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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지은이  장윤만 
옮긴이  장현자, 김준식     
감   수  반병률

발 간 등 록 번 호

11-B553448-000009-01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총서  1  수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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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지은이  장윤만 
옮긴이  장현자, 김준식     
감   수  반병률

발 간 등 록 번 호

11-B553448-000009-01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총서  1  수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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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초판 1쇄 인쇄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옮긴이

감   수

발행인
발행처

 

간행물발간등록번호

디자인·편집

2019년 12월 13일
2019년 12월 16일

장윤만
장현자, 김준식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김용덕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길 42 이마빌딩 603
ht p://www.ilje.or.kr

11-B553448-000006-01

21세기교육사(디자인21)

이 책에 실린 내용의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모든 저작권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과 유족에게 있으며,
활용 시 재단과 유족 측으로의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총서  1  수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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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故장윤만님의

구술 및 관계 기록들을 동생인 장재달님이 등서(謄書)하여 엮은

『대동아전쟁 실기집(大東亞戰爭 實記集)』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해당 사료를 故장윤만님의 유족 장현자, 김준식님이 옮겨주셨고,

이를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반병률 교수님께서 해제·감수하시어

태평양전쟁 실기집(太平洋戰爭 實記集)』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부 어휘나 단어 · 내용 등은 오늘날의 말로 풀어쓰되,

원문 자체를 살리기 위하여

이해가 가능한 선에선 일부 1940년대 당시의 문체와 경상도 방언 등은

그대로 수록하였습니다.

원본 사료는 별도 <부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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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발간사

재단법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2004

년부터 2015년까지 활동한 ‘대일항쟁기강제동원
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위
원회)의 사업을 승계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재
단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을 위한 추
모 및 지원 사업, 강제동원 피해와 관련한 학술연
구·조사 및 문화사업,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의 운영 등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중 ‘위원회’ 해산 이후 중단되었던 책자 
번역·발간 사업을 금년부터 일제 강제동원 출판 사업으로 확대·개편하여 
간행하게 되었음에 감사와 기쁨의 인사를 드립니다.

올해 우리 재단에서 일제 강제동원 출판 사업으로 발간하는 책자는 총 5

종으로, ‘위원회’ 당시 일본 내 여러 시민단체들과 관련 연구자 및 개인들로
부터 도움을 받아 번역 된 ‘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2종(일본어판) 및 구술
기록집 2종(일본어판), 그리고 금년 우리 재단이 관계 유족으로부터 원본 기
록을 기증 받아 검토·감수 후 출간하게 된 강제동원 수기집 1종(한국어판)
이 바로 그 것입니다.

발간되는 ‘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2종은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진상

조사(

朝鮮人BC級戦犯に対する真相調査)』 및 『하와이 포로수용소 한인

포로에 관한 조사(

ハワイ捕虜収容所における韓人捕虜に関する調査)』이

며, 구술기록집 2종은 『똑딱선 타고 오다가 바다귀신 될 뻔 했네(

ポンポン

船に乗って帰る途中、海の幽霊になるところだったよ)』 및 『조선이라는 
우리나라가 있었구나(

朝鮮という私たちの国があったのだ)』입니다. 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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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07

동원 수기집 1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 된 후 일본 오키나와(

沖縄) 인근 

자마미섬(座間味島)에서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셨다가 귀환하신 故 장윤만
님의 이야기를 동생 장재달 님이 필사한 원본 기록 ‘대동아전쟁 실기집(大
東亞戰爭 實記集)’을 유족 장현자님으로 부터 전달 받아 『태평양전쟁 실기
집(太平洋戰爭 實記集)』으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사업을 우리 재단이 재개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

신 한국과 일본의 여러 발간위원 및 감수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본 
사업이 ‘위원회’ 당시 출간된 주요 서적의 번역·발간을 넘어서 일제 강제동
원 전반에 대한 출판 사업으로 보다 더 확대되고 그 뜻을 계속해 이어나갈 
수 있도록 물꼬를 열어 주신 故 장윤만님의 유족 장현자님께도 감사의 인
사를 드립니다.

우리 재단은 2019년을 시작으로 중단되었던 ‘위원회’ 발간 책자의 번역 사

업을 재개함과 동시에 일제 강제동원 전반에 대한 다양한 학술자료 및 교육

자료 발간 등을 앞으로도 이어나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도움을 요청 드리며, 이번에 발간되는 책자들이 강제동
원 분야에서 미약하나마 작은 디딤돌이 되어 국내외 많은 연구진들과 일반 
시민들에게 진실과 기억의 역사로서 그 몫을 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12월 16일

재단법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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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태평양전쟁 실기집(太平洋戰爭 實記集)』을 옮기며…

                                      

나는 최근에 일제의 강제동원에 끌려가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최악의 

삶을 살면서 쓰신 우리 아버지의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을 
다시 꺼내 읽었다.  아버지의 실기집을 읽는 내내 일제하에서 수많은 조선인
들이 겪었던 비참했던 과거사의 당사자가 바로 내 아버지였다는 생각을 하
면서 가슴이 메여 왔다.   

강제동원이란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1937년 이후 아시

아, 태평양 지역 점령지에서 사람과 자원을 강제로 동원한 것을 말한다.  강
제동원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 사람들은 군인, 군무원(군부), 성노예자(위
안부),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에서 노무자로 일하다가 전쟁 후 극히 소수만 
살아 돌아오고 나머지는 거의 피살되거나 사망하였다.      

몇 달 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 몇 분이 우리 집에 찾아 오셔서 인터뷰

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 경험과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던 몇 점의 그 시절 생
활용품들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학예사들에게 내가 반도상사 노동조
합 이야기를 중심으로 쓴 ‘그때 우리들은’ 이란 책을 한권 주었다. 학예사들
은 책을 살펴보다가 책 앞부분에 나오는 내 개인 이야기 중에 아버지의 ‘대
동아전쟁실기집(大東亞戰爭實記集)’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서는 그 기록은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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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09

일제 강제동원 되어 끌려갔던 당사자가 직접 쓴 내용이라 너무나 중요하고 
귀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 나는 내 책상 서랍에 보관 중이던 아버지의 징용일기를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아버지의 징용일기는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있는 옛날 구어체
이고 또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연서(連書)이기에 지금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 징용일기를 나는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거의 이해하게 되었고, 읽으

면서 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겪으셨던 참혹한 고생을 상상하고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그래서 나는 이 징용일기를 우리 
가족들과 친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현대말로 해석
하면서 필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필사를 해서 한글워드로 쳐놓고 보니 
한결 이해하기 쉬워졌다. 그러나 가능하면 아버지가 쓰셨던 그때 심정과 말
투와 감정을 살리려다보니 현대 문법과 맞춤법대로는 고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해방 후 귀국하신 후에도 강제동원의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워

계시다 내가 11살 때 끝내 돌아가셨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강제동원으로 끌려가신 이야기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해 주셨던 
전쟁터에서 살아 나오신 기적 같은 이야기들을 수차례 들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만 나시

면 아버지의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을 읽으시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곤 했다. 나는 어렸을 때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것 같다.  당시 꽃다운 새댁이었든 어머니는 강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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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원으로 끌려가신 아버지가 얼마나 그리우셨을까?  그리고 해방 후 오매불망 
기다리던 낭군이 몸이 만신창이 되어서 돌아왔을 때 그 심정을 어땠을까? 그
리고 오자마자 병석에서 누워 계시다가 결국 돌아가시는 낭군을 보면서 얼
마나 가슴이 메셨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면 지금 나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머니의 이야기 내용1)

우리 아버지가 강제동원 되어 끌려가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쯤이

었고 아버지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고향이었던 경북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에서 세 남매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느 날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갑
자기 동네 청년들과 함께 일본 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셨다. 아버지는 그때
부터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 매일 일어난 일들을 꼼꼼히 일기처럼 적기 시작
하셨다. 그렇게 써내려간 아버지의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속
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함께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억울한 고생 
이야기, 전쟁터의 처참했던 상황, 왜놈들과 왜병들의 천인공로 할 만행 등이 
생동감 있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자식들과 형제들이 왜 끌려갔는지, 어디

로 끌려갔는지, 가서 뭘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자식과 형제들을 
잃어버린 동네사람들은 끌려간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
으니  할 수 없이 끌려간 날을 기일로 정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도 매년 아버지가 끌려간 날에 아버지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면

서도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는 혹시 살아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매

 1) 어머니의 회상 가운데 아버지가 강제동원되었다고 기억한 ‘1942년쯤’은 '1944년'으로, '유엔군 

부대'는 '미군부대'로 하는 것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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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11

일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아버지가 돌아온 날까지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의 글 내용에 나와 있는 것처럼 왜병들은 미군의 히로시마 원

폭투하로 일본 천황이 항복을 하였을 당시까지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을 땅굴 속에 가두어 놓고 여러 날 굶기다가 막판에는 모두 총으로 쏴 
죽이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 비참한 총살 현장에서 아버지는 다행히 총알을 
빗맞고 기절하여 있었는데 의식이 돌아와 눈을 떠보니 굴속에는 조선청년들
의 시체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바깥이 조용해져 밤에 아버지는 굴속을 빠져
나와 무조건 산으로 도망쳤다. 그 후 아버지는 산에서 몇 달간을 나무뿌리와 
나무 열매를 따먹으면서 짐승처럼 야생으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엔군이 산속 수색을 하다가 아버지를 발견하고 처음에

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 할 수 없어 총을 겨누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아
버지는 무조건 손을 들고 걸어 나왔고, 그 수색 병사가 아버지를 데리고 유
엔군 부대에 돌아가 목욕도 시키고 수염도 깎아주고 옷도 새 옷으로 갈아입
힌 후에야 아버지는 사람 모습으로 돌아 왔다. 아버지는 유엔군 부대에서 몇 
개월을 지내다가 마침내 고국으로 오는 배를 탈 수 있었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 

그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돌아오니 너무

나 좋아서 집에서 기르던 소 한 마리를 잡아 온 동네사람들을 초청해서 큰 
잔치를 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는 유엔군 부대에서 몇 달을 편
하게 지내시다 오셔서 얼굴은 조금은 좋아진 상태였다. 아버지는 꿈에도 그
리던 고향과 가족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돌아오자마자 슬하에 7살, 3살 난 
두 남매를 홍역으로 모두 잃고 말았다. 강제동원 중에도 동료들에게 고향에
서 자라고 있을 두 남매 자랑을 하면서 모진 고생을 이겨냈는데 막상 돌아와
서 두 남매를 잃어버린 후 아버지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가 아직 젊으니 아이 셋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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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낳겠다고 위로하셨다. 그 후 약속대로 어머니는 정말 아들 한명 딸 둘을 더 낳
으셨다. 나는 그 때 두 번째로 태어난 딸이고 우리 삼 남매는 건강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신 후에도 전쟁터에서 너무 굶주리고 고생을 한 후

유증으로 늘 건강이 안 좋으셨다. 어린 시절 나의 기억에는 아버지가 언제나 
편찮으셨고, 배를 웅크리고 누워계시는 모습만 남아있다. 그러던 아버지는 
45세가 되던 해에 결국 위장병으로 돌아가셨다. 난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
었다. 내 아래 여동생은 1학년이었고 오빠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내가 어렸
을 때 아버지는 늘 병석에 누워 계셨기에 나는 아버지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는 그 참담했던 징용기간 중에도 후줄근한 종이 두루마리에다 당신

이 매일 매일 겪고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그 내용에는 자신
의 이야기와 함께 같이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그리고 돌
아 오셔서는 그 낡은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우리 작은 아버지의 붓글씨로 
한지에다가 필사를 하여 조그만 책으로 엮어 만드셨다. 그 책자가 바로 아버
지의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이다.   

나는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일기를 써 가지고 나오셨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
버지는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기
적같이 살아 돌아 오셔서 우리 삼남매를 낳아 주시고 키워주신 데 대해 참으
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는 아버지가 그 혹독하고 참혹한 전쟁터에서 살아나시고 기적같이 살아 

돌아오실 수 있었던 힘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우선이겠지만 또 하나의 동기
는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 당한 조선 청년들이 일제에게 얼마나 비참하게 혹
사당했고 어떻게 비참하게 죽어갔는지를 만천하게 알려야겠다는 아버지의 
신념이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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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13

이제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오빠마저 돌아가신 후이지만 나라

도 아버지의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을 발간하여 일제 36년 
동안 일제가 우리 청년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다. 때마침 
금년은 3.1운동 100 주년기념 해다.

내가 철이 없어 이제야 책상 한편에 꽂아 두었던 아버지의 ‘태평양전쟁실

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을 꺼내 다시 정리하게 되니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마냥 죄송스럽다.  끝으로 아버지의 실기집을 필사하여 소책자로 엮어주신 
작은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필사본을 다시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남편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2019년 12월 13일

 유족

 장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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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감수자의 말

『태평양전쟁 실기집(太平洋戰爭 實記集)』을 감수하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발간하는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

戰爭實記集)』은 강제동원 피해자 본인이 일본군 소속의 군부(軍夫, 軍屬)으
로서 겪었던 경험을 손수 작성한 기록으로서 학술, 교육, 문화, 예술 등 여러 
측면에서 잠재적 활용가치를 갖고 있는 매우 독보적인 1차 자료라고 판단
됩니다.

강제동원 피해자인 故장윤만(1917-1963)은 1944년 6월 10일에 징발되어 7

월 12일 일본군 경성사단사령부에 소속되었고, 이어 일본 오키나와섬 서쪽
에 위치한 ‘아카시마(阿嘉島)’에 주재했던 특설수상근무부대 제103중대 구
(球)제88866부대의 군부로 배속되었습니다. 전쟁말기 아카도(阿嘉島, 일본
식 발음 아카시마) 북쪽으로 이동한 故장윤만은 자미미도(座間味島, 일본
식 발음 자마미지마)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되
었던 수많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중 한 사람입니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미군과 일본군 간의 ‘오키나와전투’(1945

년 4월 1일∼6월 23일) 말기에 자마미섬에서 미군에 의해서 1945년 6월 8일에 
체포되어 오키나와섬에 위치한 제1포로수용소로 압송된(1945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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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15

故장윤만은 이후 약 5개월 후인 1946년 2월 18일자로 미군 당국의 결정으로 
국내로 송환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9개월만인 1946년 11월 20일에 
거주지(경상북도 상주 공성면 우하리)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피해 당사자는 군속으로 징발되는 1944년 6월 10일 이후 전쟁 막바지 미

군의 포로가 되기 직전까지에 이동과정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들을 휴대하
고 있던 두루마기에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다가 귀환 후 동생인 장재달에게
정서케 하여 1948년 2월 4일자로 『대동아전쟁실기집(大東亞戰爭實記集)』이
라는 제호의 체험기를 남겼으며, 해당 수기집을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
단에서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출판 사업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된 본 

『태평양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은 다음과 같은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첫째, 강제동원피해자 故장윤만이 거주지인 공성면의 면사무소에 집결한 

이후 상주군-대구-부산-일본항(불명)을 거쳐 군속으로 복무했던 아카도
(阿嘉島)와 마지막으로 자마미섬에서 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되기 직전까지
의 전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매우 희귀한 자료로 판단됩니다.

둘째, 징발과정에서 거주지로부터 강제노역의 현지로 수송되는 과정에 대

한 묘사에서, 소요기간, 목격하고 경험한 한인, 일본인 말단행정 관리들과 
군인들의 말과 행위, 노예선을 방불케하는 수송선에 의한 이송과정, 군속으
로 동원되어 복무지인 아카도에서의 비인간적인 강제노역 등 강제동원피해
의 명백하고 구체적인 사례로서의 역사적 가치 또한 있다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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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셋째, 일본인 관리들과 일본군이 피해자들에게 자행했던 야만적이며 비

인간적인 대우와 잔혹한 만행과 학살행위 등과 그에 따라 피해자들이 겪
어야만 했던 기아와 질병, 야만적이며 비인간적인 학대와 살육 과정 등 일
제강제동원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기록입
니다.

넷째, 전쟁 말기 오키나와 점령에 앞서 전개된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과 상

륙후 전투활동, 이에 대한 일본군의 처절하고 절박한 대응 양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자료는 전선 현장을 목격했던 인물의 기록으
로서 이태평양전쟁의 연구의 좋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판단됩
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기 위한 자살특공선(배)의 준비와 
자살특공계획, 한국인 군속들의 투항을 방지하기 위한 감시와 감금, 만행, 
학대, 살육 등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식민지 조선의 한 평범한 농민이 겪은 바 일본식민통치의 실상을 

절절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자료는 문헌기록들을 많이 남긴 
지식인이나 엘리트의 시각이 아닌 평민 또는 민중의 인식이나 입장을 알 수 
있는 독특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마지막에 수록된 <만화사우곡>은 강제동원피해자인 저자가 함

께 갔다가 죽은 동료에게 쓴 글의 형식을 빌어 떠나 온 고국산천을 그리워
하는 자신의 심정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점에서 특별한 문학적 가치가 있
다고 판단됩니다.

일곱번째, 강제동원 피해자가 남긴 생생한 자료로서 국민들에게 전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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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17

출간을 통해서 일제 식민통치와 강제동원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나 소설 등의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영화, 그림 등 문
화 예술의 소재로서의 잠재적인 활용가치가 높다고 판단됩니다.

원본 사료인 『대동아전쟁실기집(大東亞戰爭實記集)』을 『태평양전쟁실기

집(太平洋戰爭實記集)』으로 출간하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일부 
어휘나 단어, 내용 등은 풀어썼습니다. 그러나 원문 자체를 살리기 위하여 
이해가 가능한 선에서 일부 1940년대 당시의 문체와 경상도 방언 등은 그대
로 수록하였습니다. 이에 조금만 유의하여 읽으신다면 크게 이해가 되지 않
는 부분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본 강제동원 피해자 수기집 발간을 통해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동원되어 

고초를 겪으신 강제동원 피해자의 삶이 재조명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12월 13일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반 병 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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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목차

발간사  ………………………………………………………04

옮긴이의 말 
『태평양전쟁 실기집(太平洋戰爭 實記集)』을 옮기며… … 06

감수자의 말 
『태평양전쟁 실기집(太平洋戰爭 實記集)』을 감수하며… 12

故장윤만님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참고설명 …………… 18

왜정시대 징용거귀 고생기 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太平洋戰爭 實記集 / 29

우리나라 조선 청년 부모 슬하를 떠날 적에  …………… 31
연락선은 수 시간에 일본 땅에 들어서서 ………………… 39
부산서 떠난 지 13일 만에 섬에 당도하다  ……………… 42
저 공중에 뜬 비행기는 미국 비행기가 분명하다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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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19

섬 이름을 물어보니 ‘아끼도(아카도; 阿嘉島)’라 
하옵니다  …………………………………………………… 52
폭탄과 총알이 5, 6월 소낙비 오듯 하는데 ……………… 55
총알이 비 오듯 하는데  …………………………………… 58
밥이라도 먹었으면 여한이라도 없지만은  ……………… 61
유혈이 낭자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 62
너희들은 오늘 총으로 죽일 것이니 ……………………… 66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 69
만화사우곡  ………………………………………………… 72

부록 / 77

수기집 원문 ………………………………………………… 79
故장윤만 강제동원 명부, 사료류 ………………………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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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과 오키나와忠勝 전투는…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 말기, 

이오지마(硫黃島)와 더불어, 일본 본토에 속하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서 매
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사이판 전투와 마찬가지로 전투원 외에 지역 주
민들까지 전투에 끌어 들이고 마지막에는 일본측이 ‘옥쇄(玉碎)’라 미화하는 ‘자
살과 전멸’이 유도된 대표적인 지역의 하나이다. 따라서 동원된 조선인의 피해
와 희생은 물론 규모와 내용면에서 볼 때 일제의 잔혹성과 인권 유린이 극명하
게 드러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오키나와 현지 주민에 대한 일제와 군인의 
기만과 학대, 가족 간 살해, 자폭 강요, 자결 강요 등의 만행은 오늘날까지 일본 

故장윤만님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참고설명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故장윤만님의 강제동원지 
현장과 직결된 연구 자료를 덧붙입니다.

본 자료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2018년 

일제 강제동원 진상조사 연구사업으로 진행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 (책임연구원: 군산
대학교 김민영 교수)로, 오키나와 전투 및 故장윤만님 
강제동원지 추정 지역과 관련된 일부 내용을 발췌·정리
하였습니다.

* 본 보고서에서 ‘섬’을 뜻하는 ‘도(島)’는 일본 발음으로 ‘시마’ 또는 ‘지마’로 발음되고 있습니다.
   [예] 아카도(阿嘉島) = 아카섬 = 아카시마, 자마미도(座間味島) = 자마미섬 = 자마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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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21

<그림 1> 오키나와 개요도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 주고 있으며 여전히 사회 문제로 회자되고 있다.

<그림 1>에서 보듯이 오키나와는 본섬과 그 주변 섬인 미야코제도, 야에야마

제도, 다이토제도, 게라마제도 등 넓은 해역을 아우르고 있다.

일제는 전쟁 말기 태평양 도서 지역으로부터 퇴각하는 부대에 배치되었던 조

선인뿐만 아니라 일본 본토로 동원했던 조선인, 그리고 한반도에서 「軍屬·準
軍屬」, 「軍夫」, ‘일본군 위안부’ 등 다이토제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오키나와 
지역에 동원하여 배치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강제노동뿐만 아니라 치열한 
전투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특히 게라마(慶良間)제도의 경우에는 수 천여 명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고 

알려진다. 이들은 방어진지와 방공호 구축, 굴파기, 탄약·식량·어뢰정·폭뢰 
등의 운반과 설치는 물론이고, 연합군의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목숨을 건 작
업을 강요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일제는 조선인들이 ‘식량을 훔쳤다’, ‘탈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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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시도했다’는 이유 등을 들어 본보기로 삼기 위해 이들을 무참히 공개적으로 학
살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오키나와 지역에 강제동원된 조선인은 약 ‘1만 명’ 내외로 추산되는

데, 정확한 동원 규모와 희생자 수에 관해서는 197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의 민
간단체 및 연구자, 오키나와 지자체 등에 의한 부분적인 조사만 이루어졌을 뿐1), 
한국 또는 일본 정부의 전면적인 공식 조사는 과제로 남아 있다.

오키나와를 구성하는 주변 섬 게라마제도慶良間列島는…
게라마제도(慶良間列島)에는 경상북도 대구 일대에서 동원된 조선인 약 ‘6,000

명’이 특설수상근무대에 배치되었다. 각 중대에는 약 ‘1500’명이 배속되었다.

자마미지마(座間味島)에는 특설수상근무대 제103중대원이 배치되었는데 조

선인 군부는 특공정을 위한 굴 파기, 진지구축, 탄약과 식량 운반에 투입되었
다. 미군 상륙 후 조선인들은 부대에서 방출되자 식량을 조달하고자 바닷가로 
이동하던 중 사살되었다. 

아카시마(阿嘉島)·게루마지마(慶留間島)에는 제103중대 중 일부 소대가 

배치되었다. 이곳의 조선인들은 부산이나 오사카에서 동원된 자들로서 이들

 1) 대표적으로 1972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在日本朝鮮人総連合会)가 제2차세계대전시오키나

와조선인강제연행학살진상조사단(第二次大戦時沖縄朝鮮人強制連行虐殺真相調査団)을 결

성하여, 그해 8월부터 9월까지 약 3주간에 걸쳐 ‘오키나와 지역 조선인 학대, 학살 실태 진상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단은 결과물로서 「第二次大戦時沖縄朝鮮人強制連行虐殺真相調

査団報告書」를 발간하였다. 이후 일본인 연구자의 조사보고서와 연구서가 다수 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일찍이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에 강제동원되었던 피해자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권병학, 『게라마열도』 천마문고 3, 영남대출판부, 1982년)가 발간된 바 있고, 이후 조선인 강
제동원과 학살,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국내외 연구자들의 논문 등이 약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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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23

은 야영을 하거나 임시주택에 들게 하였다. 이들은 일본병사는 물론이고 현
지 오키나와인 방위대원보다 더 적은 1일 반홉에 불과한 식량을 지급받았
다. 1945년 3월 약 20명가량의 조선인이 탈출한 뒤로 일본군은 조선인에 대
한 감시를 강화하고자 참호를 파게 하고, 그 안에 20~30명씩 들어가도록 하
여 사실상 감금하였다. 그리고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을 시범케이스로 삼아 
사살하였다. 

게라마 지역의 주요 섬은 자마미지마(座間味島), 아카시마(阿嘉島), 게루마

지마(慶留間島), 도카시키지마(波嘉敷島)로 이루어져 있다(<그림 10> 참조). 
이 곳은 오키나와 본섬의 서쪽 바로 앞에 위치하기 때문에 본섬을 수비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본섬을 공략하기 위해 미군이 반드시 점령해야만 하는 요충
지이다. 따라서 이곳의 해상정진기지 등에는 조선인 군속들이 대거 배치되어 
있었다.

<그림 2> 게라마 지역의 전투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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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특설수상근무 제101중대, 제102중대, 제103중대, 제104중대의 4개 중대 인원 

중 약 절반 정도가 게라마에 배치되었다2).

게라마에 집중 배치한 이유는 1944년 9월 오키나와 수비군인 제32군은 미군의 

주 상륙 지점을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서해안으로 예상했다. 이에 일본군은 상
륙하는 미 상륙선단을 배후에서 기습한다는 목표 아래 해상정진전대(海上挺進
戰隊)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약 300척의 자살특공정(自殺特攻艇)을 게라마의 
해안가에 집중 배치하였다.(해상정진대 제1, 2, 3전대 및 해상정진기지 제1, 2, 3대
대) 따라서 이들 특공정을 은닉할 엄폐호와 땅굴 등을 구축하는 데 많은 노동력

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게라마에 수많은 조선인 군부가 투입된 것이다.

 2) 제32군 고급참모 작전주임 야하라 히로미치(八原博道)의 증언. 보고서에는 야하라가 특설

수상근무대 4개 중대 인원을 6천명으로 보았고 이 중 절반인 약 3000명이 게라마에 배치되
었다고 했는데, 이 숫자는 이후 검증과정에서 오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4개 중대 총 인원
은 3,000명을 넘지 않는다. 

第二次大戰時沖縄朝鮮人强制連行虐殺眞相調査団,「第二次

大戰時沖縄朝鮮人强制連行虐殺眞相調査団調査報告書」, 1972,(이하에서는 ‘「調査報告

書」 (1972)’로 표기한다.)

<그림 3> 게라마의 자마미지마(座間味島)에 상륙하는 미군

(HyperWar: US Army in WWI: Okinawa: The Last Bat le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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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25

장윤만님이 미군 포로로 연행된 자마미지마(座間味島)는…

1945년 2월 중순 오키나와 본섬에서 특설수상근무 제103중대 제2소대, 제3소

대(1분대 결) 약 300명이 입도했다.

조선인 군부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특공정 엄폐호 파기, 지지대용 

나무 벌목, 진지 구축, 탄약창고 건설, 탄약과 식량 운반 및 하역을 강제당했다.

식사는 반합 한 개 분량의 식량을 하루동안 3명이 나누어 먹어야 했다.

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1시간에 걸쳐 바닷가 엄폐호까지 날라야 했다. 엄폐호 

파기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사고와 낙반 사고로 죽은 사람도 있었다3).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쫓아냈다. 식량도 없이 갈 곳도 없이 

방황하던 조선인들은 바닷가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미군에 사살당했다4).

일본군이 직접 조선인군부를 칼로 학살하기도 했다. 당시 방위대의 한 젊은

이가 일본군 한 명이 조선인 한 명을 칼로 베어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
다. 그밖에 일본군이 밤중에 조선인 군부를 죽여서 땅에 묻었다는 소문도 있었
다5). 

전쟁이 끝나고 5~6년 지났을 무렵 ‘자마미(座間味)초등학교’공사 현장에서 

백골 2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전쟁 중 조선인 군부들이 있었던 곳인
데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또한 미군 상륙 후에는 미군의 시체매장지였는데 조
선인 군부가 동원되었다. 미군이 철수할 때 미군 시신은 일일이 수습해 돌아갔
기 때문에 발견된 백골은 미군의 유해일 리 없다6). 

 3) 宮城初枝 등 현지 주민의 증언. 「調査報告書」 (1972), 23쪽.
 4) 高良, 島袋의 증언. 「調査報告書」(1972), 23쪽.
 5) 「調査報告書」(1972), 23쪽.
 6) 宮里(교사)의 증언. 「調査報告書」(197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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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장윤만님의 강제동원지로 추정되는 

‘아끼도(아카섬, 阿嘉島; 일본어 발음 아카시마)’와 
인근 게루마섬(慶留間島, 게루마지마)은…
특설수상근무 제103중대 2소대, 3소대 약 350명이 이곳에 집중 배치되었다. 

그밖에 정비중대에도 부산과 오사카에서 동원된 조선인들이 상당 수 배치되어 
있었다. 

1945년 3월 26일 조선인 군부 20명 정도가 탈출했다. 이 중에는 일본군 장교

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일부러 미군에 포로가 되어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군은 남은 조선인 군부들을 굴에 감금하고 음식도 주지 않은 채 끝
내 잔인하게 학살했다.

도주 사건 직후 일본군은 조선인 군부들에게 본부 아래에서부터 나카가와다

이(中川台)의 중간 지점에 깊이 2미터, 길이 5미터 정도의 구덩이 2개를 파게 했
다.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대피호라면서 들어가라고 명령한 다음, ‘이제 쓸모가 
없다’, ‘밥버러지’, ‘이적행위를 할 우려가 있다’면서 독설을 퍼부었다. 구덩이에는 
각각 20~30명씩 약 50명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루에 통조림 한 개 분량의 죽만 
주었다. 구덩이는 방위대 대원이 착검을 한 채 보초를 서면서 조선인들이 밖으
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하루에 두 차례 용변을 볼 때만 사다리를 내려 한 사람
씩 올라오게 했다7).

4월이 되자 조선인 7명이 산으로 도망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남은 조

선인 군부들 약 30~40명은 좁은 동굴 속에 갇혔다. 이 가운데 적어도 12명 이상
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8).

 7) 「調査報告書」(1972), 27쪽.
 8) 한승동, ‘르포, 오키나와의 비극, 그리고 조선인 성노예’ <한겨레>, 201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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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27

도주했다는 이유로 학살
이런 가운데 하루는 22세의 조선인 군부가 도망쳤다. 방위대원과 필사적으

로 싸우는 도중에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에게 끌려 간 다음 노다(野田) 
대장이 목검으로 때려서 초주검이 되었다. 다음 날 바닷가(阿護ノ浜)에서 처형
했다9). 그는 ‘앞으로 어떠한 악전고투가 있더라도 군인군속으로서 규율을 어지
럽히는 자는 단호하게 처단할 방침’이라고 선언했다10).

다른 기록에 따르면, 아카시마(阿嘉島)에서 도망에 실패한 조선인 12명을 총

살한 사례도 있다. 총살 장면을 목격한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도망에 실패
한 12명은 총살되기 직전에 쌀밥 한 공기씩을 받아들자 그동안 굶주렸던 탓인지 
죽기 전에 배불리 먹겠다는 것인지 하여튼 정신없이 밥을 퍼먹고는 자신의 키 길

이만큼의 구덩이를 파야 했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 서면 일본군이 총을 쏘아 자
기가 판 구덩이로 굴러 떨어졌다. 일본군이 흙을 부어 덮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
람의 경우 덮은 흙이 움직이면 일본도로 몇 차례나 찔러서 죽였다고 한다11).

자살특공정 운반 중 전사
자마미지마(座間味島)와 아카시마(阿嘉島)에 배치된 조선인 군부들은 3월 24

일부터 자살특공보트인 신요(振洋)호 약 300척을 바닷 속에 띄우거나 엄폐호로 
다시 수납하는 작업에 동원되었다. 야심한 시각에 엄폐호에 숨겨 둔 신요호를 
조선인들이 밀고 당겨서 바닷물이 사람 어깨와 목 높이까지 차오르는 거리까지 
운반한 다음 특공대원이 조종석에 앉힌 다음 미군 함정으로 돌진하는 것이다. 

 9) 垣花의 증언. 「調査報告書」(1972), 27-28쪽.
10) 「調査報告書」(1972), 29쪽.
11) 

沖縄県教育委員会 編.『沖縄県史 第7巻(各論編 6移民)』. 沖縄県教育委員会.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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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물때와 작전 상황에 따라 출격했다가 다시 철수해서 엄폐호까지 신요호를 다
시 끌고 오기를 반복했다. 

노다(野田) 대장이 조선인 군부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3월 26일에서 27일 사이 

자살특공보트 운반을 위해 조선인 군부 100여 명이 동원되었다. 밤중에 특공보
트를 엄폐호에서 꺼내 바다에 띄워 미군 함대에 충돌시켜 자폭시키는 작전이었
다. 이 과정에서 미군의 조명탄에 발각되거나 공격을 받아 수많은 조선인들이 
사망했다12). 

또한 새벽 무렵 신요호를 다시 엄폐호에 격납하는 과정에서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한 사례도 있다. 자마미지마(座間味島)에서 25일 아침 무렵 미
군의 함재기 공습에 의해 자살폭탄을 실은 신요호가 폭발하는 바람에 작업 중
이던 조선인 군부 5~6명이 피를 토하며 수몰되었다13).

자살, 자결 강요
일부 일본군 장교는 전투 중 조선인들이 자살했다고 회고했는데, 이는 사실

상 자살을 강요했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 몬 것을 은폐하려는 것으
로 추정된다. 후사와(フサワ) 중위는 미군이 상륙하자 조선인 군부 10~20명이 
‘자살’했다고 증언했다14). 그러나 강제로 끌려 와 온갖 멸시와 중노동에 시달리
며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텨 온 조선인 군부들이 
미군을 보고 자살했다는 명백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신빙성이 

12) 垣花, 照喜의 증언. 「調査報告書」(1972), 28쪽.
13) 권병탁, 『게라마열도』 천마문고 3, 영남대출판부, 1982.
14) 「調査報告書」(1972),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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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29

매우 낮다15). 이는 자신들의 최후 자살공격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참시키려 했
거나 조선인들을 미군의 총알받이로 내몰아 죽게 한 경우, 또는 직접 학살한 것
을 은폐하려는 표현으로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마지막 순간에는 일본군 장교가 조선인 군부 몇 명에게 폭탄과 수

류탄을 건네주고 안전장치를 빼는 방법, 터뜨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미
군이 접근하거나 생명이 위급할 때 터뜨리라고 지시했다16). 심지어 어떤 일
본군 장교는 조선인들에게 수류탄 한 개와 건빵 한 봉지를 건네주고, 아까지
마 마을 쪽으로 내려가서 미군의 진지에 접근해서 수류탄을 진지 안으로 던
져 넣으라고 명령했다. 조선인들은 일본군 장교를 따라 하나둘씩 도망한 경
우도 있지만 마지막 순간 일본군과 함께 전사한 경우도 많았다17).

심지어는 일본군이 자폭하는 순간 주변에 있다가 이유 없이 사망한 조선인

도 부지기수였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 온 최천암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미야다 분대원은 도피하여 (조선인) 20여 명은 작은 언덕에 모였다. 그때 미야다

는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들고 집단 자결을 강요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의논하거나 만류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 수류탄을 높이 치켜들
고 “텐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라는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수류탄이 폭
발하였다. 미야다는 순간 가루가 되었고, 평소부터 미야다와 가깝게 지내던 3~4명

이 죽고 최천암은 이마에 화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18)

15) 오키나와 주민 照喜는 미군이 상륙하는 3월 ‘26일 조선인 군부들이 많이 죽은 것 같다. 자살

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調査報告書」(1972), 28쪽.

16) 권병탁(1982), 168쪽.
17) 권병탁(1982), 173-174쪽.
18) 권병탁(1982),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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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탈주 또는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13명 처형
처형 지휘자는 통신대 암호반의 오노다 조장(小野田 曹長)이었다. 이 자는 현

지 주민들 사이에‘사람을 보면 죽이고 싶어진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26년
식 권총’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조선인 군부들을 ‘본보기’로 죽였다고 자
랑했다고 한다.

총살하기 전에 조선인 군부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앞에 세운 다음 총

살하고 나서 구덩이에 흙을 덮었다19). 

기타 게라마 지역 내 학살 사건
게라마제도의 일본군은 미군상륙 후 투항하지 않고 산에 숨어 있었으나 탈

출·투항을 저지하고 죽음을 동반자로 삼으려는 일본군의 총구는 끊임없이 군 
노무자들을 향해 있었다. 집합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같이 일하던 노무자들
의 눈앞에서 7명의 노무자를 학살했다20).

19) 垣花의 증언. 그는 본부에 있었기 때문에 물을 길러 조선인들이 묻힌 곳을 매일 지나다녔는

데, 이런 무덤이 하루가 지날수록 하나 둘씩 늘어갔다고 했다. 「調査報告書」(1972), 28쪽.

20) 

海野福寿·権丙卓『恨(ハン)―朝鮮人軍夫の沖縄戦』, 河出書房新社, 1987. ; 아라카키 

야스코, 「일본 오키나와전쟁과 주민학살의 교훈, 전쟁체험기록편집의 현장으로부터」, 제주
4.3연구소,「4·3과 역사」, Vol.5, 2005년., 55쪽.

* 출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2018. 『(학술연구용역 보고서)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군산대학교 김민영 교수). pp. 13-15, 81-82, 91-97.
* 발췌·정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기획홍보국 김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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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정시대 징용거귀 고생기

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太平洋戰爭 實記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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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33

우리나라 조선 청년 

부모 슬하를 떠날 적에

조선반도 청년들아 글 한귀 지어보세.
우리나라 조선 여러 부모 슬하를 떠날 적에 
독한 일본 종자 이삼일도 여유 없이 
죄진 사람 잡아오듯 속여가면 하는 말이 
장부에 이름 없이 청년들을
오늘 즉시 면에 가서 훈련 받아라 하며 
면으로 데리고 가서 
시와노모 면장 하는 말이 자네들 들어보라.
자네들 가는 데는 멀지 않은 대구로 가니 
기간은 이 개월 정도 되니
조금도 염려 말고 다녀오라 하옵디다. 

연설을 들은 후에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한시가 되어 떠다 밀 듯이 갈 길을 재촉한다. 

불쌍한 우리 청년 가련하기 짝이 없다. 
면 직원 세 명을 따라 상주군에 들어서서
본 군대로 들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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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각 면에서 모여든다.
그럭저럭 시간이 가서 오후 4시가 되었더라. 
우리 청년 모아 놓고 군수영감 하는 말이 
자네들 들어보게.
이번 가는 데는 멀지않은 대구로 가니
조금도 염려 말고 다녀오게.
그리고 기한까지는 알 수가 없네. 
우리 청년들 그 말 들은 후에 일시에 탄식한다. 

용서 없는 시계는 벌써 여섯시는 되였더라. 
먼 산에는 해가 지고 월출동방(月出東方)에 달이 뜨니 
처소를 정하는데 어느 여관 정하던고 관동 여관 정하더라. 
여관에 들어가서 이삼십 분 있다 보니 저녁밥이 들어온다. 
밥상을 보니 서글프기 짝이 없다. 

밥이라고 주는 것이 세 숟가락 되락마락 하는데 
벌레 먹은 나물 숨만 죽여서 섞어주니 
종일 굶은 우리 청년들 굶은 듯이 먹고 나니 
각각 처소로 들어가서 거동을 보니 
군 직원, 면 직원들이 문 앞에 서서 지키고 있어 요동할 수 전혀 없다.

불쌍한 우리 조선 청년들아 들어보게. 
오늘부터 시작하여 우리 자유가 없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럭저럭 밤이 되어 그날 밤을 지날 적에 
잠은 오지 않고 홀로 앉아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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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35

부모 음성, 처자 음성들이 지나간다.
 
그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 보니
계명종(鷄鳴鐘)이 우는구나.
하도 답답하던 말이
‘날아날아 새지 마라 날만 새면 나는 간다’하다 보니
동창에 해가 돋아 문창에 가루올 제 에고 답답 어이할꼬.

따뜻한 우리 고향 부모처자 여기 두고
나만 홀로 간단 말인가. 
원수로다 원수로다 탄식하다 보니 문 밖에서 부르도다.
누가 와서 부르든가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침 하늘은 맑고 때는 하절(夏節)이요 
오늘은 음력 5월 21일이요.
상주역을 들어갈 때 골목골목에서 사람들 손을 잡고 
울음 울고 얼굴보고 울음 울 때 
일본 종자 아니고야 눈물 안 흘리는 이 없더라. 

가장(家長) 보낸 처자들은 어린자식 등에 업고 
백옥 같은 얼굴에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역전까지 따라와서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며불며 하는 말이 
‘임아 임아 낭군님아 님은 부모처자 생각하다 병이 날까 염려로다. 
너무 생각 마옵시고 만수무강 하옵다가 
고국을 와서 옛말하고 살아갑시다.’
하며 손잡을 적에 대장부는 일촌간장(一寸肝腸) 마디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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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녹는 것 같다.

유 다른 우리 정을 악수로 작별하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앞길이 안 보일 적에 원수놈의 기차 보소. 
그만 연기 피워가며 우리 정을 떼러 온다.

기차에 몸을 싣고 창문을 열고 보니 
서장, 부장, 군수, 모조리 나와서 기차소리 한 번 치니 
‘만세’ 라고 부르는데 우리 청년 할 수 없이 부모처자를 영영 이곳에 
두고 김천행을 타고 갈 때
빠르고 빠른 기차는 벌써 김천을 도착하였더라.

김천역에서 부산행을 기다릴 때 
불쌍한 우리 청년 물을 먹자해도 한 사람이 데리고 가고 
소변 대변을 보려 해도 감시놈이 데리고 가니 
억울하다, 억울하다 조선청년 억울하다.

그럭저럭 시간되어 부산행이 들어온다. 
부산 행을 갈아 타고 대구에 도착하니 오후 3~4시가 되어 
우리 청년 인도하여 어디로 데려 가나 보니 
회당에 들어가서 점심밥을 돌리는데 
그 점심을 먹은 후에 두 시간을 있다 보니 각군에서 모여 든다. 

그날 밤을 지난 후에 군에 있던 일본놈이 
신체검사를 맡아서 데리고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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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37

어디로 데리고 가오?
연병장(練兵場)을 들어가서 사방을 살펴보니 
누런 양복 입은 병정이 총 끝에 칼을 꼽고 서있는 양을 살펴보니 
무섭기가 짝이 없다.
그럭저럭 시간되어 한 줄로 서게 하여 
일본 놈 한 놈하고 조선 병정 하나하고 둘이서 
신체검사 대강 대강 한 후에 열 시가량 되었는데 
일본 병정 한 사람이 인도하여 데리고 간다.

어디로 데려가오? 
사범학교로 들어가서 한 줄로 세워놓고 
의복을 돌리는데 무슨 의복을 돌리든가 군복을 돌린다.
불쌍한 우리 청년 군복을 받은 후에 
학교 교실로 들어가서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들아 의복을 받고 보니 군속(軍屬)이 틀림없다.

 

일자무식(一字無識) 우리 동포 군속 될 줄 알았으랴. 
피신이나 해볼 걸 한다. 

독한 일본 종자 명령으로 불현듯이 잡아오니 피신인들 할 수 있나.

그럭저럭 의논하다보니 서산에 해가 지고 
월출삼경(月出三更) 그날 밤에 잠은 오지 아니하고 
홀로 앉아 생각하니 만 가지로 생각해도 
우리 청년 가는 데는 틀림없이 일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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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가자 한들 죽음이고 도망치자고 생각해도 
이 몸 하나 뛰고 나면 
독한 놈의 일본 종자 고향에 있는 부모처자 그냥두지 아니 할 것이요. 
도망가자 해도 그러하고 따라가자 해도 난처하고 
아하, 우리 동포들아 어이하면 좋겠는가? 
이 몸 하나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연만(連滿)하신 우리 부모 생각과 남다른 처자 
홀로 백골을 피하자면 그 몰골이 오죽할까. 

그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다가 
홀로 앉아 생각하니 기명(계명)이 우는 구나. 
계명(鷄鳴)이 울린 후에 왜졸이 나와서 나팔을 부는구나. 
나팔소리에 놀라 깨어 소변 대변 가려해도 
왜졸놈 한 놈이 문 앞에 앉아 
경례 안한다고 하면서 뺨도 치고 등도 치니 
무식한 우리 청년 매맞는 것이 웬 일이냐.

그럭저럭 2~3일을 지난 후에 영창 열고 내다보니 
근처에는 우리 동포 부모처자 어린자식 등에 업고 울며불며 찾아와서 
먼눈으로 인사하며 백옥 같은 얼굴에서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니 
아무리 대장부의 마음이라도 눈물 안 흘리는 이 없더라.
 
자식 된 마음에는 한 걸음에 달려가서 
부모처자 후려잡고 만 리라도 가고 싶으나 
일본 종자가 지키고 있어 가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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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39

대장부의 일촌간장(一寸肝腸) 다 녹는다. 

몹쓸 놈의 왜졸놈들 먼눈으로 볼라하면 
대 바지랑대1)를 손에 들고 와서 이면을 때리고 들어오며 
때리면서 말 한마디 할 수 없이 처리하니 
불쌍하다 불쌍하다. 우리 조선동포 불쌍하다.
그럭저럭 2~3일을 지난 후에 의복 분배 시킨 후에 
우리 청년 모여 놓고 짐 매는 법을 가르친다.
짐을 매여 등에 진 사람은 틀림없는 병정이라.
 
그럭저럭 수일을 지난 후에 
하루는 오후 세시나 되었는데 
낮에 일시에 짐을 지고 모여라 하는 말에 
왜졸놈 이삼인이 나팔을 불며 사범학교 떠날 적에 
각조마다 눈물이요, 각 조마다 한숨이라. 

우선 나서보니 인산인해(人山人海)인 듯한데 
자식 보낸 부모들과 가장 보낸 처자들이 
어린자식 등에 업고 역전까지 마중 나와 울음 우니 
가는 길 대장부 처자 우는 형상보고 일촌간장(一寸肝腸) 다 타는 구나.

이내 간장 타는 데는 눈물과 한숨이 바람 되어 
타는 간장(肝腸) 그칠 만도 하건만

 

1) 빨랫줄을 받치는 긴 막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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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그럭저럭 정신없이 가다보니 역전에 당도하여 
울며불며 역전까지 따라오는 부모처자를 역전에서 영영 작별하고 
정처 없이 대합실로 들어간다.
대합실에 들어가서 부산행을 기다리는데 
한 시간 동안 기다리니 
검은 연기 피워가며 부산행이 들어온다고 독한 왜병이 말한다.
기차에 올라보니 봉창 없는 차 칸에다 틈 없이 짜여놓고 
문조차 닫은 상태니 
오뉴월 삼복더위에 공기도 마음대로 마실 수 없으니 
내 몸이 답답하다.
어찌 갈꼬?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그럭저럭 대구역을 떠날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아니 한다. 
무정한 기차는 수 시간 새에 온 듯 부산역에 도착하여 
숙소를 정하는데 어디를 정하든가? 

공회당(公會堂)을 들어가서 자리를 살펴보니 
비좁아서 앉을 틈도 없고 뜬눈으로 새울 적에 
따뜻한 우리 고향 생각이 절로 난다.
 
고생고생으로 그날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짐을 메여 등에 지고 연락머리 도착하여 
선창(船倉)까지를 살펴보니 천지사방 병정이요, 
요동할 수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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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41

연락선은

수 시간에

일본 땅에 들어서서

연락선에 몸을 싣고 만경창파(萬頃蒼波) 떠날 적에 
영창(影窓) 열고 내다보니 대장부의 마음인들 고국생각 절로 난다. 

우리 몸을 싣고 가는 연락선은 어디를 가나 
빠르게 달려온 연락선은 수 시간에 일본 땅에 들어서서 

연락머리 대는 데가 선창이 분명하더라.
연락선(連絡船)2)을 내려서 처소를 찾아든다. 
어느 여관 정하든가 2층에 다 들어, 5~6일을 유한 후에

 
불쌍한 우리 조선청년 짐을 매여 등에 지고 
문쪽으로 건너가서 선창을 살펴보고 
태산 같은 큰 배에 올라가서 

이층 실에 들어가서 40~50명이 앉으니 
잉어 같은 우리 청년 답답하기가 말할 수 없다.  
하도 답답해서 바람조차 쐴 수 없다고 하니, 
독한 놈의 왜병이 때리는 매를 참지 못하여 다시 들어간다.

 2) 비교적 가까운 거리의 해협이나 해안, 큰 호수 따위의 수로를 횡단하면서 양쪽 육상 교통을 

이어 주기 위하여 다니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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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들어앉아 생각하니 하도 목이 말라 못 견디고 
다시 나와 하는 말이 반장나리 들어보소, 
목이 말라 죽게 되었으니 
물 한 모금 먹으로 가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 그리해도 
독한 종자 하는 말이 ‘죽어도 좋다’ 하면서 ‘나가면 뒤진다’고 
말할 적에 돌아서서 생각하니 눈물 밖에 안 나더라. 

그 말 들은 우리 청년들 모여 앉아 하는 말이 
아하! 우리 조선 동포들아 이리하여 살겠는가. 
하도 답답하여서 바람 조금 쐬려 해도 매를 친다.
목이 말라 물을 먹자 해도 죽어도 좋다고 하니 
이리하여 살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살기는 다 틀렸다.

만경창파(萬頃蒼波)에 뜬 배는 쉬지 않고 빨리 달리는데 
이와 같이 달려가도 일 이 개월은 걸린다.
이 불쌍한 우리 청년 천명(天命)이 아니고야 살아오기를 바라겠나. 
아무리 생각해도 살기는 틀렸다.

그럭저럭 가는데 미군 비행기가 내리려나
저렇게 날아가고 밤으로는 쉬며 갈 때
불쌍한 우리 청년
뜨거운 배안에서 삼사일을 가는 중에
왜졸놈을 속여 틈을 내서 밖에 나와 보니
태평양(太平洋)을 들어설 때
태평양을 바라보니 
따뜻한 우리고향 생각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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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43

눈물 쥐며 하는 말이 불쌍한 우리 동포들아 
남들 태어날 때 태어났건마는 우리 팔자가 왜 이런고, 
때를 못 만나 이러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전혀 없네.

배는 쌩쌩 태평양을 들어서서 밤낮 주야로 떠나간다.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동포 똑같은데 들어 앉아 
십삼일을 지난 후에 다시 나와 만경창파(萬頃蒼波) 바라본다.

바다를 바라보니 섬(島)이 하나 보이더라. 
태평양을 떠난 우리 동포, 
섬을 보고 하도 반가워서 박수를 칠 적에 
그 섬 처음으로 보일 때 시간 내로 명령 내려 그 섬에 내릴 적에 
몇 중대(中隊)가 내리는가?
1, 2, 3중대 내리고 4중대도 내리는데 
남아 있는 중대는 정처 없이 떠나간다.

3, 4중대 우리 동포 육지에 내려서 살펴보니 

이곳에 민가(民家)는 일본식이 아닌 곧은 지나(支那)식3)이 분명하구나.

한 청년이 하는 말이 
지나사변(支那事變) 할 적에4) 남양군도(南洋群島)5), 싱가포르를 
뺏을 적에 점령한 게 분명하다.

 3) 지나(支那)’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식 가옥 형태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됨.
 4) 일본에서 중일전쟁을 이르던 말
 5) 본문에는 ‘나명군도’로 기재되어 있으나, 문맥상 일본이 점령한 남양군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

됨. ‘남양군도(南陽郡島)’는 1914년부터 1945년 8월 종전 시까지 일본의 통치를 받은 중서태평양 지
역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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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부산서 떠난 지 13일 만에

섬에 당도하다

부산서 떠난 지 13일 만에 섬(島)에 당도하다 

이럭저럭 시간되어 오후 3시는 되었는데 숙소를 정하는 중이다.
우리 동포 선창가에 모여 앉아 하는 말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청년 왜졸들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받을 
줄 누가 알았으리요. 답답하다.

 
우리 부모 나 이 고생 이러한 줄 모르지요. 이 고생이 웬 말이요. 
눈에는 눈물이 비 오듯 하고 마음에는 애탄(哀歎)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탄식한들 애통(哀慟)만 타네. 
여러 청년 입에는 하는 말이 이뿐이더라 
이와 같이 담론(談論)하는 사이에 두어 시간이 지났든가.

떠날 준비 하여라 하는 소리에 짐을 메여 등에 지고 
왜졸놈 뒤를 따라 불쌍한 우리 청년 밤이 되도록 따라가니 
무인지경 산 가운데 빈집 몇 채가 있어 들어가서 
그 집안을 살펴보니 오고 가는 병정들이 쉬여가는 집이더라. 
우리 동포 들어가서 집안을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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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45

누울 틈은 전혀 없어 앉아서 새우게 되었더라.
 
불쌍한 우리 청년 모여 앉아 하는 말이 
육지에 내리면 편히 쉴 줄 알았더니 
오나가나 우리 팔자 잠자리조차 이러하니
아하! 우리 동포들아 이러고 어찌 살겠는가?
 
고생고생 침침한 그날 밤을 새울 적에 
따뜻한 우리고향 생각 절로난다.
그럭저럭 있다 보니 일출동방(日出東方) 해가 뜨니 
왜졸놈들 벌써 나와 모여서서 한 줄로 세워 놓고 

일하러 가자고 재촉하더라. 

종일 굶은 우리 청년 왜졸놈들을 따라서 선창가에 도착해서 
사방을 살펴보니 선창가라 하는 데는 
군속(軍屬)의 짐이 와서 짐들을 태산같이 모아놓고 
아침 굶은 우리 보고 그 짐을 운반하라 하니 
불쌍한 우리 동포 청년 죽지 못하여 하올 적에 
기운도 없고 배는 오죽 고프리오.

하늘은 노오랗게 보이고 눈은 캄캄하고 천지(天地)도 안 보이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다 보니 때는 한나절이 되어 
점심밥을 줄까 바랐더니 점심조차 주지 않고 그날 해를 넘기니 
죽는 것과 다름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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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그럭저럭 해는 지고 숙소로 들어온다.
저녁밥이라고 주는 것이 밥을 둘러보니 
80명이 먹을 밥이 40~50명이 먹어도 될까 말까 하다. 
그 밥을 80~90명이 먹었으니 
종일 굶은 우리 청년 밥은 먹은 지 만 지 하여 정신이 가물가물하다.

아이고, 배야 못살겠네. 배고파 못살겠네.
오호라 애탄이여 어찌해야 왜졸의 원수를 갚을꼬? 
이내 몸이 할 일이다. 

그럭저럭 사 오일이 지난 후에 
하루는 이사를 하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짐을 챙기라 하여 짐을 챙겨 지고 
왜졸의 뒤를 따라서 어디로 가는지?  
시내 초등학교에 들어가더라.
  
그 학교에 간 후로는 밥도 좀 더 주고 배급도 주며 
주야장창(밤낮으로) 일만하니, 불쌍한 우리 청년 그 몰골이 
오죽하리요.
불쌍한 우리 청년들이라 무정세월(無情歲月)은 여류(如流)하와 
그럭저럭 수 개 월이 지났더라.

별안간 왜졸놈들이 또 이사인지 무엇인지 한다며 
짐을 챙겨라 하고 불쌍한 우리 청년 짐을 메여 등에 지고 
왜졸놈의 뒤를 따라서 이사한 집을 살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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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47

서글프기 짝이 없네.  

마당이라 하는 것이 풀잎들은 우거지고 
울도 담도 없는 집에 들어가서 집수리를 하고 나니. 
절반은 일을 보내고 절반은 대기하고 
남은 청년은 설거지를 하다 보니 
어디서 난데없는 총소리가 나는 듯하다.

불쌍한 우리 청년들은 총소리에 놀라서 사방을 살펴보니.
왜졸놈들이 설치면서 여봐라 군부들아
봐라 봐라 하지 말고 급히 굴속으로 들어가라 소리친다.
미군의 비행기가 사방으로 날아든다 하는 소리에 
불쌍한 우리 동포 거동보소.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이리저리 굴속으로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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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저 공중에 뜬 비행기는

미국 비행기가 분명하다

모여 앉아 하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들아 큰일 났다, 큰일났어!
저 공중에 뜬 비행기는 어디 비행기냐? 미국 비행기가 분명하다!
이제는 틀림없이 다 죽겠다!
 
핏기 없이 있다가 미군 비행기가 폭탄을 던져 
부수기를 시작 한다. 
무식한 우리 동포 비행기는 설치는데 구경을 한다며 
굴 밖에서 설치오니 왜졸놈들이 매를 들고 때린다. 

때리고 있는 중에도 
미군의 비행기는 5~6월 소낙비(소나기) 같이 같이 총을 쏜다. 
불쌍한 우리 동포 총살을 피하면서 굴속에 들어앉아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되었더라. 

왜졸놈들 먼저 나와 군부를 부르더라. 
불쌍한 우리 동포 굴밖에 나서보니 
온 천지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이 폭격을 맞아 온전한 데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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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49

독한 왜졸놈의 거동 보소. 
무식한 우리 청년들에게 삽 하나씩을 들려주고 
불끄러 가자 하니 우리 청년 할 수 없이 따라가서 
불을 끄고 돌아온다.

일몰(日沒)이 되어 저녁밥을 먹은 후에 
고래장 속으로 들어가서6)(가매장 당하듯 굴 속으로 들어가서) 
그 밤을 새울 적에 
잠은 오지 않고 따뜻한 우리 고향 생각 절로 나서 
잠시라도 잊지 못할 우리 고향 돌아가면 

부모형제 있건 만은 
요 모양 이리 될 줄 나 몰랐네.

그럭저럭 그 밤을 새워 이튿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나니 아홉시는 되는데 
우리 동포 한사람이 밀고 들어온다.

우리 있는 굴 앞에 갔다 온 이들이 

얼굴을 본 이 불쌍한 우리 동포 다섯 사람 죽은 시신을 종일 

두었다가 이튿날 나무 위에 시체 놓아 석유 한통 위에 뿌리고 
동무가 보는 앞에 화장을 하고, 
다섯 곽에 뼈를 주어 담아 가지고 
국장실로 들어가면서 하는 말이 

6) ‘고래장하다’는 충청북도 방언으로 ‘가매장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해당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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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조선사람 죽는 거 아무렇게나 뒤집어 놓고 하는 것을 눈뜨고 
봤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듣고 본 우리 청년들은 앞이 캄캄하여 정신을 잃었더라.
이가 갈리고 마음을 썩이는 우리 청년 이 모양이 어인 일인가?
일본 종자 어찌하여 원수를 갚을까?
그럭저럭 있다 보니 삼 소대(小隊)에 군부(軍夫)들이 
정신없이 뛰어와서 하는 말이 
아아!  우리 군부들아 큰일났다 큰일났어. 
우리 소대 군부들아 군부들의 삼분의 일은 안 보이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전혀 없다.

그럭저럭 한 사람 돌아오고 두 사람 돌아온다. 
이삼일 지난 후에 한 줄로 세워 놓고 세어 보니 
십 오명이 간 곳이 없다.
그날을 지난 후 이튿날 일어나서 일을 하자 하니 
일본 병정들 따라서 불천지로 들어간다.

한시가량 있다가 예전에 있던 초등학교에 쌀 오백포 있는 것을 
운반하자 하니, 
불쌍한 우리 청년 안 가면 매를 때리니 매맞는 것 참지 
못하여 하는 기라.
그럭저럭 12시가 지나니 점심을 가지고 와서 주먹밥을 돌리는데 
불쌍한 우리 청년 점심 먹은 거라곤 반요기도 안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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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51

일본 병정 안 볼 때 조심조심 쌀을 먹고 

근근이 그 날은 지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밥을 살펴보니 
그전에 먹던 절반도 되락마락 하더라. 
우리 청년 밥을 보고 하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들아 이 밥 먹고 어이 살꼬? 
그럭저럭 이튿날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서 선창가로 일을 간다. 
일을 가며 살펴보니 사람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누워있고, 
말(馬)도 죽어 있고 
그럭저럭 선창가에 도착해서 만경창파(萬頃蒼波) 둘러보니 
선인(船人)들이 죽어서 여기 저기 떠 있더라.

불쌍한 우리 동포 두려움을 무릅쓰고 
불탄 간수메(통조림)를 주어다가 밥 먹듯이 먹는다. 
우리 동포 오죽이나 배가 고파 주워 먹는 걸 보면 

일본놈이 그것조차 못 먹게 하옵디다.

그럭저럭 그날은 지난 후에 
매일같이 미국 비행기가 떠나지 않고 공중에서 공습을 하니 
민간인들도 피난해야 하고 우리 청년들도 날마다 피난을 간다.
우리 청년과 민간들은 한시라도 조용할 때가 없더라.  
눈물 짓고 한숨 쉬며 하는 말이 
원수로다 원수로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원수로다 하여 
봐도 쓸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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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또한 눈물을 흘리며 이리하고 살겠는가? 
차라리 죽어서 없어지면 이런 고생 안 할 텐데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이렇게 한탄을 매일같이 하고, 
생각에 생각을 하면서 수개월을 지난 후에 
하루는 돈을 가지고 와서 두 달 월급이라 하면서 
26원을 개개인에게 돌리더라.

매일 일 나가면 고구마와 과일을 사서 먹고 하니 
불과 2개월이 가지 못하더라.
그것이라도 사서 먹다가 사먹을 돈이 없으니 
배고픈 걸 견딜 수가 없더라. 

이와같이 불쌍한 우리 청년 대구서 입은 군복을 지금까지 한 벌로 
입었으니 헐고 더러워져 육안으로 볼 수조차 없다.
우리의 고생은 태산이로다. 한이 없더라. 
이때가 어느 때인가 소화(昭和) 이십년(1945년) 2월이라.

따뜻한 우리고향에는 춘절(春節)이 와서 
산천에 초목은 촉이 트고 
전선에는 보리 싹이 푸릇푸릇 성하는지 눈에 어린다. 
따뜻한 우리고향 보고 싶소. 가고 싶소. 
벌써 고향 떠난 지 1년이 가깝구나.

주야로 고향 갈까 바랐더니 무식한 우리 청년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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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53

이번에 함선 들어오면 그 짐을 다 풀면 
우리 싣고 간다는 걸 낙을 삼고
이삼일 지난 후에
크고 큰 함선 짐을 다 내리면
고향 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주야로 그 짐을 다 푼 후에 짐 매라 하옵디다. 

무식한 우리 동포 고향 간다하며
짐을 매어 등에 지고 
선창가에 나가서 배를 타려고 준비 할 때 ,
소대장이 짐을 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 가는 데는 이 섬(島)이 분명하다.
하는 소리에 천지가 막막하여 정신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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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섬 이름을 물어보니

‘아끼도(아카도; 阿嘉島)’라

 하옵니다

그럭저럭 시간되어 밤이 새도록 가고 나서 
이튿날 도착하니,
그 섬 이름을 물어보니 ‘아끼도(아카도; 阿嘉島)’7)라 하옵니다.

섬에 내려 숙소를 정하는데 
그날 종일 기다리며 밤이 되니 가자하는데 
그날은 정월 6일 날 밤에 비가 와서 물 천지가 되었더라.
넘어지고 엎어지고 숙사를 찾아든다. 

한등 넘어 두등 넘어 무인지경(無人之境) 산골짝에 숙소 하나 보이더라. 
안에 들어가 불을 켜 살펴보니 서글프기 짝이 없다. 
싸리로 문을 엮고 달고 품을 엮어 자리 깔고 돌아서니 
그 서글픔을 고사하고 무섭기가 한정 없네.

그럭저럭 밤이 되어 누어서 쳐다보니 

 7) 故장윤만님의 일제 강제동원 관계 기록 및 명부와 원본 사료『대동아전쟁 실기집(大東亞戰爭 

實記集)』 등의 내용을 검토해보았을 때, 본문에서 말하는 ‘아끼도’는 일본 오키나와(忠勝) 자
마미섬(座間味島) 인근의 ‘아카도(阿嘉島, 일본식 발음 아카시마)’를 일컫는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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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55

하늘이 보이는데 소마구간(외양간)이 틀림없다.
그 밤을 근근이 새우고 이튿날이 되었는데 
무슨 일을 시키는가 병정에게 물어보니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일은 안하고 배 꺼내는 일 뿐이다.
무식한 우리 청년 배를 꺼낸다 하니 무슨 배를 꺼내는가 했더니 
조금 후에 있다가 연습하러 가잡니다.

병정에 뒤를 따라 배 있는 곳을 가니 산 밑에 굴을 파고 
빈 배만 넣어놓고 병정이 하는 말이 
이 배는 이곳에 두었다가 어느 때 쓰느냐 하면 
아메리카 항공모함이 오면 이 배에다 폭탄 싣고 
한 사람이 타고 가서 그 배를 폭발시킨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 알고 숙소로 돌아와서 이삼일을 지난 후에 
미군 비행기가 날마다 하늘에서 맴돌며 들어온다. 
불쌍한 우리 청년 피하고 피해가면서 지낼 적에 
배가 하도 고파서 나물도 뜯어먹고 송구(소나무 속껍질)도 꺾어먹고 
나무열매도 따먹으면서 며칠을 지난 후에

하루는 미군 비행기 수십 대가 날라 와서 
산천초목(山川草木)에 불을 질러놓으니 
조그만 '아끼도'가 불천지가 되었더라.

이와같이 미국의 일본 공습이 있어 잠시라도 숨쉴 새도 없이 
엎드려 있어야 했고 
불쌍한 우리 청년 잠시만 비행기가 안보이면 불을 끄러 가자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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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안 가겠다 하면 칼을 빼 칠라 하니 죽더라도 할 수밖에 없네.
억울하다 우리 청년 이 고생이 웬 말이냐. 
그럭저럭 해는 지고 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니 
섬 전체가 불이더라. 
끄다 끄다 다 못 끄고 삼사일을 타니 
초목이라 명색이 보이지 아니 하더라.
 
하루는 일어나서 일곱 시는 되었는데 
불을 끄려고 나가니 비행기가 와서 불을 끄지 못하고 
바위틈에 모여 앉아 피신을 하다 보니 
어디서 난데없는 대포 소리가 천지를 울리더라. 
옆에 있는 친구 하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들아 틀림없다 틀림없어 살기는 다 틀렸다. 
총소리 나는 것이 미군의 총소리다 할 적에 
친구 하는 말이 여기서 있지 말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하며 집으로 가자 하여 
집으로(거처로) 와서 보니,  
우리 동포 간데없고 굴을 찾았을 때 
이곳에는 왜졸놈 병정 둘과 조선동포 4인이 들어앉아 
부들부들 떨면서 
앉아있는 왜졸놈 하는 말이 
폭탄을 한 개 주면서 너희들 이것을 가지고 있다가 
미군이 오거든 던지고 너도 죽어라 하니  
불쌍한 우리 동포 그 폭탄을 받아들고 눈물지며 하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 친구들아,
이제는 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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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57

폭탄과 총알이

5, 6월 소낙비 오듯 하는데

바다를 내다보니 온 바다에 배들로 꽉 찼다. 
공중에는 비행기요, 대포와 폭탄과 총알이
5, 6월 소낙비(소나기) 오듯 하는데 
이곳에 있는 우리 동포 한 사람이라도 살아나면 천명(天命)이요 
만무(萬無)로다, 만무로다.
 
그 동안에 미군 병정들 한 무리는 상륙하고 
한 무리는 배 위에서 총을 쏘니 
천명이라도 피할 수조차 없더라.

그 와중에도 총알을 운반하라 하니 
기가 막힌 우리 청년 총알 메고 왜졸의 뒤를 따라 가니,  
총에 맞아 죽는 사람, 폭발 터져 죽는 사람, 
참으로 인간으로서 못 볼 것은 그 뿐이더라.

그럭저럭 오후 6시는 되었는데 
태평양을 바라보니 배는 떠서 있고 밖은 보이지 않고 
그때 우리 청년 배를 넣은 굴에 모여서 폭탄을 배에다 실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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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너무도 배가 고파서 조금 앉아 쉬고자 하는 때에 미군이 온다. 
조그만 ‘아끼도’를 틈 없이 올라서니
여기 있는 우리들은 꼼짝 못하고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웠다.
종일 굴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4~5시간 있는데 
미군의 거동 보소.  
우리가 있는 굴 앞에다 배를 대고서 올라다니며 총을 쏘니 
우리 동포 천명이 아니고야 살기를 바라리요.

종일토록 부수더니 우리가 있는 굴을 보고 총을 쏘니 
우리 청년 하나 둘이 서로 손을 잡고 울며불며 하는 말이 
아하! 우리 동포들아 울지 말고 정신 차려라. 
오늘 죽으면 오늘밤에 고향 가서 부모형제 만날 터이니 
그리 생각 깊이해라.

속히 죽자 하면서 있다 보니 
어느 때가 되었는지 산에는 해가 지고 일몰이 되니 
미군 병정이 절반은 내려가고 절반은 산에서 기관총을 겨눈 채 
나뭇잎만 바스락 소리 나도 그곳에 총을 쏴서 
굴에 앉은 우리들은 숨조차 쉴 수 없이 하는 말이 
밤이 어두우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정월 보름달은 밝은데,  
우리 동포 하는 말이 
여기서도 죽을 거요, 가자 해도 죽을 거요, 밖에 나가보자 
근근이 굴속을 나와 병정이 앞을 서고 
우리도 포대를 따라 기어서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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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59

한참을 기어 가다보니 
미군이 산에 있다가 우리가 기어가는 것 보고 총살을 갈기는데 
본 정신은 전혀 없고 논둑 밑에 들어 누워 
총소리가 멎은 후에 또 기어가기 시작 한다. 
기어가면서 살펴보니 우리 조선 동포의 죽은 시체들이 허다하다. 
한 오십 센티쯤 두고 조심조심 나가니 굴이 하나 있습디다. 
굴을 찾아 가니 우리 동포 10여명이 손을 잡고 울음 우니 
참아 눈뜨고 볼 수가 없다.
 
불쌍한 우리 동포 불을 끄느라고 
2, 3일 저녁잠을 못자고 앉아 졸면서 4시는 되었는데 
우리가 있는 굴 근처에 대포 소리 들리는데 
견딜 수가 없어서 이 산을 넘어가자 하니 
십이명 가운데서 4~5명이 나와 나간다고 하니 

일본 병정이 총을 들고 앉아서 넘어가지 못하게 한다. 
발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갈 길을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다시 정신을 차려 근처 굴로 들어가니 
우리 동포 십여 명이 앉아서 하는 말이 
들어오려면 빨리 들어오고 나가려면 빨리 나가라 한다.  
우리들은 그 굴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 보니 
병정이 하는 말이 조선동포 모이라고 명령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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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총알이

비 오듯 하는데 

음력 15일 대낮같이 밝은데 
불쌍한 우리 동포 모여 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오늘 저녁에 배를 끄집어내러 가는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자고 한다. 
우리 동포들 하는 말이 오늘 저녁은 다 죽는다.  
하면서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고 정신이 막막하여 지더라.

그럭저럭 시간이 되어 밤 2시는 되었는데 
독한 종자 일본놈은 우리 동포들이 가지고 갈 끈과 나무토막 
하나씩을 메고 가자고 재촉하는 소리에 
우리 동포 죽지 못해 나무를 메고 배를 꺼내러 가는데,  
미군이 우리를 보고 기관총으로 총을 쏘니 
총알이 비 오듯 하는데 
그 사이를 피해서 배가 있는 굴까지 도착하여 사방을 살펴보니 
미군이 올라와서 총을 쏘니 
배도 꺼내지 못하고 논뚝 밑에 피난할 때 
병정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오늘 저녁에 날이 밝아 배를 못 꺼내니 
조심하여 마음대로 각자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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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61

우리 동포 사방 산천에 해가 떠서 올라가는데 
총알이 비 오듯 하는데 천명이라도 살기를 바라리요. 
정신없이 올라와서 먼 사방을 바라보니 
불이 나서 불꽃 밭이요 총소리가 단불에 콩 튀듯 하고 
죽은 시체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더라. 

굴을 찾아들어가니 
우리 동포 20~30명이 앉아서 하는 말이 
반갑게 들어오라 하여 그 굴속에 들어가서 보니 
앉아있을 틈도 없었다.  
그 몰골이 오죽하랴.

이번 전쟁은 일본이 진다하는 동포들이 
손을 들고 나가자 하옵니다. 
그러나 왜졸놈의 눈에 뜨이면 총을 쏘니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다.

 
며칠 동안 굶어 기운들은 없고 밥 맛본 지가 두 달이 지났다. 

이와 같은 고통을 받는 우리 청년 그래도 죽지 않으려고 버티었다.  
그날 오후 4시 반이 되었더라. 

수건으로 기를 만들어서 손에 들고 줄을 서서 내려가는데 
중간에 와서 보니 이십 여 명 중에 6~7명은 산으로 가서 태평양을 
살펴보니 일본 병정은 보이지 않고 
미군배가 와서 넓은 바다에 혼불같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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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그 배에서 우리를 향해 대포를 쏘니 천지가 뒤바뀌는 듯하다. 
 
불쌍한 우리 동포 갈 길을 몰라 깃발 들고 
나가지도 못한 채로 총알은 비 오듯 하니 
어찌 살기를 바라리요.  
정신을 차려 굴속을 찾아가니 
우리 동포 이삼십 명이 앉아서 반갑게 들어오라 한다.

그 굴에 들어가서 하루 종일 피난을 하고 나서 

이월 십칠일 밤에 전과 같이 배를 꺼내러 가자 하며 준비를 하라고 한다. 

우리 동포 하는 말이
어제 저녁에도 배 꺼내러 갔다가 배도 꺼내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병신 된 사람도 몇 명이었는데 
오늘 저녁 만일 배를 꺼내러 간다면 우리 동포 다 죽을 겁니다. 
하면서 울며불며 말하였다.
  
차라리 죽었으면 이런 고통을 아니할 테지만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죽지도 못하고 일본 병정 명령으로 배를 꺼내러 가기 전에 
이 불쌍한 우리 동포 너무도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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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63

밥이라도 먹었으면

여한이라도 없지만은

밥이라도 먹었으면 여한이라도 없지만은 
배곯아 죽이든 살리든 이 몸은 어떻게 하면 피하지도 못한 채 못 이기며 
총알은 비 오듯 하는데 어제 같이 배 꺼내러 배굴까지 도착하여 
사방을 살펴보니 배를 둔 굴 앞에 미군인지 왜졸인지 죽어서 있는데 
우리 청년 보려고 하니 일본상관 명령으로 못 보게 하옵니다.

먼눈으로 살펴보니 팔을 친 후 
죽은 사람의 옷을 벗기어 조사한 후에 상관이 하는 말이 
오늘 저녁에도 배는 못 꺼내니 돌아가라고 한다. 

불쌍한 우리 청년 오든 길로 돌아서서 기어서 오니 
시간은 밤 3시가 되었다.  
하루 종일 피난하다 보니 배고파 죽게 되었는데 
밥이라고 과자 한 봉지 주면서 하루 종일 먹으라 한다.

한 번에 다 먹어도 양의 반도 안 차는 것을 
하루 종일 먹으라니 배고파 죽을 것이요, 
왜졸놈 하는 말이 군부들아 낮에는 굴을 파라 하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는 것이 좋겠다며 쑥덕쑥덕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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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유혈이 낭자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여기서도 죽을 거요 하루속히 죽어지는 것이 고생들을 덜 할 거요.  
7~8명이 둘러 앉아 하는 말이 
고생고생 하다가 살아서 고국을 돌아가서 부모형제 만나보자 
하였더니,  
몇 우리 청년 오늘 막 죽이라 하면서 
여기서 죽으면 하늘이 다 알고 땅이 다 안다 하면서 
울며불며 수류탄을 손에 들고 
심지에 불을 달아 삼십분 동안 있으니 
폭탄이 폭발하여 7~8 명 중에 두 사람은 육신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나머지 사람은 정신없이 쓰러졌다.  

잠시 후 정신 차려 일어나니 두 사람은 영영 죽었더라.  
7~8 명 중에서 6명이 살았어도 유혈이 낭자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하루 종일 누웠는데 
우리 병정 보고 일본 병정한테 일러 병정이 와서 보고 
급히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라고 했다.

그럭저럭 날이 가고 삼사일을 지난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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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65

일본 병정 조선군부 모아 놓고 밤에는 굴을 파라는 명령이 내렸다.  

사방 산천으로 흩어진 군부를 모아 중대에 모아놓고 
너희들 들어보아라.  
중대를 흩어지게 하지 말고 노역중대로 정할 테니 
낮에는 굴 안에 들어가 있고 밤에는 밖에 나와 폭탄을 메고 
갈거라 하니 
그 중에 우리 동포 하는 말이 배가 고파 폭탄을 못 메겠다 하니 
소대장이 때리려고 한다. 

명령을 못 이겨 십오일 동안 다 메 올리고 나니 
밤낮없이 굴을 파고 뼈만 남은 우리 동포들 하는 말이 
죽었으면 이 고생이 없을 텐데 하였다.  

일본 병정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일이 없다 하면서 우리를 굴 안에 가두어 놓고 

굴 문을 철창처럼 목문으로 닫아 놓으니 
우리 동포 굴 안에서 답답하기가 한량없다.

목이 말라 물을 먹자 해도 
굴 문밖에 왜졸놈이 총을 들고 밤낮없이 지키고 있으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불쌍한 우리 동포 하는 말이 
몹쓸 놈의 왜졸놈아 밤낮주야 일을 시키고 

일이 없어 굴속에 감금하고 물도 안주니 

목이 말라 나 죽겠다고 울며불며 원망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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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왜졸놈 하는 말에 너희들은 죽어도 좋다 한다.  

우리 동포들 물을 안주니 못살겠네, 못살겠다. 
배고파 못 살겠다, 이래 살아 무엇 하나 하면서 
목을 매여 죽는 사람도 자살하는 사람도 있더라. 
 
이 고생 이 고통을 부모형제 들으면 뼈가 녹고 마음이 쓰리리.
누구하나 부모 없는 사람 있으랴,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야 이 고생 이 고통이 웬 말인고 
슬프다 탄식한다. 
 
그럭저럭 세월 가며 한 삼사일 후에 
소대 배급으로 병정이 하나씩 데리고 가서 
수통에 물을 넣어 가지고 오는데 
배고파 뼈만 남아 있으니 힘이 없어 넘어지고 간신히 오는데 
병정은 뒤에서 재촉을 한다.  

그럭저럭 굴문까지 도착하니 
굴에 들어가 수통 물을 돌리는데 
우리 군부 목마른 차에 물을 보고 환장들 하였다.
  
먹고 싶은 물도 마음대로 못 먹고 배급처럼 한 모금씩 먹은 후에 
우리 군부 하는 말이 못쓸 놈의 왜졸놈들아 이년 동안 
동거하며 일 시켜먹고 이런 고생시키느냐?  
굴 안에서 한 달 반 동안 굶어가면서 햇빛도 보지 못한 채 
굴속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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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67

하루는 출석을 부르는데 
한 사람이 답이 없어 툭 쳐보니 배고파 굶어 죽어 있다.  
우리 동포 한 굴속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르고 있으니 
목숨만 살았지 어찌 살았다고 하리요.
 
그럭저럭 이 삼 일을 있다 보니 병정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오늘 굴밖에 나와서 바람 조금 쐬라하니 
뼈만 남은 우리 동포들은 죽어도 해라도 한 번 보고 죽자 하며 
굴 밖에 나와 산천을 살펴보니 
우리가 토굴에 들어갈 때에 작은 ‘아끼도’에 풀이라고는 없었는데 
이제 보니 산천에 풀이 푸릇푸릇 한 것을 보며 
우리도 그와 같이 살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신세타령 하였다. 

그럭저럭 시간이 가 오후 3시는 되었는데 
병정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굴에 들어가라 하니 
어느 영이라고 한마디 말도 못한 채 굴속에 들어가서 배곯아 가며 
열흘 동안 신음하며, 우리 동포 하는 말이 
여기서도 죽을 꺼면 생각 생각 깊이 해서 
미군에게 손을 들고 포로가 되자 한다. 

우리 동포 병정에게 하는 말이 
목이 말라 죽게 되어 물 먹으로 갔다 오겠다 하니 
병정이 하는 말이 같이 가자고 하여 병정하고 가서 물을 먹고 
생각하니 굴속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앞길이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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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너희들은

오늘 총으로 죽일 것이니

우리 동포 4명이 병정을 따돌리고 내달리다 왜졸놈에 붙들렸다. 
올라가서 들어보니 ‘아끼도’ 부대장이 명령을 내리는데 4명을 
결박하여 이 삼일을 두었다가 죽이라고 하옵니다.  

병정이 명령을 받아 4명을 결박해 놓고 
밥도 물도 주지 않고 배고파 죽게 하였다.   
5일이 지나 음력 4월 15일이 되었다.  하루는 밥을 돌리는데,  
결박된 4사람 그냥 두고 주먹밥을 조금 먹이고 일본 병정 하는 말이 
너희들은 오늘 총으로 죽일 것이니 그리 알고 있어라 하고 나서 
굶은 우리 동포 5~6명을 나오라고 재촉한다.  

어느 명령이라고 안 나갈 수도 없어 나갈라 하니 
이년 동안 동거하며 살아온 사람을 묻을 구덩이를 파라고 하니 
불쌍한 우리 청년 동포 불쌍하다는 생각뿐이다.  
우리 동포들 미군에게 죽을 줄 알았더니 
일본 놈에게 죽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이놈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신세타령 하다 보니 결박된 4명이 하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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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69

아하! 우리 동포들아 자네들 들어보소.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으니, 자네들 살아서 고향에 가거들랑 
부디부디 날짜를 알려줘 제사 지낼 적에 
다른 것 차리지 말고 밥이나 많이 떠놓도록 바라네’ 라고 부탁하며 
울며불며 한다.  
우리 동포들 그 소리를 듣고 앞이 안 보인다.

그럭저럭 시간 되어 왜졸놈 다섯이 총을 들고 와서 
결박한 네 사람을 끊어서 한쪽으로 각기 따로 세워놓고 
우리 동포 5~6명을 불러서 사람하나 누울 만큼 구덩이를 파라고 한다. 
구덩이를 파라고 하니 앞길이 안보여 주저주저 한다.

‘아끼도’ 부대장이 구덩이를 파지 않으면 너희들도 죽일 것이라고 
재촉한다.  
우리 동포 5~6명은 명령을 못 이겨 구덩이를 파고 나니 
병정이 하는 말이 너희 네 사람은 구덩이 앞에 하나씩 서라 하고, 
한 사람 앞에 병정 하나씩 서서 총알을 넣어 가지고 서 있는데 
부대장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흔들으니 
일시에 총소리 한방이 땅! 하더니 땅이 뒤흔드는 듯하다.

우리 동포 5~6명이 그 모습을 보니 
네 사람 중에 셋은 구덩이에 들어가서 안 보이고 
한 사람은 빗맞아서 죽지 않고 하는 말이 
독한 놈의 왜졸들아 죽이려면 속히 죽여라 하는 우리 동포 포악어로 
나오는 소리에 산천이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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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때 다시 총소리 한번 나더니 병정이 하는 말이 
너희들은 총알도 아깝다 하면서 
죽지 않는 우리 동포들에게 속히 묻어라 하니 
우리 동포 하는 말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 묻어라 하니 
불쌍하다 불쌍하다.  

우리 동포 불쌍하다 명령을 못 이겨서 혼자 가서 묻고 나니 
살아서 흙이 들썩들썩 하니 
독한 놈의 왜졸놈들이 빨리 묻으라고 소리친다. 
그 네 사람을 다 묻고서 굴로 돌아와서 생각하니 고국 생각 절로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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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71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그럭저럭 삼사일을 지난 후에 
밥이라고 주는 것이 뽕잎 싹과 풀잎 싹을 뜯어다가 섞어서 
밥을 지어준다.  
그 밥을 사람들은 먹지 못할 것이요 
개와 돼지가 먹을 밥을 우리에게 주니 
그것이라도 죽지 않으려고 먹어야 하는 우리의 고생은 
태산보다 더 하다.  
배가 고픈 우리 동포 배곯아서 죽을 거요 이레 살아 무엇하나  
차라리 죽어 없어지면 이 고생은 없지 하며 슬퍼한다.
우리 동포 죽자하니 청춘이요, 살자하니 고생이라 
아하! 우리 동포들아 어이하면 좋겠는가? 
 
우리 동포 울며 불면서 7~8일을 지난 후에 
우리 동포 두 사람이 밤 12시가 되어 배가 고파 못 견디어 
잠자다가 왜졸놈의 눈을 속이고 
벼라도 훑어 먹자고 하면서 굴 문을 나와서 가려고 하니 
배고프고 기운이 없어 주저주저 하는데 
운수불길한 우리 청년 두 사람이 왜졸놈의 눈에 띄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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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붙잡혀 들어온다.

앞전의 동료처럼 붙들어 매어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아닌 밤중에 무엇 하러 나갔느냐 하는 소리에 
우리 동포 두 사람은 살려고 풀을 뜯어 먹으려고 나갔다며 
사정하고 애원하며 바른대로 알려주니 
왜졸놈이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끄덕하면서 하는 말이 
너희 두 놈도 죽일 터이니 그리 알고 있어라 하면서 
손을 뒤로 결박을 하여놓고 왜졸놈은 돌아갔다.

두 사람은 결박당한 채로 밤을 새울 적에 
불쌍한 두 사람의 거동보소 두 사람 하는 말이 
‘우리 팔자 기박(奇薄)하다, 우리 팔자 기박하다. 
이 고생이 이러하고 요 모양의 신세로 이리 죽을 줄을 나 몰랐네. 
나도 남들처럼 태어났건만, 
때를 못타 이리하고 시를 못 타 이러하고 
에고 에고 내 팔자야 이 고생 하다가 
이런 신세로 이렇게 죽을 줄 나 몰랐다.’

신세타령 하는 형세 눈에는 눈물이 비 오듯 하고 
천지는 막막하여 보이지 아니한다.  
밤은 야밤중이나 되어 천지는 잠든 듯 고요한데 
울며불며 신세타령 하는 소리 찬란하다. 

새어가는 밤은 새벽을 지샜던가 계명성(鷄鳴聲)이 들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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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73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밤아 밤아 새지 마라 밤만 새면 나는 죽네’ 하면서 울다보니 
밤이 새여 동방(東方)이 밝아 해가 돋네.
 
그럭저럭 시간이 가서 오전 열시는 되었는데 
왜졸놈이 와서 하는 말이 

일주일을 굶겨 두었다가 죽인다 하니 

두 사람 하는 말이 
‘천상도 무심하다, 무심타. 독한 놈의 왜졸놈들 벼락도 안 맞나, 
하늘도 무심하구나. 왜졸놈아 죽이려면 하루속히 죽여 다오. 
물도 주지 않아도 죽지 않으니, 우리 목숨 모질기만 하도다’ 
‘모질도다 모질도다 우리 목숨 모질도다’ 한다. 

신세타령 하다 보니 하루 이틀 지나가고 
죽일 날짜가 가까워 오니, 
어느 날 시간은 오후 4시는 되었는데 
왜졸놈 하는 말이 ‘너희 두 사람은 오늘 막 죽인다’ 하면서 
나물밥을 한 손에 주며 먹으라고 한다.  

두 사람 하는 말이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 평생에 포은이 밥이니
이거라도 먹고 죽자 한다. 
먹인 후에 병정이 하는 말이 죽으러 가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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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삼경에 잠을 열고
침전에 앉아보니 
강산은 적적하고 
추억은 끝없도다. 
창문을 열고 보니 
고국 회포 간절하다.

어젯밤에 내린 비에 
만물이 잠을 깻것만 
지나가는 바람소리 
남의 간장 다 녹인다. 

흘러가는 파도성은 
고국 길을 구경 가자 
침침칠야 어둔 밤에 
죽장을 부여잡고 
사방을 따라가면 
고국강산 보이런가 

죽장을 재촉하여 
만약 천봉을 나서니 

만화사우곡

고국을 생각하여 
귀청도 불여 제성이라 
썩는 간장 다 녹이네. 

서해의 반야월은 
뜻 없이 지났도다. 
하염없이 썩는 몸이 
정신을 수습하여 
청죽(靑竹)을 마디 짤라 
퉁소를 만드나니 
어와! 세상 만향 
일곡을 들어보소. 

천지는 아득하고 막막한데 
하늘을 바라보니 
소로는 몇 천리면 
육로는 몇 천리요.
 
산을 넘어 가려는가 
물을 건너 가려는가! 
산은 첩첩 첨봉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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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75

물은 망망대해로다.
북두칠성 비친 곳은 
고국강산 완연하네.

선조유풍 좋을시고 
인심풍속 좋을시고
일변풍진 바람소리 
무궁경계 어떠신고. 

곤륜산 일지맥과 
백두산 제일봉의 
팔짱선녀 놀던 곳은 
이곳에도 있건마는
흘러가는 압록강은 
수삼 철에도 그 뿐이요
관동 별경 금강봉에서 
유람은 어떠신고. 

신선은 간곳없고 
만고풍상 비바람에 
헤어진 빈터만 남아있고 
만월초성 주초(柱礎) 밑에 
무궁화 한 가지는 
설풍에 홀로피어
새싹을 품었는가. 

태백산은 늙은 범이 
제소리 처량한들
무인지경 영남촌에 
인적인들 있을 손가
 
산골의 훈주매화 
설중에 홀로피어 
모진광풍 비바람에 
정절을 지키련만 
임조차 없는 너는
매화향기를 찾을 수 있나 
만경창파 대해상에 
백구(白鷗) 빛 그 뿐이라 

가자 서라 멈춘 자취 
다시 안겨 일보 이보 가다보니 
벗님 생각 절로 나서
산설고 물설고 
물 설은 무화지에 
그 곳을 찾아가니
 
어제 성턴 우리 벗님
오늘 보니 무덤이라
오호라 황천 가신 벗님네야
그대 이별 들어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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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너와 나와
무슨 팔자로 
좋은 세상 오지 않고 
차 세상이 생겨나서 
우리 벗님 되었는고. 

우리 둘이 맹세할 제 
수화금창 중이라도 
같이 가자하였더니 
너만 홀로 이곳 와서 
무섭게 오는 탄알 앞에 
무주공혼 되었구나.
 
여보아라 벗님네들 
이내 말씀 들어보소.
나라에 받친 목숨 
명령에 복종하여 
부모처자 이별하고 
고향을 떠나올 때 
각처에 모인 전우 
초면에 인사하고 
동고동락 맹세할 때 
우리의 벗님네들
나라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갈 때 

금의환향 하쟀더니 
돌아오지 못하는 
결말 없이 혼자가나.

기이하다 
이 세상 벗님네야 
그대 행적 용감터니 
난데없는 적탄아래 너와 
무슨 원수라고 
이다지도 많고 많은 
군의 몸이 부딪혀서 
용감하던 군의 몸이 
별안간에 황천이라 
어찌하랴 어찌하랴 
이 일을 어찌하랴

편작도 쓸데없고 
선약도 소용없네. 
이때는 마침 오경이라
 
소총 대포 올리는데 
벗님 정신 다시 차려
이내 손목 다시 잡고 
눈물겨워 하는 말이 
이 몸은 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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倭政時代 徵用去歸 苦生記 태평양전쟁 실기집 | 77

친우여 근근이 
살아온들 남아잔명
설지 않고 죽습니다. 
죽기는 싫지만은 
오대독자 이내몸이 
선조 득죄 이 아닌가.
 
대대 유전 착한마음 
적선 적덕 하옵더니 
자손 영화 있을 손가 
장부일신 독한 몸이 
다시 갱생 하련만은
무주 반사 
나의 피를 충혈이나 
될까이나
거년 삼월 한식날에 
요조숙녀 만날 적에 
송죽을 앞에 놓고 
백옥 잔에 술을 부어 
백년결의 맺은 후에 
종고낙지 하자 뜨니 
청송이 변하였나 
죽절이 굽어 재로다.

나는 간다. 

영결종천 나는 간다. 
머나먼 길 나는 간다. 
이말 한말 남겨두고 영영히

돌아가고 말았구나.

기가 막혀 한숨 쉬고 
다시 소리쳐 벗님을 찾아보니 
썩어가는 그대 몸이 
대답할리 만무로다.

현해에서 하던 언약 
어디 두고 혼자가나 
재차 삼차 불렀으나 
한 번가는 군에 영혼 
묵묵부답 말이 없네.

동천 하늘 새벽별도 
낭루로 보내도다. 
해동조선 명성지도
도처마다 많건마는  
무명소도 무화지에 
벗님 무덤 짓고 가네

천산도 알 리 없고 
신명도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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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오대독자 잡아가니 
호소할 곳 바이없다 

오호라 벗님네야 
기가막혀 말 못하네
너와 나와 둘이 와서 
이 몸 하나 돌아가면 
그대 부모 나를 잡고 
무슨 말씀 물으실까

할 말이야 많건마는  
무슨 말로 대답할까
 
정처 없는 청춘화상 
벗님 무덤 앞에 앉아 

강남 명월 달빛 아래 
먹을 갈고 붓을 들어
한숨 쉬고 눈물지며 
한 자 두 자 적어 
청조새 가는 편에 
말을 고국 전하여라. 

등불 아래 세상사람 
한줄 두 줄 보실 적에 
눈물도 흘리리라.
원한은 엇더실까.

檀紀 4281年 2月初 4日 謄書

徵用記念日記集

서기 1948년 2월 4일 등서

징용기념일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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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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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81

수기집 원문

대동아전쟁 실기집(大東亞戰爭 實記集)

[디지털화 협조] 국가기록원(www.archive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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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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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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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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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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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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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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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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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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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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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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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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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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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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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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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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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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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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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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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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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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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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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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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다음은 故장윤만님의 일제 강제동원 관계 명부로,

유족 동의하 일부 기록을 공개합니다.”

● 

소장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임시군인군속계경상북도(18)』 (관리번호: CTA0000131)

             [원소장처/생산처] 日本 厚生省, 『臨時軍人軍屬屆慶尙北道(その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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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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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 

소장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부로명표C2/26』(관리번호: CTA0000229)

             [원소장처/생산처] 日本 厚生省, 『

俘虜名票C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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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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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 

소장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유수명부(선박선박군-충승)』(관리번호: CTA0000549)

             [원소장처/생산처] 日本 厚生省, 『留守名簿(船舶船舶軍-沖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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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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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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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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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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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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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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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수기집 원문  故장윤만 일제 강제동원 명부류 | 115

● 

소장처: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일정시피징용자명부(경상북도 상주군)』(관리번호: CA0333179)

             [원소장처/생산처] 대한민국 내무부, 『日政時被徵兵者名簿(慶尙北道 尙州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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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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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

  고

우리 아버지가 강제동원 되어 끌려가실 때는 일제 강점기인 

1942년쯤이었고 아버지 나이 20대 중반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고향이었던 경북 상주시 공성면 우하리에서 세 남매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느 날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갑자기 동네 

청년들과 함께 일본 놈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셨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 매일 일어난 일들을 꼼꼼히 

일기처럼 적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써내려간 아버지의 ‘태평양 

전쟁실기집(太平洋戰爭實記集)’속에는 아버지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함께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억울한 고생 이야기, 

전쟁터의 처참했던 상황, 왜놈들과 왜병들의 천인공로 할 만

행 등이 생동감 있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