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 재단 이사장 발제문.hwp
1월 12일 외교부와 정진석 의원 주최 토론회의 발제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심규선입니다.
우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의 당사자로서 노구를 이끌고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재단의 특별, 자문위원을 비롯한 어르신들께 감사드립니다.
기자 여러분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10월 하순 취임 이후 많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으나, 사실 제 역할이 결정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생산한 정보도 많지 않아 제대로 응대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토론 주제와 관련해 재단의 움직임과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재단은 지난달 21일 이사회를 열어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정관 개정의 목적은 저희 재단이 대법원 승소 피해자 문제에 관여할 경우에 대비한 선제적인 조처였습니다. 재단의 기존 정관은 일반 유족들을 위한 지원 사업은 자세하게 명기하고 있으나 재판 승소 피해자를 위한, 더욱이 그들에게 현금을 지급할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관 제1조 목적에 “피해자에 대한 보상·변제·지원 등 일체의”라는 표현과 “한일 양국간 과거를 직시하고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는데 기여하는 한편”이라는 구절을 넣고 4조 목적사업 2호에 “일제 국외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피해보상 및 변제”라는 항목을 신설했습니다. 특히 “한일 양국간 과거를 직시하고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는 데 기여하는 한편”이라는 표현은 재단의 정관 변경이 비단 이번의 재판 승소피해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안목에서 재단을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정관 변경안은 이사 8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됐습니다.
정관 변경에 외부의 요청이나 지시가 있었느냐는 질문도 있었습니다. 10월 하순에 취임해 보니 재단 내부에서는 이미, 이번에 개정한 정관변경안보다 훨씬 더 많이, 더 자세히 고치는 정관변경안을 마련해 놓고 있었고, 저도 4차례의 민관협의회에 참석하면서 재단의 역할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정관을 변경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저는 재단의 기본 업무는 어디까지나 기존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있다는 점에서 변경하는 개소를 최소화했습니다.
그런데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재단의 새로운 업무에 대해 유족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와, 재판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이 재단이 주는 돈을 받기로 한다고 해도 줄 돈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재단의 새로운 임무는 재단의 위상과 역할에 변화를 주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사장 혼자서 독단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저희 재단에는 피해자 유족들로 구성된 특별위원회와 자문위원회가 있습니다. 연말과 연초 4일간에 걸쳐 영남, 호남, 중부, 강원, 인천은 직접 방문해서 일대일로 만나고, 서울과 경기도 위원들은 재단 사무실로 모셔서 재단이 처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드렸습니다.
그때 제가 드린 설명은 첫째, 재단이 재판 승소 피해자 15명 문제에 관여하는 기관이 될지 모르고 그럴 경우 우선은 청구권자금 수혜기업의 기부금을 받아서 써야 할 것 같다, 둘째 만약 포스코가 내도록 되어 있는 40억 원을 쓰게 될 경우에는 다른 청구권자금 수혜기업에서 최소한 40억 원 이상의 기부를 받아 이 돈은 유족들만을 위해 쓰겠다, 셋째, 유족지원을 위한 특별법, 소위 문희상법안 같은 것을 만드는 데 재단이 앞장서겠고 이를 위해 유족단체 전체를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별로 의사를 확인한 결과, 38명 중 36명이 지지해주셨습니다. 반대하는 2분 중 한 분은 포스코 자금을 쓰는 것에 대해, 다른 한분은 15명에게만 먼저 보상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재단은 내일 오전 특별위원회와 자문위원회 연석회의를 열어 위원들이 한꺼번에 모인 자리에서 연말 연초에 개별적으로 설명드렸던 내용을 다시 설명드릴 예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새해 2일 정관변경안을 행안부에 보고했고, 행안부는 9일 정관변경안을 승인했습니다.
앞으로 재단의 업무와 관련해 제가 품고 있는 생각을 밝히고자 합니다.
첫째, 이 문제와 관련해 법적 논쟁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안은 정서와 여론, 법의 논리를 함께 만족시켜야 하는 고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선은 피해자와 유족의 정서가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일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던, 저는 우선은 그런 태도로 이 문제에 임하고자 합니다.
둘째, 청구권 수혜 기업에 관한 것입니다. 청구권 수혜 기업은 재단에 기부금을 낼 법적 의무도 없고, 재단도 기부금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당연하게 청구권 수혜기업의 참여를 요구하거나 기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기업들이 억지로 이 프로세스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헌’이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피해자와 기업이 서로 윈윈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론인 여러분들도 피해자와 기업을 취재할 때 그런 점을 잘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재단은 피해자와 기업 사이에서 그런 역할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셋째, 특별법 제정에 관한 것입니다. 피해자 대표들이 재단의 새 임무를 양해한 것은 결코 15명의 권리를 변제해주는 것을 환영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피해 당사자는 거의 세상을 떠나 1800여명밖에 안 남아 계시고, 그 유족들조차 평균연령이 80살을 넘긴 마당에 마지막으로 특별법에 기대해 보자는 마음이 15명의 문제보다 더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은 그만큼 초조합니다. 그런 피해자들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특별법 제정 밖에 없습니다. 피해자 대표들을 만나며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 저로서는 15명의 문제를 맡게 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재단과 저의 역량을 수십만 피해자의 염원인 특별법 제정에 경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이사장이 그런 말을 하지만, 또 속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분도 계신다고 합니다. 이는 역대 대선에서 당과 후보들이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당선 후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 때문에 생긴 불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특별법의 제정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재단이 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입니다. 저는 피해자와의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예정입니다. 재단 내에 ‘특별법 연구지원팀’을 만들 예정이며, 이미 예산도 배정했습니다.
피해자와 그 유족들 모두가 똑같은 의견을 갖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15명의 문제에 대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듯, 국외사망자 및 행방불명자와 생환자, 군인·군속·징용(노무동원) 등 강제동원 유형의 차이, 징용장소가 국외냐 국내냐, 특정사건에 대한 예우 등을 놓고 유족 간에 이견도 있고, 의견수렴 과정에서도 진통이 따를 것입니다. 또 보상금보다는 명예회복이 중요하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서 특별법을 만드는 과정에도 일부 피해자들의 반대도 예상됩니다. 또 재판 승소자가 받게 되는 위자료가 지연이자 등으로 상당액이 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특별법이 제정되면 본인도 그 정도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피해자 유족들이 많은 것도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들 의견의 차이가 결코 특별법 제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절대 아니므로, 앞으로 있을 약간의 갈등을 보고 특별법 자체를 제정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단하지는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넷째, 장기적으로 재단의 역할과 위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재단은 국내에서 유일한 일제강제동원피해자를 지원하는 재단입니다. 그런데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피해자와 일반인의 연대와 유대에 덜 신경을 썼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재단이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지만, 피해자들의 수는 줄어들고 연로해지고 계십니다. 따라서 재단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동시에 재단의 역할변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단이 현재 수행하고 있는 학술, 연구, 채록, 유해조사 활동 등을 강화함으로써, 소위 ‘이행기 정의’를 구현하며 강제동원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미래세대에 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회통합과 국제사회에서 평화의 중요성을 일깨우도록 노력하는 것이 재단의 미래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피해자들을 만나며 정부가 상정하고 있는 재판 승소자를 위한 해법이 최상의 안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최선의 방안은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일본 기업이 배상하는 방안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일본을 상대로 오랜 시간 싸워온 피해자들이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음은 일본의 기업이 참여하고 사과하는 방안입니다. 이 또한 현재까지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소위 현금화, 강제집행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정부부터 일관되게 그런 방안은 피하는 것이 국익과 양국 관계에 바람직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따라서 현재 정부가 생각하는 방안보다 훨씬 더 좋은 방안이 있는데도, 그걸 얻을 수 있는데도, 굴욕적인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최선보다는 가능한 차선을 택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설명드렸습니다. 일본과의 협상권한도 없는 제가 외람되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동안 피해자들을 설득하며 이런 주장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을 설득해야 할 입장인 저로서는 일본이 현재 한국 정부가 고려하고 있는 프로세스에 어떤 방식, 어떤 수준으로든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민관협의회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그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일본이 미래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한국 정부의 노력에 호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 토론회가 비단 재판 승소자 15명의 문제만이 아니라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서, 양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로 기능할 것을 희망하며 발표를 마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