国际和平癿再促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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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京大屠杀纪念性设施的设立、

史学研究及其国家公祭

/

朱成山

(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在中国人的历史认知上,“南京大屠杀”一词的意义,大体可以用6个“是”来解

读:南京大屠杀是中国近代史上抗日战争阶段发生的一个震惊中外、惨绝人寰的特
大惨案;是日军侵华战争期间一例最集中、最突出、最有代表性的暴行;是战后经
过两个军事法庭(远东国际军事法庭和南京审判战犯军事法庭)判定的二战史上一
桩典型案例;是国家贫弱人民遭殃的一段刻骨铭心的国耻和苦难记忆;是中华民族
裸露出的并值得子孙后代永久记取遭受外敌侵略和奴役的一道历史伤痕;是一本对
内吉祥爱国主义教育和对外进行国际和平交流的教科书。

怎样定性定位定义南京大屠杀?根据战后“两个法庭”判决共有三个方面的要素:

一是时间要素,即1937年12月13日至1938年1月,一共有六个星期。同时是在日军
全面侵华战争和淞沪战争爆发后不久发生的。

二是可以用8个字来形容,即“惨绝人寰、震惊中外”,也可以说是违反国际法的

法西斯暴行。

三是内容要素有杀烧淫掠4个方面:杀即大屠杀,一共有30多万惨遭杀害,其中

平民20多万人,中国被俘军人10多万人;焚烧破坏,南京城有三分之一的建筑倍毁
坏;强奸轮奸妇女,在南京沦陷最初的一个月内,发生了超过二万起的强奸轮奸事
件;无数公私财物遭日军抢劫,这个数字永远无法统计。

㆒、南京大屠杀纪念性设施建立的三个阶段

(一) 二十世纪八十年代南京城市的“建馆立碑编史”。
二十世纪八十年代日本教科书事件,促使中国建成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

胞纪念馆(下简称“纪念馆”)和侵华日军南京大屠杀草鞋峡遇难同胞纪念碑等一批纪
念性设施
。南京市人民政府专门成立了“建馆立碑编史领导小组”,由南京市人民政
府原副秘书长张允然牵头,于1983年12月13日在南京城西郊的江东门开始筹建,
1985年8月15日建成开。同期建成草鞋峡、燕子矶、中山码头、五台山、北极阁等
10多处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碑等纪念性设施。纪念馆筹建涉及三个问
题。

第1, 建馆的起因是什么?不用讳言,1972年日本教科书事件是纪念馆建馆的直

接起因。日本文部省于1972年开始修订中学生历史教科书,把“侵略”中国改为“进
入中国”,激起了许多受害者的公愤,特别是曾经身受南京大屠杀之害的南京人
民,他们用各种不同的方式建言,要求把南京大屠杀血写的历史铭刻在南京的土地
上,南京市人民政府顺应了民众的呼声,纪念馆应运而生。

第2, 为什么要建在江东门?江东门是侵华日军南京大屠杀中集中大规模屠杀的地

点和南京大屠杀遇难者丛葬地遗址之一。据史料记载,1937年12月16日,侵华日军
将囚禁在陆军监狱内的一万多名中国被俘军人和平民百姓,从监狱内分批驱赶至东
至大士茶亭西至江东河边大约2500米的范围内,用轻重机枪集体射杀。死难者尸尸
大约曝尸一个月后,被南京慈善团体红卍字会于1938年一月至二月间,就近收埋于
两个水塘和一条壕沟内,老百姓口头称之为“万人坑”所在地。纪念馆正是建立在江
东门“万人坑”遗址之上的一座纪念性设施。

第3, 纪念馆在中国抗日战争类纪念性设施的地位。南京纪念馆是中国第一座抗

战类的纪念馆,它比沈阳九一八历史遗址上建成的九一八历史博物馆(简称九一八
馆),北京卢沟桥抗战遗址上建成的中国人民抗日战争纪念馆(简称抗战馆)都要
早,北京的“抗战馆”建成于1987年的7月7日,沈阳的九一八馆建成于1991年9月18
日。比其他的如上海淞沪抗战纪念馆、山东省台儿庄大战纪念馆等抗战类纪念馆更
早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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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二十世纪九十年代的“南京纪念馆”扩建。
1994年至1995年,纪念馆进行首次扩建改造。二期工程的主要项目有,标志

碑、和平大钟钟架、《古城的灾难》雕塑、遇难者名单墙、铜板路等。

纪念馆一期、二期建筑设计是由中国工程院院士、东南大学建筑研究所所长齐康

教授领衔设计的,他是带着一份感情来做好纪念馆建筑设计的。齐康教授的父亲齐
兆昌教授当年担任过金陵大学宿舍难民收容所所长,是南京国际安全区委员会拉贝
领导下的25个难民收容所之一,曾经救助过2万给个难民的生命。齐康院士曾经亲
口告诉我,在南京大屠杀期间,他的父亲为了保护难民,被日军用刺刀顶住胸口,
要不是南京国际安全区委员会秘书、美籍教授贝茨及时赶到呵斥退了日军,他的父
亲早被日军杀害了。

1. 标志碑是齐康教授的一个杰作,为此他几易其稿。一开始时,他想设计出一

根头部弯曲的浑身锈蚀的巨无霸大铁钉,将其永久地钉在南京的土地上,后来被他
自己否定了,他要设计出带有南京特色的标志碑来。后来,他把设计稿改成具有南
唐石刻风格的纪念碑,碑的上方是一双碑捆绑的中国人的手臂。有领导审查时不同
意,认为中国人解放这么多年了,怎么还把手臂给绑着?于是,齐教授反复修改,
最后设计出一个有着南京大屠杀历史元素的大十字架,上端刻着一排阿拉伯数字:
“1937.12.13——1938.1”,那是南京大屠杀历史事件发生的6周时间。为了有别于
十字架,他还别出心裁地在数字两端留出两个方形的洞孔,结果这个有点冒险的设
计方案竟然被通过了,连他自己也没有想到。

2. 和平大钟的钟架同样融入了南京大屠杀的历史元素。这是个独特的设计,三根

三棱柱代表“3”,上部5个圈代表5个“00000”,中间是一个倒下的“人”。用简洁的语
言,诠释出南京大屠杀遇难“300000”人的历史概念,并整体解我为“倒下的300000
人敲响的和平大钟”。值得提一句话,和平大钟是侨林伯耀、林同春等10多位日本
华侨捐款制作的。

3.《古城的灾难》大型组合雕塑的设计过程也不简单。它由“残破的城墙、残缺

的军刀、遇难者头颅及遇难者的手臂、历史的桥梁”等五大元素组合而成,其中“头
颅”和“手臂”是铜雕,由筹建设计无锡灵山大佛的著名雕塑家吴显宁设计制的。吴
显宁还同时设计制作了纪念馆内222块历史证人脚印和178块光铜板的铜板路,每一
块脚印铜板都是40厘米见方,6至8毫米的厚度,脚印中间刻有南京大屠杀幸存者、
见证的自己的签名和当时的年龄。路的开头两边,雕塑家按照1:1的比例塑造了南

京大屠杀幸存者倪翠萍和彭玉珍的铜像。

4. 南京大屠杀遇难者名单墙是二期工程的主体项目之一。它用灰白色的花岗岩垒

砌成厚厚的高墙,墙面上镌刻着10000多个南京大屠杀遇难者名字,呈直角L形分
布。该墙建成后,海内外媒体作了大量的报道,每年清明前后和12月13日,来自中
日韩等国的僧侣们都要和南京大屠杀遇难者遗属们一起,在“名单墙”前祈祷和平。

在此期间,江东门遇难同胞殉难处等10多处南京大屠杀遇难者丛葬地遗址被国务

院公布为全国文物保护单位等,带动了南京大屠杀史学研究工作的大规模开展,并
越发引起全世界的高度关注。

(三) 新世纪十年间“南京纪念馆”两次大规模再扩建
2005年12月13日,纪念馆三期扩建工程正式奠基,至2007年12月13日新馆如期

建成开放,扩建后的总面积是原馆的3倍多,达到111亩,总建筑面积扩大10倍,
达到25000平方米,展陈面积达到12000平方米,是原来的15倍。其中,外景展区
大规模扩容,突出了“场”的概念,由雕塑广场、集会广场、悼念广场、墓地广场、
祭奠广场、和平广场等7个室外展场组成,建筑面积达15000平方米。展陈突出了
纪念性、实证性、客观性,运用了大量的人证、物证、书证、影像资料、历史档
案和新的史料,还运用了新材料、新技术、新手段,大大增加了展厅的信息量。
该扩建工程获得“中国建筑工程鲁班奖”、建设部、教育部“优秀建筑工程设计一等
奖”“中国展陈艺术十大精品项目”等一系列荣誉,纪念以因此被评为中国首批“国家
一级博物馆”。

2013年12月31日,南京市人民政府决定在纪念馆北侧新征土地48亩,与现有场

馆连成一片,成为新的扩容工程(四期工程),在已有的“历史”与“和平”两大主题
基础上,再新增利胜利”的主题内容。1945年9月9日,盟军中国战区投降典再在南
京陆军军校礼堂举行,包括美、苏、英、法在内的47名盟军代表和部分中外记者,
见证再在南京举行的这利胜利后的受降仪式。经过两年时间的努力,至2017年12
月7日,纪念馆扩容的新展馆,以“人民必胜、正义必胜、和平必胜”为主题正式对
外开放,使得纪念馆总占地面积达到10.3万平方米,建筑面积5.7万平方米,展陈
面积达2万多平方米,成为一处展陈功能齐全、建筑形态特别、深受社会好评的教
育基地,每年接待中外观众大约900万人次。

与此同时,2015年12月1日,由纪念馆负责筹建和改造的中国第一座以“慰安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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为主题的博物馆——南京利济巷慰安所旧址陈列馆正式开馆,成为纪念馆所管辖的
一座分馆。该馆展出1600多件文物,680多幅照片、400多块图版,以“泪”为主线
串起整个展陈5个部分,以划刻画“慰安妇”受害者的历史。

二、南京大屠杀史学研究的四个阶段

纵观南京大屠杀70年史学研究的进程,由我国建国后相当长一段时期内不为人知

的“历史问题个案”,逐步发展到在全国乃至全世界很有影响力的“历史问题热点”;
由自发的、单个人的研究发展到有组织的系统的学术研究,取得了丰硕的成果;由
被国内学界一度忽视的“个别史”,逐步成为学界承认和重视的“显学”。期间大致可
分为四个阶段。

 第一个阶段:从建国初期到70年代,国内外部分专家学者开始关注南京大屠杀

史的研究,撰写了一些论文,呈现出个体的、自发的研究特点。建国后,李秀英、
王芝如(夏淑琴的舅母)等南京大屠杀幸存者和受害者遗属,曾经在一些群众集会
上以“忆苦思甜”的方式,控诉过日军南京大屠杀的暴行,新华日报等媒体也作过相
应的报道。国内率先进行南京大屠杀史学研究的是南京大学历史系高兴祖教授,他
带领一个日本史小组开始研究南京大屠杀历史,于1962年写成《日本帝国主义在
南京的大屠杀》内部版教材。该书有4万多字,揭露了侵华日军在南京的暴行,虽
然该教材的内容不够丰富,但启动了建国后对南京大屠杀历史的研究先例。1)1971
年,日本朝日新闻记者本多胜一访问中国,他沿着日军当年从上海杀向南京的路线
采访调查,在南京采访过潘开明、刘永兴、陈德贵等多位南京大屠杀幸存者,回到
日本后,撰写并出版了《中国之旅》的书籍,引发了中国学者的关注。2)

第二个阶段:二十世纪八十年代日本教科书事件引发对南京大屠杀史学研究的论

争,中日两国开始对南京大屠杀进行有组织的研究,收集和公布了一些史料,出版

1) 朱成山:“中国研究南京大屠杀史第一人——高兴祖教授与南京大屠杀史研究”,《日本侵华史研究》2010年

第4期。

2) (日)本多胜一著:朝日新闻社,1972版。

了一些专著。由南京大学高兴祖教授担任了“南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会”负责人,
组织南京地区的部分专家、学者收集史料,先后编辑出版了《侵华日军南京大屠杀
史料》3)《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稿》4)《侵华日军南京大屠杀暴行照片集》(内部
版)、《侵华日军南京大屠杀档案》5)。此外,南京电影制片厂还专门拍摄了《侵
华日军南京大屠杀》历史文献纪录片(中、英、日文版),供纪念馆为中外观众播
放。为了配合纪念馆的筹建,从1984年开始,用了5个多月的时间,对南京市所辖
的鼓楼、玄武、白下、秦淮、建邺、下关6个城区和雨花台、栖霞、大厂、浦口等4
个郊区,开展了建国后第一次南京大屠杀幸存者的普查工作,发现1756位南京大屠
杀幸存者。与此同时,组织访问了当年曾经参与远东国际军事法庭和中国南京审判
战犯军事法庭审判工作的重要历史证人。如远东国际军事法庭中国检察官向哲俊和
首席顾问倪征)、首席秘书裘劭恒、秘书兼翻译周锡卿、高文彬、张培基,中国法
官梅汝璈的秘书杨寿林等,杨提供了一本内有141张当年远东国际军事法庭审判实
况的照片册,为深入研究远东国际军事法庭提供了重要史料。1984年9月,南京派
专人去九江采访南京审判战犯军事法庭主审法官谷寿夫的叶再增大法官,详细了解
南京大屠杀审判的有关史料。

第三阶段:二十世纪九十年代南京开始成立南京大屠杀专门性的学术研究组织,

于1997年在南京状元楼召开建国后首次南京大屠杀国际学术研讨会,呈现出学术性
研究的特点,一批南京大屠杀的研究成果公开出版
。1995年8月,国内第一个南京
大屠杀学术性研究组织——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研究会在南京成立,高兴祖教授
担任首任会长。该学会挂靠在纪念馆内,由中国第二历史档案馆、江苏省档案馆、
南京市档案馆、南京大学、南京师范大学、复旦大学、上海师范大学、黑龙江省社
会科学院等一批专家学者成为第一批理事,并于1997年8月在南京状元楼酒店召开
建国后第一次较大规模的南京大屠杀史国际学术研讨会。随着东史郎日记案、李秀
英诉讼案、夏淑琴诉讼案、百人斩诉讼案等涉及南京大屠杀几个案件在中日两国法

3) 南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会编,江苏古籍出版社,1985年版,成为建国后公开出版的第一本南京大屠杀

史料书籍。

4) 南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会编,江苏古籍出版社,1987年版。
5) 中国第二历史档案馆、南京市档案馆、南京大屠杀史料编辑委员会编,江苏古籍出版社,1987年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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庭的较量,以及在德国、美国等海外相继发现罗森报告6)、费区日记7)、威尔逊日
记8)、魏特琳日记9)、拉贝日记10)、贝茨文献11)、广田弘毅电报12)、马吉摄影机及其
胶片等一些重要史料和物证,南京大屠杀“万人坑”的现场发掘和死难者遗骸的研究
考,、万名中日两国青年学生采访调查南京大屠杀幸存者的口述、,开展南京大屠
杀遇难者名录找寻统计等实证性研究工作,南京大屠杀相关研究成果日渐丰富。南
京大屠杀史料展在中日两国组织巡展,南京大屠杀幸存者与部分专家学者应邀赴日
本各地参与南京大屠杀证言活动。

第四阶段:二十一世纪以来南京大屠杀史学研究成为热点问题,引进学界高度

的重视,各种研究成果呈管涌式的出现。南京大学成立了以张宪文教授为主导的南
京大屠杀史研究所、南京师范大学成立了以张连红教授为负责人的南京大屠杀研究
中心、侵华日军南京大屠杀史研究会、中国第二历史档案馆、南京市档案馆等纷纷
组织南京大屠杀史学专门研究,出版了数百本南京大屠杀史研究专著,南京大屠杀
史学研究呈现出前所未有的高潮阶段。如张宪文教授等一大批专家学者在海内外广
泛收集史料,出版了72卷4000多万字的南京大屠杀书籍。再如,侵华日军南京大
屠杀史研究会与纪念馆合作,也编辑出版了各类南京大屠杀书籍100多本2000多万
字。“基于微观史学的南京大屠杀研究”等几个课题被确立为国家社会科学基金抗日
战争研究重大项目13),正在进行卓有成效地深入研究。组织南京大屠杀幸存者援助
协会,关注南京大屠杀幸存者和受害者群体,先后组织编撰发行《南京大屠杀史研

6) 1990 年在德国档案馆波茨坦分馆发现当年德国驻中国大使馆的罗森致德国政府的关于南京大屠杀的报告书。
7) 1991年在美国发行曾任国际安全区总干事费区有关南京大屠杀的日记于书信。
8) 1995年2月在南京鼓楼医院发现当年再该医院救护南京大屠杀幸存者李秀英等人的美国医生威尔逊有关南

京大屠杀的书信。

9) 1995年10月,在美国发现当年金陵女子文理学院难民收容所所长魏特琳有关南京大屠杀的日记及其部分

照片。

10) 1996年12月在德国发现、在美国纽约首次公布的南京国际安全区委员会主席拉贝有关南京大屠杀的日

记及其照片,下详述。

11) 1991年7月至1992年3月,华中师范大学原校长章开沅教授在美国耶鲁大学图书馆发现当年南京国际安

全区委员会秘书贝茨有关南京大屠杀的文献

12) 1994年,在美国华盛顿国家档案馆解密1938年1月17日日本外务省外务大臣广田弘毅有关南京大屠杀的

电报。

13) 国家社科基金抗日战争研究专项工程项目,批准号为16KZD016。

究》《日本侵华史研究》《日本侵华南京大屠杀史研究》杂志,组织“历史认知与
东亚和平论坛”并发起编撰和出版《东亚三国历史教科书》,组织南京大屠杀与国
际和平研究院、发起并推动国际和平学的研究及其相关活动的开展,纪念馆再次进
行两次大规模的扩建,南京大屠杀档案成功申报“中国记忆遗产”和联合国教科文组
织的“世界记忆遗产项目”,“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在全国人大常委会得到
法定和成功组织实施,特别是习近平总书记两次亲自出席国家公祭仪式,激励和推
动了南京大屠杀史学研究向更高水平发展。

三、国家公祭给南京城市带来了些什么

在这次2019南京书展上,江苏人民出版社推荐了我的两本新作《从城祭到国祭》

和《我的100位日本朋友》参展。恕我直言,在我独著、合著、主编并已经出版面
世的180多本书中,大部分是“写史论史”的书籍,而这两本书则是长篇纪实文学,
旨在用文学的手法,把我在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念馆工作20多年期间
的所见所闻、所思所想、所作所为表达出来,以飨读者。其中,《我的100位日本
朋友》这本书,既为了完成江苏省作家协会交给的“2018年度江苏省重大题材文学
作品创作工程图书”任务,也是为了纪念“中日和平友好条约”缔结40周年而作;而
《从城祭到国祭》这本书是我与李慧女士合著,也是对我俩业已出版的另一本长篇
纪实文学《第21次是国家公祭》作品(江苏人民出版社2014年12月版)的修改、
完善和再版。毋庸讳言,这两本书籍都是献给南京大屠杀死难者国公国祭日的。日
前,凝望着仍然散发着油墨书香味的新著,脑海里突然迸发出“国家公祭给江苏暨
南京带来了什么?”的思绪。

(一) 国家公祭带来了对南京大屠杀历史认知的共识
不可否认,国内也曾经有一些人或多或少地对南京大屠杀历史存在着不同的认

知。虽然这种模糊的历史认知,与日本右翼势力对南京大屠杀恶意否认和抹杀有本
质的不同,但也在一定程度上影响了对南京大屠杀历史的传播和应有的教育作用。
在全国人大常委会关于设立“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法案被通过后,特别是
习近平总书记亲自在南京参加首次国家公祭仪式并发表重要讲话后,国内关于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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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屠杀的历史认知很快形成了共识,主要体现在以下几个方面:

1. 在南京大屠杀死难对象的称谓上形成共识。多年来,在学界、在坊间、在传

媒上,对南京大屠杀死难对象的称谓常常出现不同的声音,主要有“遭难者”、“遇
难者”、“死难者”三种说法。其中,“遭难者”主要来源于日语,包括战争灾难和自
然灾难,具有一些不确定性;“遇难者”词性模糊,包括伤亡和其他方面的受难;而
“死难者”的提法更为准确,特指死亡者。虽然它与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纪
念馆馆名不一致,但馆名既已约定俗成,已经存在并连续使用了30多年,同时也允
许更为宽泛和包容一些,作为纪念性场馆的存在,它主要是纪念南京大屠杀死难同
胞,同时也纪念在那场灾难中受到各种伤害的幸存者、受害者。

2. 在南京大屠杀“死难者”的称谓上形成了共识。在过往的地方性悼念仪式上,曾

经一直沿用“悼念南京大屠杀遇难同胞”的提法,也有用“死难同胞”称谓的。“同胞”
一词,意味着同一国家同一民族的称谓。但每年公祭仪式上,都会邀请一些外国相
关人士来参加活动,让他们祭奠“遇难同胞”显然不对。现在改为“死难者”对内对外
都可以使用。

3. 南京大屠杀死难人数30多万形成共识。南京大屠杀死难人数30万还是30多

万?哪一种更符合史实?南京大屠杀死难人数的权威出处是1946年设立的南京审判
日本战犯军事法庭。该判决书以“本庭认为”的最终判定,5处提及“30多万人”、“30
余万人”,明确了30万死难者是约数,也是确数。所谓约数是指30多万人;所谓确
数是不低于30万人,或者说30万死难者是下限的数字。2014年2月27日,第十二届
全国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第七次会议,表决通过的“关于设立南京大屠杀死难
者国家公祭日的决定”中,以法律的形式再次明确“三十多万人惨遭杀戮”。 

4. 在国家公祭的对象上形成了共识。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的对象不仅仅是

南京大屠杀死难者,同时还包括所有在日本帝国主义侵华战争期间惨遭日本侵略者
杀戮的死难者。主要有1874年日本武力侵占台湾造成的死难者;1895年甲午战争期
间中国的死难者;1900年日本参与八国联军镇压并杀害义和团的死难者;1904年日
俄战争中的中国死难者;1931年日本侵占中国东三省后杀害的中国死难者;1937
年日本发动全面侵华战争期间杀害的中国死难者,其中包含化学战、毒气战、细菌
战、劳工、“慰安妇”(性暴力)、无差别轰炸等方面受害的死难者。

5. 对南京大屠杀历史“6个最”定论形成了共识。从南京大屠杀是二战史上特大惨

案的视角看,它是人类文明史上最残酷、最野蛮、最疯狂的一次灭绝人性的暴行;

再从中华民族受害史角度来看,它又是侵华日军在中国制造的无数暴行中最集中、
最突出、最有代表性的一例,其罪行铁证如山,国际社会早有定论。

(二) 国家公祭带来了对南京大屠杀史实的进一步固化
南京大屠杀发生80多年来,先后共有三次对南京大屠杀史实的固化。
第一次是战后“两个法庭”通过法律审判,对南京大屠杀史实进行了固化。其中对

南京大屠杀的时间、发生的地域范围、涵盖的内容、死难者对象、死难者人数给出
了判定。

第二次是上世纪八十年代通过“建馆、立碑、编史”进一步固化,对南京大屠杀史

实的记忆予以保存、展示和传承。   第三次通过设立“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
日”,以“国家的名义、法律的决定”,对南京大屠杀史实进一步固化。一是对南京
大屠杀基本史实进行了再次确认,认定“1937年12月13日,侵华日军在中国南京开
始对我同胞实施长达四十多天惨绝人寰的大屠杀,制造了震惊中外的南京大屠杀惨
案,三十多万人惨遭杀戮。二是对南京大屠杀历史再次进行了定性,认为“这是人
类文明史上灭绝人性的法西斯暴行,这一公然违反国际法的残暴行径,铁证如山,
国际社会早有定论。”三是对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的时间进行了确定,规
定“将12月13日设立为南京大屠杀国家公祭日,每年12月13日国家举行公祭活动。”

(三) 国家公祭带来了人民主体地位的进一步彰显
我曾经写过一篇文章,题目叫《不要轻视悲剧文化的力量》,大意是说南京大屠

杀虽然是一个历史悲剧,但悲剧也可以给人一种不甘屈辱的内心动力,一种拼搏向
上的力量,一种奋发有为的精神。法国思想家赫南说过:“在人们的共同记忆中,
灾难与伤痛比享乐或是光荣更为重要,也更有价值,因为它更能紧密地结合民众,
唤起患难与共的情感,进而使人民凝聚成为一个坚实的共同体”。南京大屠杀死难
者既不是军政领导人,也不是英雄模范,而且普普通通的民众。通过设立国家公祭
日,悼念死难同胞,体现出对民众生命价值的尊重,这在我国抗战胜利以来第一次
以法定的形式确立国家公祭,要求国家有关部门每年必须组织南京大屠杀死难者公
祭活动,以这种国家行为走进普通老百姓的内心深处,对战争受害者、幸存者及其
遗属精神上是莫大的抚慰,既体现出“国家尊重和保障人权”的宪法精神,又拉近了
个人与国家之间的精神距离,成为一项国家性的社会活动,有利于凝聚民众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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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心协力地建设中国特色社会主义强国。

(四) 国家公祭带来了和平主题的进一步拓展
1. 20次江苏省暨南京市地方性公祭过程中,单一性历史纪念主题到“历史与和平”

双主题的确立。和平是永恒的主题。但在工作实践中,如何将和平融合其中并非易
事。有一件事对我触动很大,成为我在遇难同胞纪念馆工作思路转变的分水岭。记
得是在2001年12月,我在美国旧金山圣玛丽诺大教堂参加和平祈祷仪式,为30多万
南京大屠杀死难者祈祷,为九一一遇难者祈祷,为世界和平祈祷。在这一段经历之
前的10年时间,我一直忙于为了历史鼓与呼;而之后,我更多地思考求证历史的根
本目的是为了和平与发展。在我的建议与呼吁下,从2002年开始,南京每年悼念遇
难同胞的仪式增添了和平的主题。此后,南京开展国际和平活动,犹如打开了闸门
一样,一波接着一波。

2. 遇难同胞纪念馆建设与发展过程中秉持的和平理念及其做法。纪念性场馆的

风格往往与陈列需要表达的主题相一致,使得参观者在参观的氛围中感触和接受环
境的教育。遇难同胞纪念馆展馆整体平面呈现出和平之舟的造型,展厅外立面是高
高翘起的船头,形状为“断刀”和“化剑为犁”。展区分为历史与和平两大区域,前半
段为历史,后半段为和平公园,每一个观众走进纪念馆,就走进了历史,但最终是
从和平的环境中走出。纪念馆还设立和平女神雕像、紫金草与辛德贝格玫瑰和平花
园、和平大钟、和平宣言墙和放飞和平鸽等一系列和平纪念性设施。

3. 国家公祭仪式中保留的“地方公祭”活动项目。国家公祭是在江苏省暨南京市20

年持续不断公祭的基础上接力举办的,它保留了地方性公祭的一些成功做法。如每
年一度的有中日韩三国僧侣参加的“世界和平法会”、撞响和平大钟、放飞和平鸽等
例行做法。

4. 国家公祭是对国际和平的再促进。恩格斯曾说过:“我们根本没想到要怀疑和

轻视‘历史的启示’,历史就是我们的一切。”和平主义的倡导者池田大作先生说过;
“没有比和平更珍贵的!没有比和平更幸福的,和平才是人类向前进的根本。”中国
设立南京大屠杀国家公祭日,在现实层面有助于我们与世界更好的沟通,维护世界
和平需要海内外更多有识之士的参加,如何构筑更加牢固的和平堤坝是一个突出的
时代课题。通过国家公祭的设立,必将唤醒越来越多的热爱和平人士的良知,塑造
正确的历史观,为实现持久的世界和平与安宁而努力。

(五) 国家公祭带来了江苏暨南京在海内外影响力的进一步提升
在2014年12月13日首次举办“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活动以来,已经成功

举办过5次,使江苏暨南京在海内外影响力的大大提升。可以从以下五个方面来估
价:

第㆒, 公祭的规格由地方性提升至国家规格,由城之祭提升至国之祭。从1994年

至2013年,江苏省暨南京市社会各界人士悼念南京大屠杀遇难同胞仪式。这种地方
性公祭仪式一共举办了20次。从2014年至2018年,一共举办了5次国家公祭仪式,
其中2014年和2017年,两次是以中共中央委员会、全国人大常委会、国务院、全
国政协、中央军委的名义举办,2015年、2016年和2018年,则是以中共中央委员
会、国务院的名义主办。其规格之高,政治性之强,并且连年举办,这在国内是前
所未有的,也是除北京之外的全国城市中是唯一的。

第㆓, 习近平作为党、国家和军队最高领导人,在5年中两次来南京,并亲自到现

场参加国家公祭仪式,体现了对国家公祭活动的高度重视,同时也增进了许许多多
干部群众的爱国情感。

第㆔, 国家公祭仪式感强,活动组织得好,赢得了很好的口碑。每年12月13日,

在侵华日军南京大屠杀遇难同胞京内设立的国家公祭现场,都要举办降国旗仪式。
国旗代表国家,此举体现了对死难者的国家致哀。在5次国家公祭仪式中,国家仪
仗队和国家军乐队,每次都会从北京专程来到南京参与,在仪式中承担奏国歌,敬
献花圈等项任务。

第㆕, 每年都以国家的名义广泛邀请海内外和平友好人士,如俄罗斯卫国战争纪

念馆、波兰奥斯维辛集中营国家博物馆等二战同类型博物馆馆长,约翰·拉贝、辛
德贝格等当年曾经救助南京难民生命的外国友人亲属等一批国际和平友好人士,来
南京参与国家公祭仪式,扩大了南京大屠杀历史文化在海内外的影响力。

2019年度下半年国际学术大会

战争牺牲者缅怀设施的国际比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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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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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주청산. 남. 1954년 7월생. 장쑤성 난징 출싞. 중국공산당원. 교수. 젂 중국공산당 장쑤성위원회 
대외홍보실 주임 및 난징대학살희생동포기념관 관장 역임. 현 창저우대학 마르크스사상학부 
명예학부장, 귺대사 및 홍색문화 연구원 원장, 중국핫일젂쟁사학회 부회장, 중국박물관협회 
젂시예술젂문위원회 부회장, 중국작가협회 회원, 장쑤성귺현대사학회 부회장, 난징사회과학원 
국제평화연구소 소장, 난징사범대학 및 양저우(Yangzhou, 揚州)대학 특별 초빙 석사연구생 
지도교수, 상하이사범대학 등 12개 대학 겸임교수. 장쑤성 333명의 인재. 국가문물국 및 장쑤성, 
산둥성, 랴오닝성(Liaoning, 遼寧省), 광둥성(Guangdong, 廣東省), 쓰촨성(Sichuan, 四川省), 
충칭시(Chongqing-city, 重慶市) 젂문가뱅크 젂문가. 

20여 년갂 평화, 중일관계사, 일본굮 침략사(특히 난징대학살 역사), 박물관학, 젂시예술학을 연구하였다. 저서, 공저, 편찪 서적은 《300000의 
억욳핚 영혼의 외침: 주청산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 문집》, 《미래를 위핚 노래: 주청산 평화학 연구 문집》, 《문화는 영역이 없다: 주청산 산문집》, 
《21번째 추모식은 국가 추모식》 등을 포함핬 190권이다. 《인민(Renmin, 人民)일보》, 《광명(Guangming, 光明)일보》 등 갂행물에 400여 편의 
글을 발표했다. 《구시(Qiushi, 求是)》, 《중국귺대사》, 《핫일젂쟁사 연구》 등 항심적인 논문 잡지에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미시적 역사를 기초로 핚 난징대학살 연구》, 《평화 문화 연구》 등 10여 건의 국가, 성省(부部) 차원의 연구 프로젝트를 짂행했다. 미국, 독일, 
러시아, 폴란드, 일본 등 약 20개 국가와 지역에서 열린 국제 학술 심포지엄, 강연, 평화 교류 활동에 참여했다.  
 
“젂국 도덕 모범 추천상”, “젂국 애국심 교육 시범기지 선도상”, “젂국 홍색 여행 선도상”, “젂국 지역 사회 지원자 선도상”, “젂국 5

ᆞ1 노동상”, 

“장쑤성 자기 직업 사랑 선도상”, “장쑤 중화 문화 명인”, “난징 문화 명인”, “난징 좋은 시민” 등을 수상했다. 

주청산 교수 소개 

중국 귺대 역사상 핫일젂쟁 단계에서 발생핚 세계를 놀라게 핚 젂대미문의 참상

 

YES 

일본굮의 침략 젂쟁 중에서 가장 집중적이었고, 가장 두드러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성격을 띠는 폭력 행위

 

YES 

종젂 후 2차례의 굮사재판(극동국제굮사재판, 난징젂범굮사재판)에서 판결을 받은 

제 2차 세계대젂의 젂형적인 사건

 

YES 

국가가 가난하고 약하여 국민이 입어야 했던, 반드시 기억핬야 핛 국가의 치욕이자 

고통스러욲 기억

 

YES 

중화민족이 자손 대대로 영원히 기억핬야 핛 외세의 침략이자 노예의 역사

 

YES 

대내적으로는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과서, 대외적으로는 국제 평화 교류를 상기시킬 

교과서

 

YES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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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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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난징대학살의 내용 정의 

내용 

살인 

30여만 명을 학살 
민갂인 20여만 명 
군인 포로 10여만 명 

방화 

난징 건축물의 
1/3이 소각, 파괴됨 

강갂 

난징이 침공당핚 지 
1개월 동안 2만여 
명의 부녀자가 강갂 
당함 

약탈 

무수핚 공공 재산과 
사유 재산 약탈. 
피해액 통계 불가능 

▲일본 싞문에 보도된 일본굮 100인 

참수 경쟁 

▲일본굮의 폭격을 맞아 파괴된 

중산먼(Zhongshanmen, 中山門) 
성벽 

16

 난징

 소녀가

 일본굮에게

 강갂

 

당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

 

일본굮

 비행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도서관

 

난징대학살 정의 

시갂 

성격 

 

▲창장(Changjiang, 長江) 강가에서 일본굮에게 

살핬된 난징대학살 희생자의 시싞 

내용 

첫 번째 단계    

1980년대 일본 교과서 사건으로 인핬 중국은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이하 „기념관‟이라 함) 및 난징대학살 차오셰샤 희생 동포 기념비 

등 여러 기념 시설을 설립하게 되었다. 

1980년대 난징시의 기념관, 

기념비 건립 및 역사서 편찬 

▲1985년 8월 15일 난징시인민정부는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은 중국 난징시 장둥먼가(街) 
418호에 소재핚다. 기념관을 
난징대학살 당시 집단 학살이 일어났던 
장둥먼 및 만인갱이 잇었던 위치에 
세욲 것이다. 

난징대학살

 중산마터우

 

희생

 동포

 기념비

 

난징대학살

 차오셰샤

 

희생

 동포

 기념비

 

난징대학살

 옌쯔지

 희생

 동포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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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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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세 번째 단계 

2005년 12월 13일에 기념관 3차 확장 공사의 추짂을 공식화하고, 2007년 

12월 13일에 싞관을 완공핬 개방했다. 확장 후 총 면적은 예젂의 3배 

이상으로 74000㎡에 달하며, 건축 면적은 10배로 25000㎡, 젂시 면적은 

12000㎡로 예젂의 15배에 이른다. 

2000년~2010년 난징기념관 

2차례 대규모 확장 공사 

▲기념관 입구의 조각상들 

▲평화의 광장 

두 번째 단계 

1994년~1995년에 기념관을 처음으로 확장 개조했다. 2차 공사의 주요 

핫목은 기념비, 평화의 종, 《고성의 재난》 조각상, 희생자 명단 벽, 동판길 

등의 축조였다. 

 1990년대 난징기념관 확장 

공사 

▲중국공정원 위원 겸 둥난대학 

건축연구소 소장 치캉 교수가 디자인핚 
기념비 

고성의

 재난

 대형

 

조각상

 

평화의

 종

 

    ▲난징대학살 희생자 명단 벽 

난징기념관을 방문핚 국가 지도자들 

주청산 교수가 시짂핑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국가주석에게 
설명하는 모습 

장쩌민(Jiang Zemin, 江澤民) 젂 중
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국
가주석이 기념관을 참관하고 “중국 
인민 핫일 젂쟁 승리 60주년 기념” 
연설을 했다 

후짂타오(Hu Jintao, 胡錦濤) 젂 중
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겸 국
가주석이 기념관을 방문핬 설명을 
듣고 잇다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 

2014년 

12월 13일 

2005년 

5월 5일 

2004년 

5월 4일 

세 번째 단계 

2013년 12월 31일 난징시인민정부는 기념관 북쪽에 32000㎡ 면적의 토지를 인수하여 기졲의 

기념관과 이어짂 새 확장 공사(4차 공사)를 추짂하기로 결정했다. „역사‟와 „평화„라는 기졲의 두 

가지 테마를 바탕으로 „승리„라는 주제를 새롭게 추가했다. 

또핚 2015년 12월 1일에 기념관은 중국 최초로 „위앆부‟를 주제로 하는 „난징 리지샹 위앆소 옛

터 젂시관„을 축조 및 개조했다. 이 젂시관은 기념관이 관핛하는 붂관 중 하나이다. 

2000년~2010년 난징기념관 

2차례 대규모 확장 공사 

▲“국민은 반드시 승리핚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핚다. 평화는 반드시 승리

핚다” 젂시관을 둘러싼 욳타리 

난징

 리지샹

 위앆소

 옛터

 젂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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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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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난징기념관을 방문핚 외국 지도자들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 

지미 카터 대통령과 
영부인 내방 

2012년 

12월 15일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鳩山
由紀夫

) 젂 수상이 기념관에

서 머리 숙여 애도하고 잇다 

2013년 

1월 17일 

덴마크 마르그레테 2세 여왕 방문 

2014년 

4월 27일 

일본 무라야마 토미이치(
村山富市

) 젂 내각총리 

접겫 

1998년 

5월 24일 

 

일본 가이후 도시키(海
部俊樹

) 젂 수상 접겫 

2001년 

8월 19일 

두 번째 단계   1980년대 

일본 교과서 사건으로 인핬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에 대핚 

논쟁이 시작되었다. 중일 양국은 난징대학살에 대핚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역사 자료들을 수집핬 발표했으며, 저서들을 

출판했다. 

가오싱쭈 교수가 이끄는 
“난징대학살 사료 편집 
위원회”는 난징 지역의 일부 
젂문가와 학자를 조직하여 
사료를 수집하고, 관렦 
서적들을 잆따라 출판했다. 

재판 현장을 찍은 사짂. 

가욲데가 니정, 왼쪽이 

샹저쥔이다. 

첫 번째 단계    건국 초기~1970년대 

▲난징대학살 생졲자 리슈있. 건국 후 리
슈있, 왕즈루(샤수친의 외숙모) 등의 난징
대학살 생졲자와 피핬자의 유족들은 난
징대학살을 규탄하는 공개 집회를 가짐
으로써 일본굮의 만행을 폭로했다. 싞화
일보 등 얶롞매체가 이 소식을 보도했다. 

가오싱쭈 
난징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일본사 연구팀과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에 착수했다. 
1962년에 《일본 
제국주의의 
난징에서의 
대학살》 국내용 
교재를 출판했다. 

국내외의 젂문가와 학자들이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에 관심을 기욳

이기 시작하고 논문들을 발표했다. 이 시기의 연구는 개인적이고 

자발적인 연구라는 특징이 잇다. 

1971년 일본 
아사히 싞문 
기자 혼다 
가츠이치는 
중국을 방문핚 
후 《중국 여행》
을 출판핬 중국 
학자의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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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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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네 번째 단계    2000년 이후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가 핪 이슈로 떠올라 학계의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다양핚 연구 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 2005년 6월 9일에 3년에 걸쳐 
집필핚 《동아시아 3개국의 귺현대사》 
중국어판이 마침내 출판됐다. 불과 
10일 후에 이 책은 5판을 인쇄하여 
10만 권을 발행했다. 이는 핚중일 
3국의 100명의 역사학자와 교사들이 
함께 이뤄낸 성과였다. 

▲2015년 10월 10일 난징대학살 
기록보관소가 “중국 기록 유산”과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주청산 
교수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유산 
친청을 하는 모습 

▲2014년 12월 13일 국가 추모식 행사가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에서 거행됐다. 
시짂핑 국가주석이 참석했다. 국무원의 비준을 
받아 2014년부터 매년 12월 13일에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식 행사장에 조기(弔旗)를 단다. 

세 번째 단계   1990년대 

▲1930년대의 미니 보트린. 
짂링여자문과대학 학장 및 교육학과 
주임을 맟았다. 그녀가 남긴 일기에 
그녀가 직접 겪은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굮의 만행과 그 이후의 수년 동앆 
일본굮이 난징을 식민 통치했던 상황이 
상세하게 담겨잇다. 

 ▲샤수친. 여. 난징대학살의 산증인이자 
생졲자. 1937년 12월 13일 샤수친의 가족 
9명 중 7명이 일본굮에게 살핬당했다. 
당시 8살이었던 샤수친은 몸에 칼을 세 
번이나 맞고 혼젃했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1998년 4월 30일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의 직원이 잒디밭을 
정리하다가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4구의 유핬를 발굴했다. 난징시의 관렦 
부처는 즉시 “난징대학살 장둥먼 희생 
동포 유골 매장지 고고학 발굴팀”을 
조직하여 2년 동앆 발굴 작업을 벌였다. 
불과 40㎡의 비탈에서 무려 208구의 
사망자 유골이 나왔다. 

난징시는 난징대학살 젂문 학술 연구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 난징좡위앆러우 호텔에서 건국 후 첫 난징대학살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 시기의 연구는 학술 성격의 특징이 

잇으며, 난징대학살에 대핚 연구 성과를 공개적으로 출판했다. 

“중일 평화 우호 조약“ 체결 40주년 기념 

2018년도 장쑤성의 중대핚 주제의 문학 작품 창작 프로젝트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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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인식을 하나로 모았다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인식을 

하나로 모았다 

) 

난징대학살 피해자 대상에 대핚 호칭이 통일되었다 

난징대학살의 피해자에 대해 ‘사망자‘라는 
호칭을 쓰기로 의견을 모았다 

난징대학살 사망자 수가 30여만 
명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4  국가 추모식의 대상을 통일했다 

▲난징대학살 희생자 동포 기념관의 평화의 광장 야경 

5  난징대학살의 역사가 

시사하는 의미를 6가지로 
정의했다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인식을 

하나로 모았다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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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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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첫 번째 

종젂 후 2차례의 재판에서 
난징대학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법률에 
의거핬 판결하였다 

두 번째 

1980년대의 기념관과 
기념비의 건립 및 역사서 
편찪을 통핬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여 
보졲, 젂시, 계승했다 

세 번째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을 제정핚 이후 
국가의 이름으로 그리고 
법률에 의하여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재차 공고히 했다 

) 

국가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다 

()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다 

() 국가 추모식은 평화의 주제를 더욱 확대했다 

() 국가 추모식은 국민이 주체가 된다는 국민의 지위를 잘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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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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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A. 평화의 배 
B. 평화의 공원 
C. 평화의 여싞상  
D. 평화의 흰 비둘기 날리기 
E. “소래풀 정원” 
F. 덴마크 “싞드버그 장미” 심기 
G. “평화의 비둘기 예술단” 
H. “평화의 학교” 
I.

“난징국제평화연구소” 

J.

평화 관렦 서적과 잡지 출판 

K. “국제 평화 포럼” 

3. 희생 동포 기념관의 건설 및 발젂 과정에서 

평화의 이념과 구현을 겫지하였다 

평화의 비둘기 날리기 

“세계 평화 법회” 거행 

“평화 촛불 추모식” 개최 

평화의 종 욳리기 

핚중일 3국의 학자들이 모여 

“역사 인식 및 동아시아 평화 

포럼“을 개최 

1. 20번째로 열린 장쑤성과 난징시의 지방 추모식에서 기졲에 

역사를 기념핚다는 하나의 주제에서 “역사와 평화”라는 2개의 

주제로 확대되었다. 

2. 국가 추모식에서도 지방 추모식의 명맥을 유지하고 잇다. 

() 국가 추모식은 장쑤성과 난징시의 국내외에 대핚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다 

▲2017년 9월 19일 난징은 169번째 “국제 평화 

도시”로 선정되었다(중국에서 최초로 선정된 도시) 

▲난징 국제 평화의 날 행사 

4. 국가 추모식은 국제 평화를 다시 촉짂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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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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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1. 추모식의 권위가 지방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승격되었다. 베이징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가 차원의 추모식을 
치르는 도시가 되었다. 

2. 현재까지 5차례의 국가 추모식을 거행했다. 

시짂핑은 공산당과 국가와 굮대의 최고 
영도자로서 5차례의 국가 추모식 중에서 
2차례나 참석하였다. 

3. 국가 추모식은 매우 의례적이다. 5번 모두 

국가의장대와 국가굮악대가 참석했다. 

4. 국가의 명의로 국내외의 평화적, 우호적 

인사들을 국가 추모식에 초대핚다. 국내외에 
대핚 영향력을 확대했다. 

) 

국가 추모식은 장쑤성과 난징시의 국내외에 

대핚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다 

남경대학살 기념 시설과 

사학연구 및 국가공식제례 

/

주성산(朱成山) 교수

(상주대학 근현대사와 홍색문화 연구원)

중국인이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난징대학살(

Nanjing Massacre, 南京大虐殺)”의 의

미는 크게 

6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난징대학살은 중국 근대 역사에서 발생

한 항일 전쟁으로서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둘째,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

한 기간 동안에 가장 집중적이고, 가장 두드러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성격의 폭력이었

습니다. 셋째, 종전 후 두 차례에 걸친 군사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및 난징전범군사재

판)에서 판결을 받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전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넷째, 국가가 가난하

고 약하여 국민이 입어야 했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국가의 치욕이자 고통스러운 기억

입니다. 다섯째, 중화민족이 자손 대대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외세의 침략이자 노예의 

역사입니다. 여섯째, 대내적으로는 애국심을 고취할 교과서이며 대외적으로는 국제 평

화 교류를 상기시킬 교과서입니다.

난징대학살의 성격을 어떻게 정의할까요? 종전 후 있었던 두 차례의 재판 판결에 근

거하면 세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시간적 요소입니다. 즉,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1월까지의 6주 동안 이어졌습니다. 또한 일본군의 중국 침공 및 
상하이 전투가 발발한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둘째는 전대미문의 참상이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국제법에 위배

되는 파시즘적 폭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내용적 요소입니다. 내용적 요소는 다음의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

째, 대학살: 총 

30여만 명이 참살을 당했습니다. 이들 중 20여만 명이 민간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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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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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만 명이 군인 포로였습니다. 둘째, 방화와 파괴: 난징 건축물의 1/3이 파괴됐습니
다. 셋째, 강간: 난징이 침략을 당한 지 

1개월 동안에 2만 명이 넘는 부녀자가 강간을 

당했습니다. 넷째, 무수한 공공 재산과 개인 재산의 약탈: 피해액을 통계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一 . 난징대학살 기념 시설 설립의 3 단계

(一) 1980년대 난징시의 기념관과 기념비 건립 및 역사 편찬 작업

1980

년대 일본의 교과서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이하 

‘기념관’이라 함) 및 ‘난징대학살 차오셰샤(Caoxiexia, 草鞋峽) 희생 동포 기념비’ 등 
여러 기념 시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난징시 인민정부는 ‘기념관과 기념비 축조 및 
역사 편찬팀’을 편성했으며, 장윈란(

Zhang Yunran, 張允然) 난징시인민정부 부비서장

의 주도 하에 난징시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 장둥먼(

Zhangdongmen, 江東門)에서 1983

년 

12월 13일에 착공에 들어갔으며, 1985년 8월 15일에 완공하여 차오셰샤, 옌쯔지

(

Yanziji, 燕子磯), 중산마터우(Zhongshanmatou, 中山碼頭), 우타이산(Wutaishan, 五

台山), 베이지거(Beijige, 北極閣)를 포함한 10여 곳의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비 등
의 기념 시설을 개방했습니다. 아래의 

3가지 내용이 기념관 건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첫째, 기념관을 건립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1972년에 있었

던 일본 교과서 사건이 기념관을 건립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습니다. 일본 문성부는 

1972년부터 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침략’을 중국 ‘진입’이
라는 단어로 수정하여 많은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난징대학살의 직

접적인 피해를 받았던 난징 시민들은 여러 방법으로 건의를 제출하여, 피로 쓴 난징대

학살의 역사를 난징의 토지에 새길 것을 촉구했습니다. 난징시인민정부는 민중의 소리

에 순응하여 기념관 건립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왜 장둥먼에 건립했을까요? 장둥먼은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이 집중된 곳이며, 

대규모의 살육이 일어난 장소이자 난징대학살의 희생자를 묻은 유적지 중 한 곳입니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1937년 12월 16일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육군감옥에 구금되어 

있던 

1만여 명의 군인 포로와 민간인을 나누어 동쪽으로는 다스차팅(Sashichating, 大士

茶亭), 그리고 서쪽으로는 장둥(Jiangdong, 江東)의 강가로 끌고가서 기관총으로 사살
했습니다. 사망자의 시신은 그로부터 대략 한 달 후에 발견되었으며, 난징의 자선단체

인 홍만자회(

紅卍字會)가 1938년 1월부터 2월까지 시신들을 수습하여 저수지 2곳과 참

호 

1곳에 매장했습니다. 국민들은 이 곳을 가리켜 ‘만인갱(萬人坑)’이라고 부릅니다. 기

념관은 바로 장둥먼 만인갱 유적지에 설립되었습니다.

셋째, 기념관은 중국 항일전쟁을 기념하는 시설입니다. 난징기념관은 중국 최초의 

항전 기념관으로서, 선양(

Shenyang, 沈陽)의 9·1 역사유적지에 건설한 ‘9·1 역사박물관’

(이하 ‘

9

·1관’이라 함)보다 이르고, 베이징(

Beijing, 北京)의 루거우챠오(Lugouqiao, 盧

溝橋) 항전 유적지에 건설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하 ‘항전관’이라 함)보다도 이
른데, 베이징의 항전관은 

1987년 7월 7일에 건립되었고, 선양의 9·1관은 1991년 9월 

18일에 세워졌습니다. 그 외에도 ‘상하이(Shanghai, 上海)쑹후(Songhu, 淞滬)항전기념
관’, ‘산둥성(

Shandong province, 山東省)타이얼좡(Tai’erzhuang, 臺兒庄)대전(大戰)

기념관’ 등 항전 성격의 기념관보다도 이릅니다.

(二) 1990년대의 ‘난징기념관’ 확장 건설

1994년부터 1995년까지 기념관의 첫 확장 건축을 진행했습니다. 2차 공사의 주요 

프로젝트는 기념비, 평화의 종, ‘고성(

古城)의 재난’이라는 제목의 조각상, 희생자 명단

을 새긴 벽, 동판(

銅板)을 깐 길을 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념관의 

1차 공사와 2차 공사의 건축 설계는 중국공정원(Chinese Academy of 

Engineering, 中國工程院) 위원 겸 둥난(Dongnan, 東南)대학 건축연구소 소장인 치캉
(

Qi Kang, 齊康) 교수가 한 것으로, 그는 추모하는 마음으로 기념관 건축을 설계했습니

다. 치캉 교수의 부친인 치자오창(

Qi Zhaochang, 齊兆昌) 교수는 당시 진링(Jinling, 金

陵)대학 기숙사 난민수용소의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진링대학 기숙사 난민수용소는 난
징국제안전구역위원회(

Nanjing International Safety Zone Memorial Hall, 南京國際安

全區委員會)의 욘 라베(John Rabe)가 이끌었던 25개 난민수용소 중 하나였으며, 여기서 
2만여 명의 난민을 구조한 바 있습니다. 치캉 위원이 제게 직접 하신 말씀에 의하면, 난
징대학살 기간에 그의 부친이 난민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도(

日本刀)가 가슴을 찔릴 뻔

했는데, 난징국제안전구역위원회 비서 겸 미국 국적의 교수 베이츠(

Bates)가 즉각 일본

군이 물러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의 부친은 그때 일본군에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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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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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념비는 치캉 교수의 걸작으로, 이 기념비의 디자인을 몇 번이나 수정했다고 합

니다. 처음에 그는 머리 부분이 휘어지고 몸체가 다 녹슨 거대한 쇠못을 디자인해서 난

징의 땅에 영원히 박아 두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디자인을 버리고 난징의 특색이 들어

있는 기념비를 디자인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디자인 초안을 남당석각(

Nantang Shike, 

南唐石刻) 스타일로 수정하고, 기념비 위쪽에 꽁꽁 묶인 중국인의 양팔을 설정했습니
다. 그러나 이 디자인은 정부 관계자의 심사에서 통과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중국인

이 해방된 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도 팔을 꽁꽁 묶고 있느냐는 것이었죠. 이에 치캉 교

수는 디자인을 여러 번 수정해서 최종적으로 난징대학살의 상징이 들어있는 거대한 십

자가로 결정했습니다. 기념비의 위쪽에 아라비아 숫자로 “

1937.12.13~1938.1”이라고 

새겼는데, 이는 난징대학살이 발생한 

6주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구별하기 

위해 그는 특별히 숫자의 양쪽 끝에 

2개의 정사각형 구멍을 뚫어 놨습니다. 다소 실험

적인 면이 있는 이런 디자인이 통과되어 본인도 의외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2. 평화의 종 역시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요소가 녹아 있습니다. 3개의 삼각 피라미드 

형태는 ‘

3’을 의미하고, 위쪽에 있는 5개의 링은 5개의 ‘00000’을 나타내며, 가운데 부분

은 쓰러진 ‘인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난징대학살의 희생

자 ‘

300,000’명의 숫자가 들어있으므로, ‘쓰러진 30만 명이 울리는 평화의 종’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종이 린보야오(

Lin Boyao, 林伯耀), 린퉁춘(Lin Tongchun, 林

同春) 등 10여 명의 일본 화교의 기부금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3. ‘고성의 재난’은 조각상을 조합하여 대형 조각상으로 디자인한 작품으로, 설계 과

정이 복잡했습니다. 파괴된 벽, 망가진 군도(

軍刀), 피해자의 머리, 피해자의 팔, 역사

의 다리의 다섯 가지 요소를 조합하여 완성한 것입니다. 머리와 팔은 구리로 만든 조각

품으로, 우시(

Wuxi, 無錫)에 있는 영산대불(Lingshan Buddha, 靈山大佛)을 설계하고 

건축한 유명 조각가 우셴닝(

Wu Xianning, 吳顯寧)이 디자인하고 제작했습니다. 우셴

닝은 기념관 내부에 역사적 증인의 발자국 

222개와 178개의 동판을 깔아서 동판의 길

을 설계 및 제작했습니다. 발자국이 찍힌 동판 

1장의 크기는 가로 세로 40cm의 정사각

형이고 두께는 

6~8mm이며, 난징대학살의 생존자와 산증인들이 자신의 발자국 가운

데에 서명하고 난징대학살 당시 자신의 나이를 새겼습니다. 길이 시작되는 양쪽에는 난

징대학살의 생존자 니추이핑(

Ni Cuiping, 倪翠萍)과 펑위전(Peng Yuzhen, 彭玉珍)의 

동상을 실물 크기로 세워 놓았습니다.

4.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명단은 2차 공사의 핵심 프로젝트 중 하나였습니다. 회백색

의 화강암으로 두껍고 높은 벽을 세운 후 벽면에 난징대학살의 피해자 

1만여 명의 이름

을 새겼습니다. 명단은 직각 

L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벽이 완공된 후 국내외 

언론들이 이에 관해 많은 보도를 했으며, 매년 칭밍제(

Qingmingjie, 淸明節) 전후와 12

월 

13일이 되면 중국, 일본, 한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온 승려들이 난징대학살 생

존자의 가족들과 함께 이 벽 앞에서 평화를 기원합니다.

이 

2차 공사 기간에 국무원은 장둥먼을 포함한 난징대학살의 피해자가 묻힌 장소 10

여 곳을 전국 문화 보호 구역으로 지정했으며, 이는 난징대학살에 관한 대규모의 역사 

연구로 이어졌고, 전 세계의 높은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三) 2000년~2010년 기간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난징기념관 확장 공사

2005

년 12월 13일에 기념관 3차 확장 공사의 추진을 공식화했으며, 2007년 12월 13

일에 신관을 완공하고 개방했습니다. 확장 공사를 마친 후 총 면적은 예전의 3배가 넘
고, 총 건축 면적은 10배 확대되어 25,000㎡에 달하며, 전시 면적은 12,000㎡로 예전
의 15배나 됩니다. 외부 전시장의 규모도 확장했으며, 조각광장, 집회광장, 애도광장, 
묘지광장, 추모광장, 평화광장 등 7개 야외 전시장으로 구성되고, 면적은 15,000㎡입
니다. 전시장은 기념의 성격, 실증의 성격, 객관성을 부각시켜 대량의 인적 증거, 물적 
증거, 서적, 영상 자료, 역사 기록, 새로운 사료(史料)를 전시했습니다. 또한 새로운 재
료, 신기술, 새로운 수단을 운용하여 전시하는 정보의 규모를 크게 늘렸습니다. 이 확
장 공사는 ‘중국 건축 공사 루반(Luban, 鲁班)상’을 받았고, 건설부와 교육부가 수여
하는 ‘우수 건축 공사 디자인 1등상’과 ‘중국 전시 예술 10대 우수상’ 등 여러 영예를 안
았습니다. 기념관은 이때부터 중국 최초의 ‘국가 1급 박물관’으로 지정되었습니다.

2013

년 12월 31일에 난징시인민정부는 기념관 북쪽에 32,000㎡ 면적의 토지를 새

로 인수하여 기존의 기념관과 이어진 새 확장 공사(4차 공사)를 추진하기로 결정했
습니다. ‘역사’와 ‘평화’라는 기존의 두 가지 테마를 바탕으로 ‘승리’라는 주제를 새롭
게 추가했습니다. 1945년 9월 9일에 연합군 중국 전투 지역 투항식이 난징육군군사학
교 강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47개국의 연합군과 
외국 기자들이 난징에서 거행된 이 승전 후 투항을 받아들이는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2017

년 12월 7일에는 확장된 새 기념관은 ‘국민은 반드시 승리한다. 정의는 반드시 승

리한다. 평화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제로 공식적으로 개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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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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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관은 총 면적 103,000㎡, 건축 면적 57,000㎡, 전시 면적 20,000㎡인 기능을 완전하
게 갖춘, 특별한 건축 양식의, 사회의 호평을 받는 교육 장소가 되었으며, 매년 약 9백
만 명의 내국인과 외국인이 이 곳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 최초로 ‘위안부’를 주제로 한 ‘난징 리지샹(Lijixiang, 利濟巷) 위안소 옛터 

전시관’을 2015년 12월 1일에 공식 개관했습니다. 이 전시관은 난징기념관이 축조 및 
개조했으며, 난징기념관의 분관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전시관에는 1600여 점의 
문물, 680여 장의 사진, 400여 장의 인쇄용 금속판이 전시되어 있으며, ‘눈물’을 주제로 
총 5개 파트로 엮은 ‘위안부’ 피해자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二 .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의 네 단계

난징대학살에 대한 역사 연구는 지난 70 년간 이어져 왔습니다 . 이 연구 과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 이하 ‘건국 이후’ 라 함 ) 상당히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문제가 전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연구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학술 연구로 발전해 왔으며 풍성한 성과도 얻었습니다 . 

중국 국내 학계에서 홀시했던 ‘개인의 역사’ 에 대해 학계가 점자 인정하고 또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 기간은 대략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첫 번째 단계: 건국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국내외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난징대학

살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논문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
의 연구는 개인적이고 자발적이라는 특징을 띱니다. 건국 후 리슈잉(Li Xiuying, 李秀
英)과 왕즈루[Wang Zhiru, 王芝如(샤수친(Xia Shuqin, 夏淑琴)의 외숙모)] 등 난징대
학살 생존자와 피해자의 가족은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규탄하는 대중 집회를 가졌으

며, 신화일보(

Xinhua Daily, 新華日報)도 이러한 내용을 보도한 바 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처음으로 난징대학살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난징대학 역사학과의 가오싱쭈(

Gao 

Xingzu, 高興祖) 교수였으며, 그는 일본역사팀을 꾸려서 난징대학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62년에 《일본 제국주의의 난징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국내용 교

재를 편찬했습니다. 이 책의 분량은 중국어 

4만여 자 정도로,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

른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비록 이 교재의 내용은 풍부하지 못하지만, 건국 이후 난징대

학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1) 

1971년에 일본 아사히 신문

의 기자 혼다 가츠이치(

本多勝一)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난징대학살 당시 일본

군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 취재와 조사를 벌였습니다. 난징에서 판카이밍(

Pan Kaiming, 

潘開明), 류융싱(Liu Yongxing, 劉永興), 천더구이(Chen Degui, 陳德貴) 등 난징대학
살 생존자들을 여럿 취재했으며,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 《중국 여행》이라는 책을 발표하

여 중국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2)

두 번째 단계: 

1980년대 일본 교과서 사건으로 인해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난징대학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역사 자료들을 수집해 발표했으며, 저서들을 출판했습니다. 난징대학의 가오싱쭈 교

수는 ‘난징대학살 사료 편찬 위원회’의 책임자로서 난징 지역의 전문가와 학자들을 조

직해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사료》

3),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사

고(

史稿)》4),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만행 사진집》(국내용 버전),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파일》

5)을 잇따라 출판했습니다. 그 외에도 난징영화사는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이라

는 제목의 역사 다큐멘터리(중국어, 영어, 일본어 버전)를 제작하여 기념관에서 대중에

게 상영했습니다. 기념관의 건설 계획을 돕기 위해 

1984년부터 5개월에 걸쳐 난징시

가 관할하는 구러우(

Gulou, 鼓樓), 쉬안우(Xuanwu, 玄武), 바이샤(Baixia, 白下), 친

화이(

Qinhuai, 秦淮), 젠예(Jianye, 建鄴), 샤관(Xiaguan, 下關) 등 6개 도시 및 위화

타이(

Yuhuatai, 雨花台), 치샤(Qixia, 棲霞), 다창(Dachang, 大廠), 푸커우(Pukou, 浦

口) 등 4곳의 교외 지역에서 건국 후 처음으로 난징대학살 생존자를 조사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1756명의 생존자가 집계되었습니다. 또한 극동국제군사재판과 난징전범

군사재판에 참석했던 역사의 증인을 방문했습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 중국검찰관 샹

저쥔(

Xiang Zhejun, 向哲俊), 수석 고문 니정(Ni Zheng, 倪征), 수석 비서 츄사오헝

1) 주청산저.“중국의난징대학살역사연구의창시자가오싱쭈(高興祖)교수와난징대학살연구”.《일본중국침략사

연구》2010년제4기.

2) [일본]혼다가츠이지저.아사히신문사.1972년.
3) 난징대학살사료편집위원회편찬.장쑤고서(古書)출판사.1985년판.건국후공개적으로출판한최초의난징대학

살역사자료서적.

4) 난징대학살사료편집위원회편찬.장쑤고서출판사.1987년판. 
5) 중국제2역사기록보관소,난징시기록보관소,난징대학살사료편집위원회편찬.장쑤고서출판사.1987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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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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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

Qiu Shaoheng, 裘劭恆), 비서 겸 통역 저우시칭(Zhou Xiqing, 周錫卿), 가오원빈(Gao 

Wenbin, 高文彬), 장페이지(Zhang Peiji, 張培基) 및 중국 법관 메이루아오(Mei Ru’
ao, 梅汝璈)의 비서 양서우린(Yang Shoulin, 楊壽林) 등을 방문했습니다. 양서우린은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실제 현장을 담은 

141장의 사진이 든 앨범을 제공했는데, 이는 극

동국제군사재판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 자료로 쓰였습니다. 

1984년 9

월에는 난징시에서 쥬장(

Jiujiang, 九江)으로 직원을 파견해 난징전범군사재판에서 다

니 히사오(

谷壽夫)를 판결했던 예짜이쩡(Ye Zaizeng, 葉再增) 대법관을 방문하여 난징

대학살 재판에 대한 상세한 역사 자료를 받았습니다.

세 번째 단계: 1990년대에 난징시는 난징대학살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 연구 조직을 

설립하기 시작했으며, 1997년에 난징좡위안러우(Nanjing Zhuangyuanlou, 南京狀
元樓

) 호텔에서 건국 후 최초의 난징대학살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학술 성격

의 연구의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난징대학살의 연구 성과를 대규모로 공개 출판했습
니다. 1995년 8월에 중국 최초의 난징대학살 학술 연구 조직인 ‘중국 침략 일본군 난징
대학살 역사 연구회’가 설립됐으며, 가오싱쭈 교수가 첫 회장직을 맡았습니다. 이 학회

는 기념관의 부설 기구로서 중국 제

2 역사 기록보관소, 장쑤성 기록보관소, 난징시 기

록보관소, 난징대학, 난징사범대학, 푸단(

Fudan, 復旦)대학, 상하이사범대학, 헤이룽

장성(

Heilongjiang province, 黑龍江省) 사회과학원 등 소속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1

기 이사직을 맡았으며, 

1997년 8월에 난징좡위안러우 호텔에서 건국 후 최초의, 그리

고 규모가 큰 난징대학살 역사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아즈마 시로(

東史

郎) 일기, 리슈잉(Li Xiuying, 李秀英) 소송, 샤수친(Xia Shuqin, 夏淑琴) 소송, 100인 
참수 경쟁 등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몇 가지 사건이 중일 양국의 법정에서 다뤄지고, 또

한 독일과 미국 등 외국에서도 게오르그 로젠(

George Rosen) 보고서6), 피치(Fitch) 일

6) 주중독일대사관의로젠이독일정부로보낸난징대학살에관한보고서를1990년에독일기록보관소의베이츠가

발견했다.

7), 윌슨(

Wilson) 일기8), 미니 보트린(Minnie Vautrin) 일기9), 라베 일기10), 짐 베이

츠(

Jim Bates) 문헌11),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전보12), 존 매기(John Magee)의 카메라와 

필름 등 중요한 역사 자료와 물증이 발견되었습니다. 난징대학살의 ‘만인갱’ 현장 발굴 

작업, 희생자 유골에 대한 연구 검증, 만 명의 중국과 일본의 청년과 학생이 취재 및 조

사한 난징대학살 생존자의 진술 자료, 난징대학살 희생자 명단의 조사와 통계 등 실증

적인 연구 작업을 진행하여 난징대학살과 관련된 연구 성과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

다. 난징대학살 역사 자료 전시회를 중일 양국에서 순회 전시의 형태로 개최했으며, 난

징대학살의 생존자 및 일부 전문가와 학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 각지에서 난징대학살 

증언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네 번째 단계: 2000년대에 들어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는 핫 이슈로 떠올랐으며, 학

계의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다양한 연구 성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난징대학은 
장셴원(

Zhang Xianwen, 張憲文) 교수가 이끄는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소를 설립하였

고, 난징사범대학은 장롄훙(

Zhang Lianhong, 張連紅) 교수가 책임을 맡은 난징대학살 

연구센터,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회, 중국 제

2 역사 기록보관소, 난징시 기록보관소 등

의 난징대학살 사학 전문 연구 기구를 잇따라 조직하여,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에 관한 

서적 수백 권을 출판하였습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역사 연구는 이 시기에 이례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장셴원 교수를 포함한 많은 전문가와 학자들이 국내외에서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난징대학살에 관한 서적 

72권을 출판했습니다. 또한 난징대학살 

역사 연구회는 기념관과 손잡고 

100여 권의 관련 저서를 출판했습니다. ‘미시적 역사학

을 기초로 한 난징대학살 연구’ 등을 비롯한 다양한 주제로 국가사회과학기금 항일전쟁 

7)  국제안전구역의총간사를역임했던피츠가쓴난징대학살에관한일기를1991년에미국에서발표하였다.
8)  난징대학살의생존자리슈잉등을구조했던미국인의사윌슨이난징대학살에관하여쓴서신을1995년2월에난

징구러우병원에서발견하였다.

9)  진링여자문과대학난민수용소소장보트린이쓴난징대학살에관한일기와사진을1995년10월에미국에서발

견하였다.

10) 난징국제안전구역위원회회장라베가쓴난징대학살에관한일기와사진을1996년12월에독일에서발견했으며,

미국에서처음발표하였다.

11) 난징국제안전구역위원회비서였던베이츠가쓴난징대학살에관한문헌을전화중(Huazhong,華中)사범대학학장

장카이위안(ZhangKaiyuan,章開沅)교수가미국예일대학도서관에서1991년7월~1992년3월에발견하였다.

12) 1994년에미국워싱턴국가기록보관소가1938년1월17일에일본외무성외무대신히로타고키가보낸난징대

학살에관한전보의비밀을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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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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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연구 중대 프로젝트

13)를 기획하여 현재 효과적이고도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

니다. 난징대학살 생존자협회를 조직하여 그 생존자와 피해자에 관심을 가지고 《난징

대학살 역사 연구》, 《일본의 중국 침략사 연구》, 《일본의 중국 침략 난징대학살 역사 연

구》 잡지를 잇따라 개간했습니다. ‘역사 인식과 동아시아 평화 포럼’을 조직하여 《동아

시아 

3개국 역사 교과서》를 편찬 및 출판했습니다. 난징대학살과 국제 평화 연구원을 

조직하고, 국제 평화에 대한 연구와 관련된 활동을 발기 및 추진했습니다. 기념관이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확장 공사를 하였고, 난징대학살 기록을 “중국 기록 유산” 및 유

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신청하여 등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이 법정 추모일로 지정되었

으며, 시진핑(

Xi Jinping, 習近平) 국가주석이 이 추모식 행사에 두 차례 방문하여 난징

대학살 역사 연구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것을 더욱 고무했습니다.

三 . 국가 추모식이 난징시에 무엇을 부여했을까요 ?

저의 

2권의 신작인 《도시 추모에서 국가 추모가 되기까지》와 《나의 100명의 일본인 

친구》를 이번 

2019 난징 도서전시회에 전시할 것을 장쑤인민출판사가 제게 제안했습니

다. 제 입으로 얘기하기 좀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집필했거나 다른 이와 공동 집필했거

나 혹은 편찬하여 출판한 책이 

180여 권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역사에 대해 쓰고 논한 

책들입니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2권의 책은 장편의 기록 문학입니다. 제가 지난 20여 

년간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의 업무를 보면서 보고 들은 것과 생각하고 쓴 것들

을 문학적인 기법으로 써 낸 것입니다. 《나의 

100명의 일본인 친구》는 장쑤성작가협회

가 제게 주었던 ‘

2018년도 장쑤성의 중대한 주제로 문학 작품 도서를 창작하라’는 임무

를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중일 평화 우호 조약’ 체결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쓴 책입

니다. 그리고 《도시 추모에서 국가 추모가 되기까지》는 리후이(

Li Hui, 李慧) 여사와 공

저한 책이며, 이 여사와 저는 이미 출판된 바 있는 또 한 권의 장편 기록 문학 《

21번째 

국가 추모식》(장쑤인민출판사 

2014년 12월 출판)을 함께 수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충

13) 국가사회과학기금항일전쟁연구특별프로젝트.비준번호:16KZD016.

하여 다시 출판했습니다. 이 

2권의 책이 난징대학살의 사망자를 위한 국가 추모일에 바

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신서(

新書)를 바라

보면서 머릿속에 문득 “국가 추모식이 장쑤성과 난징시에 무엇을 가져다주었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一)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인식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중국에서도 과거에는 다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역사에 대한 인식이 모호했고 또

한 일본의 극우세력이 난징대학살 사건을 악의적으로 부인하며 그 본질을 말살시키려 

하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난징대학살의 역사가 전파되었으며 교육적인 작용도 하였습

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을 제정하자

는 법안이 통과된 이후, 그리고 시진핑 국가주석이 친히 난징에서 열린 첫 국가 추모식 

행사에 참석해 연설을 한 후에, 중국에서 난징대학살 역사에 대한 인식은 빠르게 하나

로 모아졌습니다. 이는 주로 

4가지 방면에서 구현되었습니다.

1

. 난징대학살에서 피해를 당한 대상에 대한 호칭이 통일되었습니다. 다년간 학계와 

언론에서 난징대학살의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가

장 많이 쓰인 것은 ‘조난자’, ‘희생자’, ‘사망자’ 였습니다. 이 중에서 ‘조난자’는 일본어에

서 온 단어인데, 재난은 전쟁 재난과 자연 재난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그 뜻

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희생자’는 의미하는 폭이 넓어서 사망자 외에도 다른 방면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사망자’는 그 뜻이 너무도 정확하여 죽은 사

람만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난징대학살 희생 동포 기념관에서 쓴 단어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기념관의 명칭은 이미 

30여 년간 사용해 왔을 뿐만 아니라 더욱 광범위한 의

미를 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념관이 주로 기리고자 하는 대상은 난징대학

살에서 숨진 동포이며, 동시에 그 재난에서 피해를 입은 생존자와 피해자입니다.

2

. 난징대학살의 ‘사망자’라는 호칭을 쓰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과거에는 

이 행사가 지방 성격의 추모식이었기 때문에 줄곧 ‘난징대학살에서 희생된 동포를 애도

한다’고 표현했으며, ‘사망한 동포’라는 단어도 사용했습니다. ‘동포’라는 단어는 하나의 

국가에 있는 하나의 민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매년 열리는 추모식에서 외국의 관계자

들도 초청하기 때문에 ‘희생된 동포’를 기린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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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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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내와 국외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사망자’로 고쳐서 쓰고 있습니다.

3

. 난징대학살의 사망자 수가 30여만 명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난징대학살

의 사망자 수는 

30만 명일까요, 아니면 30여만 명일까요? 어떤 표현이 더 정확할까요? 

이에 대해 공신력이 있는 자료를 제공한 곳은 

1946년에 설립된 난징일본전범군사재판

소입니다. 이 판결에서는 “본 재판은 그렇게 판단한다”고 최종 판결을 내렸는데, ‘

30여

만 명’과 ‘

30만 명 이상’이라는 표현이 5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30만 명은 

대략적인 숫자이자 명확한 숫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30여만 명인 

것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30만 명 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30만 명의 사망자는 

최소한의 숫자인 것입니다. 

2014년 2월 27일에 열린 제 12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원회 제 

7차 회의에서 통과된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의 제정에 관한 결정”에

서도 ‘무참하게 살해된 

30여만 명’이라고 법률의 형식으로 명확하게 기재하였습니다.

4

. 국가 추모식의 대상을 통일하였습니다.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식의 대상은 

난징대학살에서 사망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전쟁에서 학살을 당한 

모든 사망자까지 포함시켰습니다. 

1874년에 일본이 타이완(Taiwan, 臺灣)을 무력으로 

침공했을 당시의 사망자, 

1895년 갑오전쟁 당시의 중국인 사망자, 1900년에 팔국연합

군이 진압하여 살해한 의화단의 사망자, 

1904년 러일전쟁 때의 중국인 사망자, 1931년

에 일본이 중국 둥베이삼성(

Three northeastern provinces, 東北三省)을 침략하여 살

해한 중국인 사망자, 

1937년에 일본이 중국 침략 전쟁을 전면적으로 시작했을 때 살해

한 중국인 사망자가 그 주요 사례이며, 여기에는 화학전, 가스전, 세균전, 노역, 위안부

(성폭력), 무차별 폭격 등에 의해 희생된 사망자도 포함됩니다.

5

. 난징대학살의 역사가 시사하는 의미를 6가지로 정의하였습니다. 난징대학살을 제 

2차 세계대전 시 벌어졌던 사건 중에서도 특히나 참혹했던 사건이라는 각도에서 본다
면, 이는 인류 문명 사상 가장 참혹했고, 가장 야만적이며, 가장 광란했던 한 차례의 잔

인무도한 폭력 행위였습니다. 또한 중화민족이 희생된 역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하여 중국에서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킨 폭력 행위로서 가장 집중

되었고, 가장 두드러졌으며, 가장 대표적인 성격을 띠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죄악은 명

확한 증거가 있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국제사회도 일찍이 인정하였습니다.

(二) 국가 추모식은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난징대학살이 발생한 후 

80여 년 동안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3차례 공고히 한 

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두 차례 있었던 재판을 통해 난징대학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법률

로 판결함으로써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 재판에서 난징대학살이 발생한 기간, 발생한 

지역 범위, 포괄하는 내용, 사망자의 대상, 사망자 수를 판결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1980년대에 기념관을 건립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역사서를 편찬함으로써 

그 사실을 한층 더 공고히 하였습니다.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여 보존하

고, 전시하고, 계승했습니다.

세 번째는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을 제정함으로써 국가의 이름으로 그리

고 법률에 의하여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사실을 더욱 더 공고히 하였습니다. 첫째, 난징

대학살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재차 확인했고, “

1938년 12월 13일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중국 동포에게 길게는 

40여 일에 걸쳐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시

작하였고, 

30여만 명을 무참히 살해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난징대학살 사건을 만들었

다”고 인정했습니다. 둘째, 난징대학살 역사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 번 정의를 내렸습

니다. 즉, “이는 인류 역사상 극악무도한 파시즘적인 폭력 행위로서, 공공연하게 국제

법을 위반한 잔학한 행위임이 명확한 증거로써 남아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일찍이 이를 

공인하였다.” 셋째,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일의 날짜를 확정했으며, “

12월 13일

을 난징대학살 국가 추모일로 제정하고, 매년 

12월 13일에 국가가 추모식 행사를 거행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三) 국가 추모식은 국민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잘 보여줬습니다.

저는 예전에 《비극 문화의 힘을 경시하지 마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대

략적인 뜻은 난징대학살이 비록 역사의 비극이기는 하나, 비극도 굴욕에 저항하는 내

재적인 원동력이 되고, 발전하여 끝까지 맞붙으려는 힘을 기르게 하며, 분발하여 소기

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 정신력을 부여한다는 의미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헤르난

(

Herna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공통적인 기억 속에서 재난과 상처는 

즐거움이나 영광스러움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에게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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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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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고, 근심과 고난을 같이 했던 기억을 불러일으켜서 국민을 하나

의 단단한 공동체로 결집시키기 때문이다.” 난징대학살의 사망자는 군대의 지도자도 아

니었고 영웅도 아니었으며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민중이었습니다. 국가 추모일을 제

정함으로써 사망한 동포를 애도하고, 민중의 생명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구현했습니다. 

이는 중국이 항전에서 승리한 이후 처음으로 법으로 정한 국가 추모일입니다. 국가의 

관련 부처가 매년마다 반드시 난징대학살 사망자 추모식 행사를 치르도록 요구하는 것

이며, 이러한 국가 차원의 행동이 일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전해지고, 그래서 

전쟁의 희생자와 생존자 그리고 그 유족들에게 정신적으로나마 위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가 인권을 존중하고 보장한다는 헌법의 정신을 구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

과 국가 간의 정신적인 거리를 좁혀 놓았습니다. 국가 차원의 사회 활동을 만듦으로써 

민중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고 한마음으로 협동하여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

하는 데에까지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四) 국가 추모식은 평화의 주제를 더욱 확대했습니다.

1. 20번째로 열린 장쑤성과 난징시의 지방 추모식에서 기존에 역사를 기념한다는 하

나의 주제에서 ‘역사와 평화’라는 

2개의 주제로 확대되었습니다. 평화는 영원한 테마입

니다. 그러나 평화의 개념을 기념관에 어떻게 융합시킬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

다. 한 가지 경험이 제게 큰 영감을 주었고, 이것을 계기로 기념관의 업무 추진에 변화

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1년 12월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성모마리아대성당에

서 열린 평화의 기도식에 참석하여 

30여만 명의 난징대학살 사망자를 위해 기도했고, 

9

·11 희생자를 위해 기도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경험을 하기 전 

10

년 동안은 줄곧 역사 연구에만 매달렸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을 한 후로 저는 역사를 

검증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평화와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 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건의하고 또 호소하였으며, 그 결과 

2002년부터 난징시에서 매년 열리는 추

모식에 평화의 테마를 추가하게 되었고, 그 후로 난징시는 국제 평화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2. 기념관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항상 평화의 이념과 구현에 힘썼습니

다. 기념관의 스타일을 진열한 것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어울리게 함으로써 방

문자들이 그 분위기 속에서 교육적인 환경을 접하고 받아들이게끔 만들었습니다. 기

념관에서 전시관의 전체 외관은 평화의 배를 표현한 것이며, 전시실 바깥에 세워져 있

는 높은 뱃머리는 ‘검으로 승화된 예리함’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전시관은 역사와 평화

의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앞의 절반은 역사의 장이고, 뒤의 절반은 평화의 공원입니

다. 모든 방문객은 기념관에 들어서는 순간 역사의 장으로 들어서게 되지만, 마지막에

는 평화로운 곳으로 나가게 됩니다. 또한 기념관에는 평화의 여신상, 소래풀과 신드버

그(

Bernhard Arp Sindberg) 장미 평화 공원, 평화의 종, 평화 선언의 벽, 평화의 비둘

기 날리기 등 평화를 기념하는 시설들이 있습니다.

3. 국가 추모식에서도 지방 추모식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국가 추모식은 장쑤

성과 난징시가 

20년간 지속해 온 추모식을 기초로 거행하게 된 행사입니다. 따라서 지

방 추모식에서 성공적이었던 활동들을 국가 추모식에서도 꾸준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 일본, 한국의 승려들이 매년 한 번씩 참가하는 ‘세계 평화 법회’, 평화

의 종 치기, 평화의 비둘기 날리기 등이 있습니다.

4. 국가 추모식은 국제 평화를 다시 촉진하는 자리입니다. 엥겔스가 이렇게 말했습

니다. “우리는 역사의 계시를 의심하고 경시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역사는 우리의 

전부이다.”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이케다 다이사쿠(

池田大作)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

다. “평화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평화보다 더 행복한 것도 없다. 평화야말로 인류가 

전진해야 할 기초이다.” 중국이 난징대학살 국가 추모일을 제정한 것은 현실적인 측면

에서 우리가 세계와 더 잘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세계 평화를 수호하려면 국내외

의 더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더 튼튼한 평화의 댐을 어떻게 쌓을까 하는 문

제는 시대적인 과제입니다. 국가 추모일을 제정하였으니 필시 더 많은 평화 애호가들의 

양지(良

知)를 일깨우게 될 것이며, 올바른 역사관을 세워서 오래 유지되는 세계 평화와 

안녕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五) 국가 추모식은 장쑤성과 난징시의 국내외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드높였습니다.

2014년 12월 13일에 첫 난징대학살 사망자 국가 추모식 행사를 한 이래로 이미 5차

례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이에 따라 국외에서의 장쑤성과 난징시의 영향력도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를 

5가지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추모식의  권위가  지방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94년

~

2013년에는 장쑤성과 난징시의 사회 각계 인사들이 난징대학살에서 희생된 동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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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애도하는 의식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지방 성격의 추모식은 총 

20차례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2018년에는 총 5차례에 걸쳐 국가 성격의 추모식을 치렀습니다. 이 중

에서 

2014년과 2017년의 추모식은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회, 국무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중국중앙군사위원회의 명의로 거행됐

으며, 

2015년과 2016년과 2018년의 추모식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의 명의

로 개최되었습니다. 추모식의 의미가 제고(

提高)되었고, 정치적 성격이 강해졌으며, 해

마다 거행되는 이런 행사는 중국에서 유례에 없던 것입니다. 베이징을 제외한 전국의 

도시 중에서 유일합니다.

둘째, 시진핑은 공산당과 국가와 군대의 최고 영도자로서 

5차례의 국가 추모식 중에

서 

2차례나 직접 난징에 와서 참석했습니다. 이는 국가 추모식 행사를 매우 중시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많은 간부와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셋째, 국가 추모식은 매우 의례적이며, 행사의 조직력이 훌륭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매년 

12월 13일마다 기념관 내에 세운 국가 추모식 현장에 국기를 내리는 의식을 치릅니

다. 국기는 국가를 대표하므로 이러한 의식은 사망자에 대한 국가의 애도를 표현한 것입

니다. 

5차례 치른 추모식 모두 국가의장대와 국가군악대가 베이징에서 난징까지 원정을 

와서 국가를 연주하고 화환을 바치는 등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넷째, 매년 국가의 명의로 국내외의 평화적, 우호적 인사들을 초청합니다. 예를 들면 

러시아 애국 전쟁 기념관, 폴란드 아우슈비츠 국립 박물관, 제 

2차 세계대전 박물관의 

관장 및 욘 라베, 신드버그 등 당시 난징 사람들을 구조해주었던 외국의 친구와 그 가족

을 국가 추모식에 참석하도록 초대합니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난징대학살의 역사 및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강제동원 된 
폴란드인 희생자 실태와 

추념시설의 세계사적 의의

- 폴란드의 제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 -

Malgorzata Glowacka Grajper 교수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Memories and commemorations 
of the victims of World War II in 
Poland

Malgorzata Glowacka Grajper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발표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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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and commemorations 

of the victims of World War II in Poland

/

Malgorzata Glowacka Grajper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The Second World War as a key event in Poland's most recent 

history

Jay Winter (2006) points out that the two world wars were of crucial 

importance since they were the most convulsive events of the twentieth 
century. In Poland’s case both wars exerted a crucial influence on its current 
territorial and demographic state as well as its outlook on the world. In 1918, 
the First World War and geopolitical transformations in Europe led to Poland 
reappearing on the map of Europe as a sovereign state after a period of 
partition. On 1 September 1939, the armies of the Third Reich advanced into 
Polish territory from the west and north without declaring war. A few days 
later, on 17 September, under the provisions of the Ribbentrop-Molotov Pact, 
which had been signed by the Third Reich and USSR on 23 August 1939 and 
contained a secret protocol providing for the division of the states of Central 
and Eastern Europe between the two signatories, the Second Republic’s 
eastern territories were occupied by the USRR (Snyder 2010). The line dividing 
Poland between the Third Reich and USSR, which ran along the River Bug, 
was demarcated according to a Treaty on Borders and Friendship signed 

발표문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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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ginning of 1945, it was finally established at the Yalta Conference that 
Poland would be located within the Soviet zone of influence, receiving land 
taken from the German state as a compensation for its lost eastern territories. 
Poland therefore emerged from the war and the double wartime occupation 
as a completely different state.

The Second World War had altered Poland’s borders, political system and 

social structure. The Polish state lost almost half of its pre-war territory to the 
Soviet Union. The lost territories had been the most ethnically and religiously 
diverse part of the country. Moreover, over 90% of Poland’s Jewish population 
had been lost to the Holocaust. The Polish state had been transformed from 
a multi-ethnic country in which national and ethnic minorities had made 
up 30% of the population to a state that was almost uniform in terms of 
nationality (today, no more than 4% of the population is made up of ethnic 
minorities). This also meant that the country was much less religiously 
diverse, with representatives of religions and denominations other than 
Roman Catholicism constituting only a fraction of Polish society after the war.

Sociological studies emphasize the potent position the war occupies in 

Polish social memory: “Memory of the Second World War is living history, 
a source of family traditions and the focus of discussions with those who 
witnessed it. According to 72% of respondents to a CBOS1) survey conducted 
in 2009, the Second World War is, for them, ‘a part of Polish history that 
continues to live on and of which we should be continually reminded’.” 
(Nijakowski 2010: 241). A distinguishing feature of Polish memory of the war 
is the conviction that immediate family members were participating in events 
and processes of immense importance to the history of the whole nation, and 
as many as 86% of Poles point out that members of their closest family took 
part in it (Kwiatkowski 2008: 188-89). The war resonates very strongly with 

1) TheCBOS(CentreforPublicOpinionResearch)isaWarsaw-basedopinion-pollinginstitute.

between the two powers on 28 September 1939 and remained in force until 
the armies of the Third Reich’s surprise attack on the USSR on 22 June 1941. 
On the lands incorporated into the USSR, the Soviet system of administration 
was introduced, collectivization was implemented and repressions 
commenced. People from the uppermost social classes, representatives of 
the intelligentsia, employees of Polish state structures and all the uniformed 
services (from soldiers to policemen and foresters), the clergy and wealthiest 
peasants were deported deep into the USSR, incarcerated in NKVD prisons or 
killed.

The German occupiers employed numerous methods of repression 

– inhabitants of the occupied territories were sent deep into Germany 
to work, a system of food rationing was established, higher education 
establishments and numerous cultural and research institutions were 
closed down, representatives of the Polish intelligentsia were liquidated, 
there were mass executions on the streets and villages were pacified; any 
attempt at resistance was punishable by death. The Jewish population was 
subjected to a policy aimed at their exploitation, repression and ultimately, 
extermination. Jews were deprived of their property and resettled in ghettos 
(the one functioning in Warsaw being the largest in Europe), where they died 
in enormous numbers from starvation and illness, as well as being deported 
to concentration camps. In 1942, Operation Reinhardt was launched, during 
which around two million Jews were sent to death or concentration camps 
and murdered. It was also in this year that the death penalty for hiding Jews 
was introduced in the General Government. In total, around 3 million Jews 
who had been Polish citizens before the war lost their lives during the war.

The territories contained within the eastern part of the newly established 

Poland were liberated in 1944 and the first state structures dependent on 
the Soviet Union were created. The decision that over half of Poland’s pre-
war territory would not be included within the borders redrawn after the 
war was taken at the end of 1943 at the Tehran Conference. Furthermore, 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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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es and wrongs suffered by their compatriots during the war are perceived 
as wrongs suffered by people immensely close to them, whether family or 
acquaintances. As far as Polish remembrance policy is concerned (whether it 
is expressed through public discourse or transmitted by the education system), 
the war is primarily interpreted by means of two interlinked narratives, one, 
heroic, and the other, martyrological. The events that are of key importance 
to the Polish memory discourse are the Warsaw Uprising of 1944,2) the Katyn 
Massacre (Etkind et all. 2012) and the establishment of Auschwitz3). Memory 
of the war has been incorporated into a series of traumatic events ever 
present in Polish social memory, thereby becoming another instance of “the 
Polish fate” and often being viewed as the culmination of that fate.

Postwar forms of remembrance

The first sites of memory appearing in the cultural landscape shortly 

after the Second World War were of a religious nature. Most of them were 
crosses spontaneously erected by people returning to towns and villages who 
wished to preserve the memory of their loved ones in the traditional manner. 
Apparently, the first attempts at commemoration in such places as Auschwitz-
Birkenau or Majdanek were bottom-up grassroots initiatives (Wóycicka 2013). 
However, from the end of the 1940s, most of these sites, and especially those 
regarded as being of key importance to the construction of a communist 
vision of the Polish nation’s wartime martyrdom, were monopolized by the 

2) TheWarsawUprisingwasanoperationmastermindedbythePolishresistance,inparticulartheHome

Army.ItsobjectivewastoliberateWarsawfromGermanoccupation.Itstartedon1August1944and

lasted63days.

3) GenevièveZubrzycki(2006)writesaboutthesignificanceofAuschwitzforCatholicPoles.However,it

shouldbestressedthatinrecenttimesCatholicPoles’perceptionofAuschwitzhaschanged,withthesite

increasinglybeingperceivedasa“Jewish”site(Kucia,Duch-Dyngosz,Magierowski2013).

state language of remembrance. Overwhelmingly, these new state memory 
markers replaced traditional forms of remembrance. A good example of this 
is the manner in which Warsaw’s space was restructured after the war. In 
1948, the Warsaw authorities announced a competition calling for memory 
projects commemorating sites of combat and martyrdom within the capital. 
It was won by the Warsaw-based sculptor Karol Tchorek and from this time 
onwards, traditional forms of remembrance were replaced by bas-reliefs 
carved in grey sandstone centered around Maltese crosses bearing the 
inscription: “A site sanctified by the blood of Poles who fought for the freedom 
of the motherland”. From the 1950s to the 1990s, plaques designed by Tchorek 
were erected in great numbers at sites of memory located in Warsaw and 
towns and villages in close proximity to the capital. Despite their standardized 
form and ideologized language, the plaques in Wola marked the places where 
the loved ones of those who had survived the wartime murders in this district 
of Warsaw had died. These survivors treated them as a symbolic grave where 
they could come and pray. This process was aided by the cross engraved on 
the plaques. 

At sites where the authorities believed that these markers posed no threat 

to the state ideology, traditional forms of remembrance have survived to this 
day. One such example are the votive crosses and shrines commemorating the 
wartime fate of specific vernacular communities. This spontaneous post-war 
erection on a massive scale of religious memory markers by local populations 
laid the foundations for an alternative manner of commemorating the war 
that differed from the methods previously favored by the state. Rather than 
proposing a new language of remembrance like the state-sponsored memory 
projects that had appeared after the war, these shrines and crosses were 
regarded as traditional repositories of Polish memory. 

The Polish People’s Republic period was dominated by ideologized state 

memorial projects. The authorities constructed memorial complexes that 
were artistic in form and ideological in content at such sites as Majdan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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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ganizations or indicate exact sites, so they had to commemorate those the 
state was reluctant to commemorate by using religious symbols to incorporate 
them into a community comprising their dead ancestors. These places 
were perceived to be expressing the truth about the past and frequently 
became spaces for spontaneous protests against the authorities. As a result, 
the commemorated freedom fighters also become champions of genuine 
remembrance of the past expressed using legitimate symbols. 

Forms of remembrance of the 1980s and 90s

The imposition of martial law in December 1981 signaled the end of 

freedom and opportunities to legally commemorate the past. The return of the 
repressions led to people appealing again to the Catholic Church to express 
the truth about the past. During this period, such places as St Stanislaus Kostka 
Church, where Solidarity’s chaplain Father Jerzy Popiełuszko gave his “Masses 
for the Homeland”, grew to the status of a symbol. After he was murdered 
by the security forces, the church changed into a sanctuary dedicated to 
Popiełuszko’s memory, and his grave became a frequently visited site of 
memory. Throughout Poland, other sanctuaries also appeared that attempted 
to comprehensively express the history of the martyrology of the Polish nation 
by combining modern history with the past. Examples of these include the 
Sanctuary of the Martyred Polish Brothers in Bydgoszcz, the Sanctuary to 
the Fal en and Murdered in the East at St Boromeusz Church in the Warsaw 
Powązki Cemetery and Our Holy Cross Lady of Sorrows Sanctuary in Kałków. 

The increasing importance of Polish religious symbolism has caused the 

first conflicts over the symbolism of remembrance. The most prominent 
dispute was over the construction of a Carmelite convent and erection of 
crosses in a gravel yard in Auschwitz (Zubrzycki 2006). This provoked a period 
of fierce conflict over Polish-Jewish memory that lasted for the whole of the 

Westerplatte and Auschwitz in order to commemorate events that were meant 
to shape the identity of any citizen of the People’s Republic. These projects 
commemorated in secular fashion heroes who had fallen in battle fighting 
for freedom. At the same time, they kept fear of war alive and were meant to 
construct a national community based on vernacular communities’ memory 
of their fate and pride at the final victory (Wawrzyniak 2015). 

In 1947, a state organization known as the Organization for the Protection 

of Struggle and Martyrdom Sites was established that was tasked with 
creating sites of memory, maintaining them and supervising the ideological 
and esthetic coherence of any new projects that were being created. However, 
it was not only sites of memory regarded as symbols of the terror under 
occupation (such as the grounds of former concentration camps, prisons, 
battle sites) that were subject to state-sponsored remembrance practices, for, 
over time, vernacular sites of memory came under the influence of the state 
as they were incorporated into a national network of such sites by virtue of 
them being located on the newly created Martyrology of the Polish Nation 
Trails. Citizens participating in excursions along martyrological trails were 
able to discover the scale of the suffering that had been experienced, find out 
facts and information and contribute to the construction of the community of 
fate the authorities wished to create. In 1964, on the twenty-fifth anniversary 
of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the Polish Council of State published 
the first Guide to Sites Commemorating the Struggle and Martyrdom from the 
War Years 1939-1945, which contained ca. 2000 entries providing information 
about sites “at which the Nazis committed their greatest crimes”.

During the same period, an alternative system of sites of memory dedicated 

to those whom the communist authorities did not want to commemorate, in 
particular Home Army soldiers, Warsaw Uprising insurgents and victims of 
the massacres at Katyn and in Volhynia, was created in church and cemetery 
grounds. The shrines, epitaphs and commemorative plaques appearing in 
churches and cemeteries could not reveal the whole truth, give the names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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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er new interpretations of significant events, such institutions were not 
being created in the nineties. Nevertheless, Halls of Memory were appearing, 
such as the one devoted to Siberian deportees at the Church of the Holy Spirit 
in Białystok or the first Katyn Museum, which was created by the Federation 
of Katyn Families and operates as a branch of the Polish Army Museum in 
Warsaw. However, rather than serving as history museums with archives, 
these halls contained exhibitions of family memorabilia and resembled 
Germany’s Heimat museums. Repressed persons or the close relatives of 
victims brought such memorabilia to the halls, which were then put on 
display according to their own feelings rather than museological exhibiting 
principles. This state of affairs remained unchang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twenty-first century, when important new memory actors emerged. The 
first of these was the state, which became interested in exploiting the past as a 
tool of historical policy and using history to bolster its moral capital. The other 
new memory actors mainly consisted of 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associations, artists and local government activists who perceived the past as 
an important element in the construction of a modern local community. 

After beginning of socio-political transformation in the 90s, the memory 

of World War II came across many changes. In the days of communism in 
Poland, as well as in other countries of the Eastern Bloc it was primarily a 
heroic memory – even if societies remembered about the victims the basic 
narrative concerned the “victory over fascism” at the side of the Red Army. 
After the fall of communism, the memory of the war focused on the victims, 
and the aspect of the heroic narrative is visible only in the commemorations 
of the underground resistance movement (but this is a heroism that was 
completed ultimately with the defeat and the introduction of the communist 
regime, not the heroism of bringing about a triumphant victory and a 
“new, better world”, as was in the earlier narratives). The narration of the 
martyrological memory is strengthened further by commemorating the 
victims of the communist era. 

90s and reached its culmination in the Jedwabne debate that took place at the 
beginning of the twenty-first century. This dispute was primarily concerned 
with how the past should be interpreted, but also considered the language 
of remembrance and who and what should be commemorated using which 
symbols. 

After the change of political system in 1989, the state slowly began 

constructing memorials to events that had earlier been tabooed. Memorials 
of this kind unveiled in Warsaw included the Monument to the Heroes of 
the Warsaw Uprising unveiled in 1989, the Monument to Martyrs of the 
Communist Terror 1944-1956 unveiled in 1995 and the Monument to the 
Fal en and Murdered in the East. The memorials created during this period 
commemorated specific groups of victims. However, no single central 
state monument or museum was created that commemorated all the war’s 
victims. Such comprehensive visions of the fate of the nation only found their 
expression at the sanctuaries mentioned above.

Moreover, after the 1993 elections, some former communists returned 

to power who were not interested in commemorating the past and seeking 
a new language of remembrance. Consequently, the main onus for the 
remembrance process in free Poland’s first decade fell on army veteran circles 
and the families of victims. They were aided by Catholic priests who, faced 
with a lack of interest from the state, had become involved in commemorating 
those whose memory was yet to be commemorated in fitting fashion. This 
process found its expression in such actions as the placing of epitaphs and 
commemorative plaques in churches and the construction of memorials to 
Katyn, or Golgothas of the East. Such memorials created on the initiative of 
victims supported by Catholic priests have appeared in many cities, towns and 
villages in Poland, thereby becoming an integral component of the cultural 
landscape.

Even though discussions were already ongoing during this period on the 

need to create museums telling of the wartime fate of Poles that would a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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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  

of the History of Polish Jews, European Solidarity Center and Second World 
War Museum were established. With return of Law and Justice Party to 
power in 2015 Poland faced a shift in historical policy in which the heroic-
martyrological aspect would take center stage again. In 2016, the Council for 
the Protection of Memory of the Struggle and Martyrdom was disbanded. This 
institution created during the Polish People’s Republic, which had been tasked 
with developing a new, secular language of remembrance, had been shaping 
the Polish memory landscape for years, approving the form that monuments 
took, passing judgement on the content of the inscriptions they contained 
and taking care to ensure that remembrance ceremonies correlated with 
each other. Following the change of political system in 1989, this institution 
had devoted increasing attention to the history of the earlier mentioned 
groups emerging from the shadows and appropriated their religious-
national language of remembrance to create sites of memory, mainly in the 
East, commemorating the martyrology of the Polish nation. Council’s role 
was assumed by the Institute of National Remembrance (IPN), an institution 
created in 1998, which is still primarily occupied with the gathering and 
management of documents issued by the security organs during communist 
times, the conduction of academic research and investigations into Nazi and 
communist crimes and public education. 

It is worth drawing attention to another post-1989 significant change, 

namely a change in focus applying to the subjects around which debates 
on the past are centered. Rather than focusing on the Polish-German or 
Polish-Russian past to which most monuments of the 1990s such as the 
Katyn Memorials or Golgothas of the East were dedicated, the most heated 
debates on television and the pages of the most prominent newspapers 
and opinion-forming dailies are centered around Poles’ wartime relations 
with their neighbors, in particular relations between ethnic Poles and their 
Jewish compatriots and the Polish-Ukrainian conflict. Consequently, although 
victims of the Third Reich and USSR are currently the primary focus of official 

Forms of remembrance in the twenty-first century – a time of 

narrative projects

The beginnings of narrative remembrance in Poland are bound up with 

the foundation of the Warsaw Uprising Museum in 2004. This first-of-its-
kind modern, multimedial and narrational institution of culture aroused 
enormous public interest and achieved political success, leading to other 
political circles becoming interested in replicating such success. With the 
traditional monument and official state commemorations in a state of crisis, 
the potential of museums as new repositories of memory became apparent. 
During this period, existing museums were undergoing modernization and 
new institutions largely devoted, as it happens, to twentieth-century history 
were being created. 

The remembrance system is becoming ever more centralized. The 

conservative Law and Justice party’s three-year tenure in power from 2005 
to 2007 meant a return to the creation of official interpretations of the past 
and open conversations about the need for the state to develop its own 
historical policy. Furthermore, the state began to play the role of a guardian 
and propagator of the history of groups whose past was tabooed during 
the Polish People’s Republic. These groups’ tradition of remembrance based 
on the use of national and religious symbols was continued in the hope 
that if the state remained true to this language, it would be able to count on 
these groups’ support. At the same time, the state consistently pursued its 
own historical policy, which led to the Parliament of the Republic of Poland 
becoming increasingly active in the creation of commemorative resolutions 
(a trend that continued over the years that followed). From 2007 to 2015, the 
liberal Civic Platform party was in power and also began to pursue its own 
historical and “museum” policy, although this policy focused more on the 
international (European) dimension of memory of Poland’s past. Under the 
Civic Platform governments’ tenure, such museums as the POLI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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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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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als in Poland, the strongest emotions are being provoked by debates 
about the victims of conflicts with groups of neighbors who were citizens 
of the same Polish state before the war. The transformations taking place in 
Polish memory are inextricably linked to global remembrance narratives and 
are imbued with an undeniable moral dimension.

Bibl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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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oo and Matilda Mroz, Remembering Katyn. Cambridge: Polit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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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i. Warsaw: Schola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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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i.” In: Między codziennością a wielką historią. Druga wojna światowa w pamięci 
zbiorowej społeczeństwa polskiego, eds. Piotr T. Kwiatkowski, Lech M. Nijak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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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furt am Main: Peter Lang,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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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st Poland
.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강제동원 된 폴란드인 

희생자 실태와 추념시설의 세계사적 의의

-  폴란드의 제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과 기념 -

/

Malgorzata Glowacka Grajper 교수

(Institute of Sociology, University of Warsaw)

폴란드 현대사 주요 사건으로서의 2 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Jay Winter(2006)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20세기에서 가장 경악스러운 사건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였다. 두 전쟁 모두 폴란드의 현재 영토, 인구 구조 및 세계

에 대한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 및 이에 따른 유럽 내 

지정학적 변화로 인해 폴란드는 분할의 시기를 마치고 유럽 내 주권국으로 재부상하였

다. 

1939년 9월 1일 독일 제 3제 가이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북부와 서부 지역을 침공

하였다.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 간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은 중앙 및 동유럽 국가

들의 분할에 대한 비밀 조항을 담고 있었는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지 수 일 후인 

9

월 

17일 소련은 이 조약에 따라 폴란드 제 2공화국의 동부 영토를 점령하였다(Snyder 

2010). 1939년 9월 28일에는 독일과 소련이 국경우호조약을 체결하여 부그강을 따라 
폴란드-독일-소련의 경계를 설정하였으며, 이는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기

습침공 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소련에 병합된 지역에는 소련의 행정 체계가 도입되었으

며, 이에 따라 집단경제계제 및 탄압이 시작되었다. 상류 계층, 지식인 대표, 폴란드 국

가공무원 및 제복공무원(군인, 경찰, 삼림관리원 등), 종교인, 부농 등은 소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거나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교도소에 수감 또는 숙청되었다.

폴란드를 점거한 독일은 다양한 탄압책을 활용하였다. 점령지 주민들은 독일로 징발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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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식량 배급 체계가 강제되고 고등교육기관과 다수의 문

화기관 및 연구기관이 폐쇄되었다. 독일은 또한 폴란드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기관들을 

해산하는 한편 거리 곳곳에서 대규모 처형을 자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폴란드 곳곳의 불

만을 무마하였다. 모든 저항 시도는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착

취, 억압, 말살 정책의 표적이 되었다. 독일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박탈하고 이들을 게

토에 재정착시켰다(바르샤바 게토는 유럽 최대 규모였다). 게토에 갇힌 많은 유대인들

이 기아와 질병으로 스러져갔으며, 일부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1942년

에는 라인하르트 작전을 통해 약 

2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처형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살해당하였다. 같은 해에는 폴란드 총독부가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행위를 

사형으로 벌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폴란드 국민이었던 유대

인 중 

3백만여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

신생 폴란드의 동부 지역에 속한 영토는 

1944년에 해방되었으며, 소련에 의존한 최

초의 국가 구조가 설립되었다. 

1943년 말 개최된 테헤란 회담에 참여한 국가들은 전쟁 

전 폴란드가 영유하였던 영토 중 절반 이상을 전후 새로 설정된 폴란드 국경 안에 포함

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1945년 초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는 폴란드를 소련의 

영향 아래 두기로 최종 결정하였으며, 소련이 점령한 폴란드 동부 영토에 대한 대가로 

독일 동부 지역을 폴란드에 병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폴란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

어난 독일과 소련의 점령을 통해 완전히 다른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폴란드의 국경, 정치체계, 사회구조를 바꾸어 놓았다. 폴란드는 

전쟁 전 영토의 절반 이상을 소련에 빼앗겼는데, 해당 지역은 폴란드에서 가장 인종적, 

종교적으로 다양한 지역이었다. 더불어 폴란드 내 유대인 인구의 

90% 이상이 홀로코스

트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 탓에 폴란드는 인구의 

30% 이상이 소수민족이었던 다민족 

국가에서 거의 단일민족인 국가로 변화하게 되었다(오늘날 폴란드 인구의 

4% 이하가 

소수민족이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폴란드의 종교적 다양성 또한 감소하였는데, 전후 

로마 가톨릭 이외의 종교 및 종파에 소속된 인구는 전체 인구의 일부로 전락하였다.

여러 사회학 논문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폴란드의 사회적 기억에서 차지하는 거대

한 역할을 강조한다.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은 살아있는 역사이자 여러 가족의 

전통의 원천이며, 전쟁을 목격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2009

년 진행된 여론조사센터(

CBOS)1)의 조사에 따르면, 72%의 응답자들이 제 2차 세계대

전이 ‘폴란드 역사의 살아있는 일부이며, 계속해서 기억해야 하는 역사’라고 하였다.” 

(

Nijakowski 2010: 241). 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폴란드의 기억 중 두드러지는 부분

은 많은 폴란드인들이 자신의 직계 가족이 폴란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의 일부였

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86%의 폴란드인들은 직계 가족이 제 2차 세

계대전의 일부였다고 응답하였다 (

Kwiatkowski 2008: 188-89). 폴란드인들은 제 2

차 세계대전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며, 전쟁 중 폴란드인 동포들이 겪은 피해

는 곧 자신의 친지 또는 지인들이 겪은 피해라고 인식하고 있다. (공적 담론, 교육 체계 

등을 통해 표현되는) 폴란드의 전쟁 기념 정책은 제 

2차 세계대전을 영웅과 순국선열이

라는 두 개의 연결된 서사를 통해 해석한다. 폴란드의 전쟁 기념 담론에서 주요한 사건

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2), 카틴 학살(Etkind et al. 2012) 및 아우슈비츠의 설립3)이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폴란드의 사회적 기억에 상존(

常存)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일부로 

통합되어 “폴란드의 운명”이라는 서사의 일부이자 종종 그 “운명”의 정점으로 간주되기

도 한다.

전후 과거사 기념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문화적 환경에서 등장한 전쟁 기념지들은 종교적인 성격을 

지녔다. 대부분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전쟁에 희생된 가족, 친지, 친구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세운 십자가였다.  초기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또는 마이다네크와 같은 장소에 설치된 기념물은 상향식 풀뿌리 활동의 결

과물인 것으로 보인다 (

Wóycicka 2013). 그러나 1940년대 말에는 이러한 장소의 대부

1) 여론조사센터(CBOS)는바르샤바에위치한여론조사기관이다.
2) 바르샤바봉기는특히폴란드국내군과같은폴란드저항세력이기획한작전이었다.그목적은바르샤바를독일점

령군으로부터해방하는것이었다.1944년8월1일에개시되어63일간지속되었다.

3) GenevièveZubrzycki(2006)는폴란드가톨릭교도들에게있어아우슈비츠의중요성에대해저술하였다.그러나

근래폴란드가톨릭교도들의아우슈비츠에대한인식이변화하여아우슈비츠를유대인들의기념지로인식하는가

톨릭교도의수가증가하고있다는점을기억하여야할것이다(Kucia,Duch-Dyngosz,Magierowski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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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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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분, 특히 폴란드의 전시 순국선열을 통해 공산주의적 비전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

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 곳들을 국가가 전쟁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독점하기 시작하였

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기념 시설은 전통적인 기념 방식을 압도적인 규모로 대체하였

다. 이에 대한 예로는 바르샤바 시내 공간이 전후 재건된 방식을 들 수 있다. 

1948년 바

르샤바 당국은 수도 지역 내 전적지 및 순국선열지 관련 전쟁 기념 사업을 공모하였다. 

해당 사업은 바르샤바에 기반을 둔 조각가 카롤 초렉(

Karol Tchorek)이 수주하였으며, 

이후 전통적인 방식의 기념 시설은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폴란드인의 성스러운 피

로 물든 장소”라는 문구를 품은 몰타 십자가가 얕은 돋을새김으로 회색 사암에 조각된 

기념비로 대체되었”. 

195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초렉이 디자인한 전쟁기념비는 바르

샤및와 수도권 도시 및 마을 주변의 기념지에 대규모로 설치되었다. 바르샤바 월라 구

(

區)에 위치한 기념비들은 표준화된 양식 및 이념적인 언어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전

쟁 중 이 지역 내에서 자행된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 및 친구들이 살해된 장

소를 표시하고 있다. 학살 생존자들은 이러한 기념비들을 상징적인 묘지로 간주하여 이

를 방문하여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곤 하였다. 기념비들에 십자가가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당국자들이 국가의 이념을 위협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곳에서는 전통적인 기념 시설

들이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예로는 전쟁 에 피해를 입은 지역 공동체를 

기념하기 위해 봉헌된 십자가 및 사당 등이 있다. 이렇게 지역민들이 전후 자발적, 대

규모로 설치한 종교적 기념 시설은 국가가 선호한 기존 전쟁 기념 시설과는 다른 대안

적 기념 방식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전후 개발된 국가 후원 전쟁 기념 사업과 같은 새로

운 기념 방식과는 달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설치한 사당 및 십자가는 폴란드의 기억

을 담은 전통적인 장소로 간주되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기에는 이념적인 국가 주도 기념 사업이 주를 이루었다. 공산

정권 당국은 마이다네크, 베스터플라트, 아우슈비츠와 같은 장소에 예술적 형태와 이념

적 내용을 갖춘 기념비 시설들을 건설하여 전쟁 중 일어난 사건을 기념함으로써 폴란드 

인민공화국 국의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자유를 위한 

전투에서 싸우다 순국한 영웅들을 세속적인 방식으로 기념하였다. 동시에 이러한 기념 

시설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 및 지역 공동체들이 겪은 피해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전

쟁 승리에 대한 자부심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폴란드 정부는 

1947년 “전쟁 및 순국기념지 보호국”이라는 국가 기관을 설치하여 전

쟁기념지 시설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며 신규 전쟁기념 사업지에 대한 이념적, 미적 

일관성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단지 독일 점령 하에서의 압제를 

상징하는 장소(과거 강제수용소, 교도소, 전적지 등)만이 국가가 후원하는 기념 사업의 

대상이 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며 지방에 위치의 기념지 또한 신설된 “폴란드 순

국선열 기념길”에 포함되면서 국가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순국선열 기념길"을 따라 

순례길에 오른 폴란드 국민들은 전쟁 중 폴란드가 겪은 고통 및 피해와 그 규모에 대해 

배울 수 있었는데, 이들은 이러한 활동을 통해 국가 당국이 만들고자 하였던 운명공동

체 건설 사업에 기여하였다. 폴란드 국무원은 

1964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25주년을 

기념하여 “나치당이 전쟁 범죄를 자행한” 장소 

2,000여 곳에 대한 정보를 담은 “1939-

1945년 전시 노력 및 순국선열 기념지 안내서”라는 책자를 최초로 발간하였다.

같은 시기 성당 및 묘지에는 공산당 당국이 기념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폴란드 국내

군 장병, 바르샤바 봉기 반란군, 카틴 및 볼리냐 학살 피해자에게 헌정된 대안적 기념 

시설이 설치되었다. 성당과 묘지에 설치된 이러한 사당, 기념비, 기념패에는 전체 사건

의 역사, 관련 조직의 이름, 특정 지명 등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 당국이 기념

하기를 꺼렸던 사건, 사람, 단체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상징물 및 공동묘지와 

같은 시설을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이러한 장소들은 과거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

는 곳으로 인식되었으며, 종종 국가 당국에 대한 자발적 항의를 표시하는 장소로 활용

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자유를 위해 싸운 이들을 기념하는 이러한 장소들은 합당

한 상징물을 통해 진실된 과거를 기념하는 보호구역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80 년대 및 90 년대의 과거사 기념

1981년 12월 발령된 계엄령으로 인해 합법적으로 과거를 기념할 자유 및 기회는 종

말을 맞게 되었다. 자유에 대한 억압에 다시 한 번 직면한 폴란드 국민들은 가톨릭 교회

가 진실된 과거를 표현해줄 것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폴란드 연대자유노

조의 사제였던 제르지 포피에워스코(

Jerzy Popiełuszko) 신부가 “조국을 위한 미사”를 

집전한 성(

聖)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성당과 같은 장소가 상징적인 위상을 가지기 시

작하였다. 포피에워스코 신부가 폴란드 공안에 피살된 이후 스타니슬라오 코스트카 성

당은부그를 기념하는 성소가 되었고, 그의 무덤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기념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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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   145

144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가 되었다. 또한 근현대사와 과거 역사를 통합하여 폴란드 국가 순국선열의 역사를 포

괄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기타 성소들이 폴란드 전역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예로는 

비드고슈치 폴란드 순국선열 성소, 바르샤바 포봉즈키 공동묘지의 성(

聖) 보로뮤츠 성

당, 카우코바 성 십자가 고통의 성모 성소 등이 있다. 

폴란드에서 종교적 상징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기념 상징물에 대한 갈등이 발생

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가장 격렬한 갈등으로는 가톨릭 카르멜회 수녀원 건설 및 아우

슈비츠 자갈 마당에 십자가를 세우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Zubrzycki 2006). 이

후 

90년대 전반에 걸쳐 폴란드계 유대인 기념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으며, 이는 

2000년대 의 예드바브네 학살 관련 논쟁에서 그 절정에 다다랐다. 이 논쟁은 과거에 대
한 올바른 해석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지만, 어떠한 언어를 사용하여 누구와 무엇

을 기념하고, 어떤 상징물을 사용하여야 하는지도 고려 대상에 포함되었다. 

1989년 정치 체제의 변화 이후, 폴란드 정부는 서서히 과거 공산정권 시절 금기시되

었던 사건에 대한 기념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바르샤바에 건설된 이러한 기념 

시설에는 바르샤바 봉기 영웅 기념비(

1989년), 1944~1956년 공산주의 공포정치 순국

선열 기념비(

1995년), 동부전선 전사자 및 사망자 기념비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건설된 

기념 시설은 특정 피해자 집단을 기념하였으나 모든 전쟁 희생자를 기념하는 국가 주도 

단일 중앙 기념비 또는 박물관이 건설되지는 않았다. 폴란드 “민족의 운명”에 대한 포

괄적인 기념은 위에 언급한 성소들에서만 표현되었던 것이다.

더하여, 

1993년 선거 이후 과거를 기념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를 기념하는 데 관

심이 없는 일부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획득하였다. 이로 인해 자유 폴란드의 첫 

10년 동안 과거를 기념하는 주된 책임은 참전용사 단체와 희생자 가족들에게 지워졌
다. 국가의 무관심으로 인해 적절한 방식으로 기념 받지 못한 집단을 올바르게 기억하

고자 하는 노력을 하던 가톨릭 사제들 또한 이들을 도왔다. 이들은 성당에 기념 묘비 및 

기념패를 설치하거나 카틴 또는 “동쪽의 골고타”에 대한 기념비를 건설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노력을 표현하였다. 폴란드 내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희생자들의 주도 및 가톨

릭 사제들의 도움으로 이러한 기념 시설들이 설치되어 관련 문화적 환경의 필수적인 구

성 요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전쟁으로 인한 폴란드인들의 운명에 대한 박물관을 통해 주요 사건에 대

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이미 논의되고 있기는 하였지만, 

90년

대에는 이러한 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알리스톡 성령 성당에 

위치한 시베리아 추방자 기념관이나 카틴 학살 피해자 가족 연맹이 설립하여 바르샤바 

폴란드 육군 박물관의 지부로 운영되는 최초의 카틴 박물관 등과 같은 시설이 이 시기

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들은 기록관을 갖춘 역사 박물관으로 기능하기보다

는 희생자 가족들의 유품을 전시하는 소규모 지방 박물관에 불과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

다. 이러한 시설들은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나 희생자의 친지들이 기증한 유품을 체계

적인 박물관학적 전시 원칙이 아닌 기증자들의 감정과 느낌에 따라 전시하였다. 

2000

년대 초까지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었는데, 해당 시기에는 과거사 기념과 관련하여 중

요한 주체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주체 중 하나는 국가로, 과거를 역사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고 역사를 통해 도덕적 자본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 다른 기념 관련 주체는 과

거 역사를 현대 지역 공동체 구축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기 시작한 비정부기구, 협회, 

예술가, 지역 정부 활동가 등이 있다. 

90년대의 사회정치적 변화가 시작된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은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폴란드 및 동구권의 공산정권 시기에는 이러한 기억이 주로 영웅들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공산정권들은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데 있어 붉은 군대가 “파시즘에 대한 

승리”를 달성하였다는 것을 그 기본 서사로 하였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에는 전쟁에 

대한 기억의 초점이 희생자들에게로 이동하였고, 영웅적 서사는 지하 레지스탕스 활동

에 대한 기념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그러나 이는 과거 공산정권의 영웅담과 같이 승

리를 통해 “새롭고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였다는 내용이 아니라 공산정권이 궁극적으

로 패배함으로써 완성된 영웅담이었다). 순국선열에 대한 기념 서사는 공산정권 시기의 

희생자들을 기념함으로써 더욱 강화된 것이다. 

21 세기 중 기념의 형태—서사적 기념 활동의 시기

폴란드 내 서사를 통한 기념 활동은 

2004년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의 설립과 함께 시

작되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현대적, 멀티미디어적, 서사적 측면을 가진 문화기

관으로, 엄청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어 다양한 정치

계 집단들이 이러한 성공을 벤치마킹하는데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기념비와 

국가 주도의 공식 기념 시설이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박물관이 기억의 저장소로서

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 시기에는 기존 박물관에 대한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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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희생자 추념시설의 국제 비교

  

|   147

14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화 사업이 진행되었고 

20세기 역사와 관련된 새로운 기관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과거사 기념 체계는 더욱더 중앙집권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우익 정당인 법과정의당

이 

2005년에서 2007년까지 3년간 집권하는 동안 폴란드는 다시 공식적인 과거사 해석

에 의존하였고, 국가 주도의 역사 정책을 개발할 필요성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이루

어졌다. 더하여, 과거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 금기시되었던 집단들의 역사를 지키고 

전파하는 역할을 국가가 맡기 시작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집단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

해 과거 이들이 민족적, 종교적 상징물을 사용하여 기념 활동을 펼쳤던 전통을 승계하

였다. 동시에 지속적으로 국가 주도의 역사 정데이 실행되었는데, 그 결과로 폴란드 의

회가 통과시킨 과거사 기념 관련 결의안의 수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이 추세는 이후

에도 지속되었다). 

2007년에서 2015년까지는 진보 정당인 시민 연단이 집권하였다. 당

시 정권 또한 자체적인 역사 정책 및 “박물관 정책"을 수행하였지만, 과거 정권과는 달

리 폴란드의 과거사를 국제(유럽) 사회의 측면에서 해석하는데 그 초점을 두었다. 시

민 연단 집권기에는 폴란드 유대인 역사 박물관, 유럽 연대 센터, 제 

2차 세계대전 박물

관 등이 설립되었다. 법과정의당이 

2015년 재집권한 이후에는 영웅적/순국선열적인 역

사 정책이 다시 한번 중심에 서게 되었다. 

2016년에는 "전쟁 및 순국선열 기념위원회"

가 해산되었다. 이 위원회는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에 설립되어 새롭고 세속적인 과

거사 기념 방식을 개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오랜 기간 동안 폴란드의 과거사 기

념 환경을 형성하고, 기념비의 형상을 승인하며,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에 대한 판단 및 

여러 기념식 간 연관성을 확인하는 일을 하였다. 

1989년 정치 체계가 변화한 이후 "전

쟁 및 순국선열 기념위원회"는 과거 금기시되었던 집단들의 역사를 음지에서 끌어내어 

대중의 관심을 받도록 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이러한 집단들이 사용하였던 종교적, 민

족적 기념 형식을 사용하여 폴란드 동부 지방에 폴란드 국가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시설

들을 설립하였다. 

1998년 설립된 "국가기념연구소"가 "전쟁 및 순국선열 기념위원회"의 

역할을 넘겨받았는데, 공산정권 시기에 보안당국이 발간한 문서를 수집 및 관리하는 한

편 나치 및 공산정권의 범죄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대중에 교육하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1989년 이후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과거사 논쟁의 초점이 다른 대상으로 이동하

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폴란드 텔레비전, 주요 신문, 여론 주도 일간지 등에서 진행

된 과거사 관련 논쟁은 카틴 기념관, “동쪽의 골고타”와 같은 

1990년대에 설립된 시설

이 기념하는 독일 및 러시아 관련 과거사에 집중하기보다는 폴란드인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 폴란드-우크라이나 분쟁 등 제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와 그 주변 민족 및 국가

와의 관계에 중점을 두었다. 현재 폴란드 공식 과거사 기념 시설들은 주로 독일 및 소련

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있기는 하지만, 폴란드 국민 감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주

제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국민이었던 소수민족/타민족과 폴란드 민족 간의 분

쟁에 희생된 집단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변화하는 폴란드의 집단적 기억은 전세계적인 

기념 서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부인할 수 없는 도덕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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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i. Warsaw: Scholar, 2008.

Nijakowski Lech M. “Pamięć o II wojnie światowej a relacje Polaków z innymi naro-
dami.” In: Między codziennością a wielką historią. Druga wojna światowa w pamię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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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by Simon Lewis. Frankfurt a .M.: Peter Lang,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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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6.

Wóycicka, Zofia. Arrested Mourning. Memory of Nazi Camps in Poland, 1944-1950. 
Frankfurt am Main: Peter Lang, 2013.

Zubrzycki, Geneviève. The Crosses of Auschwitz: Nationalism and Religion in Post-
Communist Poland
.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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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훈 이사장님
(제주 4·3 평화재단)

서  승 석좌 교수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박경석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

임지현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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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   151

150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일제강제동원 한국인 희생자 추념시설 조성의 목적과 발전방향」 토론문

희생자 넋 달래고 국민 공감 받는 시설을

 

/

양조훈 이사장님

(제주 4·3 평화재단)

오일환 선생께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새로운 추모시설로 ‘걸림돌 사업’을 예시

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기억의 추모비’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추모비’란 표현에도 

공감이 간다. 다만 이 사업이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할 것인지, 만약 시행한다면 부산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중심으로 설치할 것인지, 아니면 전국으로 확산시킬 것인지 

발표자의 의견을 듣고 싶다.

엄청난 민간인 학살을 몰고 온 제주

4·3항쟁의 원 뿌리는 한반도 분단과 냉전에 있다. 

희생자는 섬 주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명에 이른다. 이 사건은 과거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 한국 군사정권에 의해 ‘공산폭동’으로 왜곡 규정된 채 철저히 억압되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

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2003년 ‘국가권력의 인권유린’이라고 규정한 진상

조사보고서가 세상에 나왔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 조사 결과를 토대로 공식 사과했고, 그 이후 희생자 및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여러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제주

4·3평화공원(395,380㎥) 조

성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공원 조성사업은 

1단계 위령과 추모시설, 2단계 기록과 기념시

설, 

3단계 승화와 교육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토론문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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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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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제주

4·3평화공원은 한때 ‘국립4·19묘지’나 ‘국립5·18묘지’처럼 국립화를 검토했으나, 

포기했다. 그 이유는 

4·3평화공원은 묘지 개념보다는 추모, 기념, 전승의 공간으로 활용

하자는 의미와 함께 그 운영을 공무원들에게 맡겼을 때, 박제화되는 것을 막자는 뜻도 

있었다. 

4·3평화공원의 운영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로부터 위탁을 받은 제주4·3평화재단이 

맡고 있다. 이로 인해 전시물 개선 등 업그레이드 작업이 용이하고, 정권의 부침에도 

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 이점이 있다. 평화공원에는 지난 한해 

45만 명이 다녀갔다.

오늘 오일환 박사의 발표 이외에도 일본, 중국, 폴란드의 과거사 추모시설과 제례방

식에 대한 귀한 발표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국내외 사례를 참고해

서 한 맺힌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한을 달래고,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받

을 수 있는 추념시설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1단계 위령과 추모시설로 세워진 것이 위령탑을 비롯해서 위패봉안실, 추념광장, 희

생자각명비, 행방불명희생자 표석, 발굴유해 봉안관 등이 있다. 위패봉안실(

488㎥)에

는 정부위원회에서 현재까지 

4·3희생자로 확정된 14,363명 중 생존희생자 107명을 제

외한 

14,256위의 위패가 마을별로 진설되어 있다.

추념광장에서는 해마다 

4월 3일 ‘4·3희생자추념식’(2014년 국가기념일 지정)이 거행

되는데, 

1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참석한다. 지난해 4·3 70주년 추념식 때는 문재인 대통

령이 참석한 가운데 

1만 5천명의 참배객이 운집해 외국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희생자각명비는 공원 중심인 위령탑 중심으로 환상도로를 끼고 설치됐다. 위패봉안

실에는 희생자의 이름만 새긴데 반해, 각명비에는 마을별로 희생자의 성명뿐만 아니라 

당시 연령, 사망일시, 장소 등이 간결하게 새겨져있다. 관람객들은 나이 

2~3세의 영아

와 칠순, 팔순 노인들이 수없이 새겨진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4·3항쟁 발발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한 행방불명 희생자가 4천명을 

넘는다. 가족의 유해를 찾아 봉분을 만든 유족과 그러지 못한 유족의 한은 달랐다. 행불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각각 희생자와 유족의 이름과 행불된 시기, 장소를 새겼다. 

그 숫자가 

3,942기에 이르고 있다. 여기엔 제주, 경인, 영남, 호남, 대전 등 행불된 지역

별로 구분되어 있다. 육지부의 행불이 많은 것은 불법적인 군사재판에 의해 타 지역 형

무소에 복역하다가 

6·25직후 처형된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해봉안관(

396㎥)은 2010년에 설치되었다. 제주공항 활주로 옆에서 발굴된 387구를 

포함해 현재까지 발굴된 

405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서울대 의료팀에 의뢰해 DNA검

사를 통해 이 가운데 

30%에 이르는 121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어 70년만에 가족과

의 만남의 행사도 가졌다. 유해 발굴과 신원확인 작업은 계속 추진 중이다.

2단계 기록과 기념시설로 추진된 대표적 사업이 4·3평화기념관(11,455㎥) 조성이

다.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꾸며진 평화기념관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전시관

으로 평가받고 있다. 

3단계 승화와 교육사업으로 어린이체험관을 포함한 평화교육센터

(

2,737㎥)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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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   155

1995년에 만든 것이다. 참으로 그 뜻이 숭고하고, 그 기원이 효험을 발휘하고 오키나
와의 평화와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의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평화의 초석이 오키나와의 평화와 일본의 평화의 실현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현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노코

의 해병군사기지 확장 건설을 강행되고 있으며,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악의 시도와 

일본의 군사화와 과거회귀는 줄기차게 진행되어 있다. 선생님의 글에는 다분히 이상주

의적이고 낙관적인 기운이 흐르고 있지만, 평화의 초석의 조성에 직접 관여한 분으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보시는지?

오키나와에는‘평화의 초석을 창설한 오키나와의 사람들에게 노벨 평화상을’실행위원

회까지 있다는 이야기에서 오키나와에서 ‘평화의 초석’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지는 충분히 침작이 간다. 그러나 

24만명을 넘는 오키나와전 사망자 중에서 강제동원

되고 비명에 가신 조선인 군부와 ‘위안부’는 수천명이라고 추산되어 있을 뿐, 제

2차대

전 끝난 후 

75년, ‘평화의 초석’이 건립된지 4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비석에 새겨진 수자

는 한국, 조선 합쳐도 

400여명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수많은 노력과 예산을 쏟고 간난 

애기까지 하나하나 이름이 밝히고 있는 오키나와·일본 사람이나 미국사람에 비해 조

선사람을 너무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시하라 선생님 스스로가 “한국·조

선의 희생자의 수는 미미한 인원수 밖에 파악이 안되어 있다. 일본정부가 조사하지 않

기에 정확한 희생자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전쟁의 희생된 한국·조선인에 대

해서는 여지껏 아무런 보상도 나와 있지 않는데 그 유골이야 얼마나 관심이 있겠나? 여

기에는 일본정부는 물론 오키나와의 행정이나 평화운동의 책임도 있는 것이 아닌지? 

그런 민간 평화운동단체인 ‘평화의 초석을 창설한 오키나와의 사람들에게 노벨평화상

을’ 실행위원회는‘헌법 

9조에 노벨평화상을’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

이는데, 외부에서 볼 때 좀 자고자대한 자기만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끝으로 그 오키나와의 운동이 ‘홍콩시민에게 노벨평화상을’운동과 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홍콩의 운동은 본질적으로는 반중국운동이지, 진정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 이번 미국 성조기와 영국의 유니온 젝을 흔들며 운동하는 시민

들이 영국의 식민지시대에 반 식민지, 민족해방을 위해 얼마나 투쟁했을까? 오히려 홍

콩에 사는 자기들은 ‘문명’세계의 주민들이고 중국은 야만인들이라는 서구중심적인 가

치관에 서 있지 않을까? 

토론문 - 2

「오키나와 전투의 전(全) 전쟁사망자 각명비・평화의 주춧돌의 의의」 

토론문

/

서  승 석좌 교수

(우석대학교 동아시아평화연구소)

이시하라 선생님은 

1995년 당시 ‘평화의 초석’ 건립위원회의 ‘각명검토위원회’의 위

원장까지 지내고 중요한 구실을 다 하셨다. 그 경험에서 하신 말씀은 귀중하다. 

적아를 넘어서 전몰자 모두의 이름을 각명한다는 것이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평화

의 초석의 특색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전몰자 기념은 아군의 전쟁공로자나 영웅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고 심지어 야스쿠니처럼 천황 개인에게 충성을 바쳐 죽은 자를 기리

기 위해서 만들어진 군 또는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한 심리전의 도고이기도 하는데, 적

아를 아울러 기록하면서, 전쟁의 비참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평화의 초석

은 특성이 있다고 하겠으며, 이시하라 교수는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우선, 전쟁의 실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점이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승

전국이나 패전국이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는 것

과 전쟁의 허무함을 알리게 된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평화의 초석처럼 가해자도 함께 

이름을 새겨야 역사의 사실을 기록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래야 전쟁의 원인을 해명하

고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평화를 희구한 마음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

이다. 더욱이 전몰한 모든 자들의 이름을 새기면 ‘전쟁희생자의 추상적인 숫자가 구체

적인 인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고’, 사람에 따라서는 전쟁터에 겹겹이 싸인 시체, 유골로 

보일 것이다. 따라서 ‘평화의 초석’이 발신하는 미시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

과 분쟁을 부정하는 보편성·사상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평화의 초석은 혁신파 오오타지사가 서로 싸운 자들이 원한을 넘어서 쓰

라린 전쟁의 교훈을 되새겨 죽은 자들에 대한 진혼을 평화로의 염원으로 승화시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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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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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3) 남경대학살기념관(이하 ‘기념관’으로 줄임)을 건립하게 된 계기는 주지하듯이 

1982년에 있었던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이다. 이를 계기로 ‘中國人民抗日戰爭紀念館’ 
등이 건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독립기념관이 설립되었다. 

1982년의 사건은 

동아시아에서 역사문제가 부각된 중대한 계기였다. 그렇다면 기념관이 

1995년, 2007

년 등 계속 확장해 재개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또한 기념관 건립의 재원은 어디에

서 왔나? 기념관을 설계할 때 외국의 기존 기념관을 참고했나? 현재 기념관 전시에 어

떤 문제점, 개선해야 할 사항, 과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4) 남경대학살에 대한 연구와 관련해, 생존자의 증언 등 구술 자료는 많이 축적되어 

있나? 현재 살아있는 생존자가 얼마나 있나? 일본의 우익세력은 남경대학살을 부정하

고 있는데, 이를 

再考의 여지없이 가장 확실하게 반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무엇인가?

5) 1994년 江蘇 및 南京에서 城祭를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城祭에서 國祭로 전

환된 계기, 이유는 무엇인가? 남경대학살 이외에 또 다른 

國祭가 있나?

6) 역사문제에 대한 각국 기념관의 전시와 관련해, 전시 내러티브에 정치·사회적 

요구가 지나치게 반영되어 ‘정치 과잉’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문제를 해소

하기 위해서는 역사기억의 다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자기가 

가해자인 사건에 대한 기념물을 건립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국에 스스로가 가해자인 경우를 기억하는 사례가 있는가?

7) 마지막에 지적하신 ‘역사와 평화’라는 주제의 확립, 이를 위한 국제적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 한국의 정치지도자가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한국과의 교류, 협력은 어떠한 상황인가?

「남경대학살 기념 시설과 사학연구 및 국가공식제례」 토론문

/

박경석 교수

(연세대학교 사학과)

동아시아에서 역사 갈등의 문제는 전문적인 역사가의 역사해석에 있지 않고, 대중의 

역사기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역사 자체만을 다루어서는 역사 갈등의 문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 갈등의 문제를 역사기억의 문제로 환원시켜 총체적으로 다룰 필

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학계는 일찍부터 ‘기억의 터(

lieux de mémoire)’에 대한 

서술을 비롯해 역사기억의 문제를 활발하게 다루어 왔다. 

역사기억은 다양한 ‘매개물과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되고 작동된다. 역사 교과서, 역사 

도서, 역사 교육, 각종 유무형의 기념물, 대중매체 등등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기

념관은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기억의 장소’로서 역사기억의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하다. 

발표자는 남경대학살에 대한 기념관, 역사연구, 국가의 공식제사(

国家公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많은 공부가 되었다. 사실 토론자는 중국현대사에 오랫동안 관

심을 가져왔지만 남경대학살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적은 없다. 그래서 전문적인 토론을 

하기는 어려운데, 일반적인 연구자의 수준에서 몇 가지 질문을 드려 발표자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1) 남경대학살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

은 듯하다. 

1937년 12월이라는 시점에서 일본은 왜, 어떤 의도로 놀라운 만행을 저질

렀나?

2) 사실 남경대학살은 중국현대사에서 지울 수 없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진작부터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왜 

1982년이라는 시점

까지 거의 방치되었는가? 

토론문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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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   2019년도 하반기 국제학술대회

memo

「제2차 세계대전 시기 강제동원 된 폴란드인 희생자 실태와 

추념시설의 세계사적 의의」 토론문

/

임지현 교수

(서강대학교 사학과)

토론문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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