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일제강제동원 피해 진상조사 학술연구용역 최종보고서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책임연구원: 임성숙
공동연구원: 조미은
자 문 위 원: 이신철, 한혜인
내 삶의 현장 바로 옆에 있는 강제동원의 흔적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자지원재단이 최근 대법원 판결 승소자 지원(‘제3자변제’)과 우키시
마호(浮島丸) 명부 분석 기관으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재단의 한시적
인 업무입니다.
재단의 고유업무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의 아픔을
보듬는 일이고, 또 하나는 그 아픔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후세에
전하는 일입니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업이 전국합동위령제, 국내외 추도순례, 추모조형물
건립 및 관리, 유해조사, 위패관 운영 등이라면, 후자의 대표적인 사업이 국내외 학술대회와
연구활동, 진상조사, 구술채록사업 등입니다.
재단은 후자의 사업을 위해 2024년에도 4건의 학술연구용역을 진행했습니다. 연구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 강제동원 관련 유적 답사서 편찬(충청남북도 지역)
▶일제의 북한지역 병참기지화 정책과 한반도 내 동원실태
▶전시체제기 ‘다이쇼광업(大正鉱業)’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임금 실태 분석
▶아시아태평양전쟁기 경성권역 학생 강제동원의 실태
이 책자는 <일제 강제동원 관련 유적 답사서 편찬(충청남북도 지역)>이라는 연구보고서입니다.
일제는 1945년 패전이 다가오면서 조선인을 일본 본토나 아시아지역, 남양군도만이 아니
라 한반도 내에서 동원하는, 이른바 도내(島內) 동원도 강화했습니다. 그러나 여지껏 일본
정부와 일본 학계는 도내 동원을 동원 개념에 넣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은 도내 동원을 포함해 강제동원 피해자를 연인원 780여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
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학계가 도내 동원에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깊이 연구를 한 것도
아닙니다. 최근 학계에서 이를 문제 삼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도내 동원도 당연히 강제동원
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이 보고서는 해외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바로 옆에도 강제동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재단은 지역별로 강제동원 유적에 대한 답사서를 편찬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
발 간 사
다. 그 첫 번째 결과물이 바로 충청남북도 지역입니다. 재단은 앞으로도 매년 한두 개 시도를
대상으로 강제동원 관련 유적 답사서를 편찬할 계획입니다. 10년 정도가 지나면 전국 18개
시도 전체를 망라하는 강제동원 유적 답사서를 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 보고서는 충청남북도의 강제동원 피해 유적지를 직접 답사한 내용과 사진 등을 기본으
로 하고, 그 지역과 관련한 과거의 자료와 기사 등을 곁들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충청남도에서는 ▷태안군 안면도 자연휴양림 ▷서천군 장항역과 장항만 ▷서산시 풍천저
수지 ▷홍천군 광천광산 터 ▷청양군 구봉광산 터 ▷천안시 천안역과 직산광산(중앙광산)
터를 답사했습니다.
충청북도에서는 ▷음성군 무극광산 터 ▷제천시 엽연초 수납취급소(제천국제음악영화제
사무국) ▷충주시 호암저수지와 동양광산 터 ▷청주시 주성초등학교와 군시(郡是)제사공장
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답사지역을 보면 도내 동원지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식민지 시기
에 한반도 전체가 자원수탈의 대상이자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였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재단은 2025년에 광복 8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일반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광복
80주년: 우리 가족 이야기, 우리 마을 이야기」라는 글짓기대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글짓기대회에서 말하는 ‘우리 마을 이야기’라는 것이 바로 이 보고서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전국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 유적 답사서의 편찬을 마무리하게 된다면, 그 지역의
답사서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지식을 제공할
것입니다. 즉 강제동원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며,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이 보고서가 우리 주변의 강제동원 흔적을 찾고, 방문하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합니다.
2024년 12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이사장
Ⅰ. 충청 남·북도 지역 강제동원의 역사 ····················································1
Ⅱ. 충청 남·북도 지역 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6
1. 충청남도 지역 ·············································································································6
1) 개관 ··························································································································6
2) 강제노동 피해의 흔적 ····························································································6
가) 안면도 ·················································································································7
나) 풍전저수지 ·······································································································18
다) 장항역(옛 장항역 행 기차선로) ··································································27
라) 장항항 ··············································································································36
마) 장항미곡창고 ···································································································44
바) 장항제련소 ·······································································································54
사) 광천석면광산 ···································································································65
아) 구봉광산 ··········································································································73
자) 천안역 ··············································································································83
차) 직산광산 ··········································································································94
2. 충청북도 ··················································································································105
1) 개관 ·····················································································································105
2) 강제노동 피해의 흔적 ·······················································································105
가) 무극광산 ········································································································106
나) 엽연초 수납취급소 ·····················································································116
다) 호암지 ············································································································126
라) 동양광산 ········································································································137
마) 충북도청 본관 ·····························································································147
바) 옛 청주역사 ··································································································156
사) 주성초등학교 강당 (옛 청주공립보통학교) ·············································166
아) 군시제사공장 ·································································································174
차 례
1
Ⅰ
충청 남·북도 지역 강제동원의 역사
“총동원할 수 있는 노동예비군, 전조선에 67만 명”
흔히 우리는 강제동원의 역사를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일본 본토, 사할린, 만주,
남방지역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린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내에서도 강제동원이 실시되었다. 일본제국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 하면서, 조선총독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무 동원 정책을 수립하고,
한반도 내에서 강제동원 정책을 펼쳤다.
1937년 조선총독부는 18세 이상 노동 가능자의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1938년 그 결과를
발표했다. “총동원할 수 있는 노동예비군, 전 조선에 67만 명”으로 대부분이 “남조선에
대부대 집결”되어 있어 있다고 조사되었다. 이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영세농업자, 농업일용
노동자, 토건일용노동자 등이어서 이들은 일년내내 동원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역별로
동원 가능한 노동자 수를 다음과 같이 계산해 두었다. 이 중 남부지역 노동자 수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노동 동원 가능자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99,720명의 전남, 그 다음은 경남지역이었다.
그 다음 전북, 경북 순으로 동원가능 노동자 수가 많았다. 충남과 충북은 합계 98,747명으로
경남과 경북의 171,466명, 전남과 전북의 182,388명에 비해 그 숫자가 절반 정도로 현저히
적었다. 이는 절대적 인구가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남과 충북지역은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전남북이나 경남북과 인구구조가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충청도
지역은 탄광/광산지가 많아 동원가능 노동자 수가 적다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북부에 필요한 노동자를 남부지역의 동원가능 노동자 중에서 모집하여
지역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합계
인원
53,015
41,222
57,525
82,668
99,720
73,576
97,890
505,616
조선총독부 조사 남부지역 노동 동원 가능 인원 현황(1937)
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총독부 알선 이송”이라는 방법으로 동원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그 알선 이송
정책에 따라 동원되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니, “노동조건이 처음 계약내용과 달라”서
조선총독부 정책의 허구를 알게 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정착하여 노동에 임하지 않고,
노동 현장을 떠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총독부 알선이송”으로 동원된 노동자의 정착률이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겉으로는 한반도 북부의 사업체들에게 노동환경을 개선하라고는 하였지만,
1938년 이후에는 모집 단계부터 관의 개입을 허용하는 더욱 강제적인 “총독부 알선, 도
알선”의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노무 동원의 공급지로 전라남북도 지역을 우선대상지역
으로 하고, 두 번째로는 경상남북도 마지막으로 충청남북도의 순서로 노동자를 할당하여
모집, 알선했다.
총동원 가능 노동예비군에 대한 보도
( 동아일보 1938. 1. 26. 2면)
3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충청남도 당국도 도내 각 읍면 단위로 “애국노무단”을 조직하였다.
“노동궁민(労働窮民)의 노동능률 향상과 도망 방지를 목표로 도내 173개 읍면을 단위로,
20명 내지 30명 단위로 단을 선정하여 단장과 조장을 뽑아 그들을 중심으로 도내의 공사장
등지에 알선”하여 노동을 하도록 했다.
1939년 국민징용령이 발령된 이후에는 공장노동자 등에 직접적으로 징용령을 적용하여
기피자를 구속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조선총독부는 병참기지화된 한반도 북부
에 남부의 노동자를 강제동원하여 열악한 노동조건 하의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동원되는 “애국노무단”
: 어차피 강제동원, 북쪽보다는 월급이 높은 일본으로 갈까?
1939년 일본 정부는 일본 내외의 노무동원정책을 구상하면서, 일본의 탄광, 광산, 토목업
등 전시산업을 중심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동원하려는 계획을 조선총독부에 알려왔다. 조선
총독부는 한반도 북부의 계획도 있어,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 내지 등으로 동원하는 것에
곤란함을 표했지만, 결국 한반도에서의 노무동원을 허가했다.
한반도 남부의 노동자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 없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반도 북부로
강제동원되거나, 일본 등으로 강제동원되거나 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자들은 1939년 8월
일본으로 동원하는 노동자의 모집 당시, 한반도 북부보다는 월급이 좋을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따라 모집에 응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된 1941년, 조선총독부는 일본과 조선 내의 노무동원정책을
일원화하여, 일본 내각이 결정하는 방식에 따라 동원정책을 시행했다. 일본 내각은 조선총독
부가 실시하고 있던 ‘관알선’정책을 일본으로 동원하는 노동자 정책에도 적용하여 노동자를
소위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군대의 형태로 조직하여, 조선인 인솔자 및 대장을 두고,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는 체제로 만들어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 1944년 8월에는 ‘징용령’을 전면
적으로 발동하여, 국가가 노동자를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강제하였다.
일본은 ‘징용령’을 통해 국가의 통제를 더욱 수월하게 할 수 있는 노동관리체계를 만들었
다. 그렇지만, 그만큼 국가의 책임이 강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각 사업체에게
조선인에 관해서는 되도록 그간 진행해 왔던 “모집과 관알선의 방식을 사용”하도록 했다.
한반도에서 실시되던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방식 자체가 조선총독부가 깊숙이 관여하여 행정
력의 강제가 가해지던 것이었기 때문에, 실질적 국가책임이 강해지는 ‘징용’을 굳이 사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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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지 않으려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동원은 행정력을 사용한 강제였지만, 표면적으
로는 모집이나 알선 등의 이름으로 ‘자발’적이었던 것처럼 포장했던 것이 식민지 조선의
강제동원 정책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을 떠나고 싶지는 않아”
1938년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노무동원 정책으로 충남도는 노동자 알선기관인 충남이
민협회를 만들었다. 그동안 만주국을 비롯하여 한반도 북부에 보내는 이민 또는 공사장
노동자의 알선은 선만척식주식회사에서 해 왔는데, 이제 충청남도에서는 일본 등지의 노동
자 동원도 있어, 도지사를 회장으로 하는 충남이민협회를 구성하고, 각 군의 군수를 지부장
으로, 각 읍면장은 분구장으로 각 읍면장으로 임명하여, 행정의 말단까지 노무동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를 만들었던 것이다. 충남이민협회는 1939년 충남도의 알선노동자
계획 수에 맞추어 강원도 삼척, 함경남도 등지로 동원하였고, 일본으로는 홋카이도의 금광산
에 제일진을 동원했다. 이들 노동자는 천안역을 출발하여, 각지로 흩어져 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충남은 아직도 노동자의 여유가 많다”라고 하면서, 북부지역, 만주, 일본
등지로의 동원을 할당했다. 그러나 충청남도의 입장에서는 도내 노동자의 확보에도 은근히
힘을 기울였다. 특히 천안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직산금광 등에서 금 생산이 매우 활발했기
때문에 지역 내의 노동자를 확보하는 것도 충남도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충남
천안은 일찍부터 금 생산이 활발하여, 1939년 당시 57개소에서 채굴하였고, 노동자 수가
7천 명에 달했다. 금 생산량도 1930년에 6.2톤이었던 것이 1939년에는 31톤에 달했다.
금 생산으로 유명한 것은 천안 인근의 직산금광이다. 직산광산의 채굴량은 충청도 채굴량의
1/2에 달할 정도였다. 이 직산금광은 구한말에 들어온 시부사와 에이치가 영국 자본과 합작
하여 사금을 채금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천안시 청수동
수도산에 광산이 개발되어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광석을 나르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직산 지역은 금이 매장되지 않은 들이 없었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팠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일본 홋카이도의 금광산에서 충남의 노동자를 제일로 쳤던 것도
직산금광을 비롯해 금광이 많았던 충남 노동자의 숙련도를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사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05년 출범한 일제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는 한반도 내
동원현황을 조사한 바 있다. 조사 결과 한반도 내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피해자는 총 901명
으로 나타났고, 충남지역 출신 사망 피해자는 96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타지역에서
5
충남지역으로 동원되었다가 사망한 피해자는 3명이고, 충남지역 관내 강제동원 현장은 688
개소인 것으로 나타났다. 자료에 따르면, 강제동원으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 중 충남출신이
다섯 번째로 많았으며, 전남(295명), 전북(148명), 경북(131명), 경남(106명) 순으로 나타
났다. 그리고, 96명의 사망자 중 10대가 19명으로 20%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역별
로 강제동원 현장이 천안 101개소, 홍성 64개소, 청양과 공주가 각각 62개소, 보령 56개소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이곳들이 제대로 조사된 것은 아니다.
독립기념관 ‘보은의 동산’에 있는 강제동원피해자상
충청북도의 예를 들면, 강제동원 피해신고 13,245건 중 12,932건만 사실조사 및 심의를
마무리했다. 만주에 동원된 322건은 피해자가 되지 못했다. 이와 같이 강제동원 피해에
관련한 진상규명은 10여 년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2023년
충청남도에서는 일제강점기 자행된 강제동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충남 도민의 뜻을 모아 '충남지역 강제동원 노동자상'을 독립기념관 보은의 동산에 설립하였다.
숨겨져 있는, 조사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강제노동의 장소를 돌아다니며 찾아내
고, 고증하고 기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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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Ⅱ
충청 남·북도 지역 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1. 충청남도 지역
1) 개관
일제강점기 충청남도는 1개의 부, 14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개 부는 도청소재지
인 대전부, 14개의 군은 대덕군, 연기군, 공주군, 논산군, 부여군, 서천군, 보령군, 청양군,
홍성군, 예산군, 서산군, 당진군, 아산군, 천안군이었다. 1935년의 인구는 1,526,825명,
전시체제기에 접어든 1940년에는 1,575,945명, 1944년에는 1,675,479명으로 점차적으
로 인구가 증가했다. 1944년 인구조사에서는 일본인이 25,829명, 중국인 등 그 외의 민족이
909명, 조선인이 1,648,741명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일제강점기의 충청남도는 금광으로 유명했다. 천안군과 공주군, 예산군에
걸쳐있는 금광은 충남지역의 주요 경제원이었다. 대부분이 일본인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었
고, 친일파로 유명한 박춘금 또한 채굴권을 가지고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전시체제기에도
충청도의 금채굴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다.
2) 강제노동 피해의 흔적
지역
장소 (경로)
유적지
태안군
안면도
안면도 자연휴양림
서천군
장항역-장항만-장항미곡창고-장항제련소
장항역, 장항만,
현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
현 엘에스(LS)메탈 장항공장
서산시
풍전저수지
풍전저수지
홍성군
광천석면광산
구 광천광산 터
청양군
구봉광산
구 구봉광산 터
천안시
천안역-직산광산(중앙광산)
천안역, 중앙광산 터
충청도 지역 조사 대상 총괄표
7
가) 안면도
① 개관
고려시대부터 안면도의 나무를 조정의 용재로 활용하거나 선박의 자재로도 써왔다는 기록
이 있어 당시부터 국가가 산림정책을 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가는 것을 금하였으며, 중종 때는 안면도 숲을 국가보유 산림으로 지정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처럼 1908년 산림법을 제정하여 산림을 조사(‘林野
調査’)하였고, 사유지가 있는 경우 신고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 법령은 지정된 기간 내에
신고하지 않으면 그 토지를 국유화 토지로 간주하는 부당한 법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숲의
민간 소유는 금지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산림 사용은 마을 주민의 재량에 의한 것이었던
점과 달리 총독부의 폭력적인 산림정책의 결과 농민들의 생활은 궁핍하여 산림조사에 대한
반발이 심해져 불복 제의, 재심 제의가 급증하였다.
충청도 지역 조사대상 강제동원 유적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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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총독부는 안면 국유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920년대 민간기업에 불하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그러나 입찰되지 않아 최종적으로 일본 규슈(九州)지역 재벌인 아소상점
(麻生商店)이 낙찰하여 1927년 ‘안면도임업소’는 섬 산림의 86%를 소유하게 되었다. 규슈
탄광 재벌로 알려진 아소상점은 당시 탄광용 갱목을 확보하기 위해서 안면도 산림을 소유하
고자 한 것이었다. (*이때 아소상점 사장은 현재 일본의 극우 정치인이자 수상까지 역임한
아소 다로(麻生太郎)의 증조할아버지가 된다.)
아소상점의 안면도임업소 경영과 관리를 전적으로 맡았던 하야시 세이죠(林省三)는 1921
년부터 1941년까지 안면도에서 살면서 주로 1) 갱목을 위한 산림채취사업, 2) 송진 채취,
3) 간척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외에도 산림보호조합 사업도 전개하였는데 이는 나무도벌을
감시하고 베어낸 자를 처벌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임업소가 안정적으로 산림을 관리하고 자원을 확보하여 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사업으로서,
결국 자원 수탈과 지배의 일환이었다. 현지에서 임업에 종사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조합이 있었던 것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송진 채취를 위해 소나무를 베었던 흔적
( 경성일보 194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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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과 그 후 중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1936년부터 일제의 국책사업이었던 송진 채취
가 활발해졌다. 안면도 소나무는 질이 좋아서 구매자들도 늘었다. 1937년 전시체제기 송진
은 군수자재로서 항공유, 화학제품, 선박 내부 장비 도료로 사용되어 군산, 인천, 그리고
만주 등으로 팔려니가 상당한 이익을 냈다고 한다. 1941년 경성일보에는 당시 송진 채취
작업의 모습이 실렸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임업소에서 일했던 안면 주민들에 의하면 징병을 면제해주는
대신 송진을 채취하라고 말을 듣고 일한 사람이 있었다. 또한 허가 없이 나무를 베면 징용으
로 간다든가, 송진 작업을 했기 때문에 징용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러한
언설에 상징되듯이 당시 안면 조선인들에게 징용과 징병이란 피하고 싶었던 것으로 인식되
어 있었다.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속에서 송진 채취 작업은 징용, 징병보다 그나마‘나은
일’이었던 것이다.
1941년 10월 13일 자 경성일보에는 아소임업소의 간척사업과 송진 채취사업이 현지
조선인 주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줌으로써 안면도를 제국 일본과 조선이 ‘공존공영’
하는 ‘평화적인 향토’로 찬양하는 기사가 실렸다.
해방 후 안면도의 소나무와 산림은 한동안 관리되지 않아 방치되어 나무를 베어내는 일들
이 빈번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 충청남도가 관리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안면도자연휴
양림이 자리 잡아 관광지로서 유지, 활용되고 있다.
안면도 소나무 채취를
찬양하는
기사( 경성일보
1941.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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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그 많은 나무들이 전쟁에 동원되다: 안면도
▣ 주소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안면대로 3195-6
▣ 위치
11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교통
대중교통 이용 시
[기차] 천안역에서 하차하고 시외버스 이용.
[버스] 태안터미널 - 안면버스정류소 하차, 영목방면.
[입장료] 하절기와 동절기, 개인과 단체, 연령에 따라 변동됨. (그 외 주차요금 발생) * 안면도
자연휴양림 홈페이지 참조.
▣ 유적 현황
- 일제 식민지시기 송탄유를 채취하였던 곳은 현재 안면도자연휴양림이 들어서고 있다.
길 건너 수목원지구가 있으나 송탄유 채취 흔적은 휴양림 지구에서 볼 수 있다.
- 휴양림 지구에 있는 산림전시관에는 안면도 임업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으며 송진을 채취한
안면송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휴양림 지구에서 볼 수 있는 흔적이 과연 일제강점
기 채취의 흔적인지 확실하지 않다. 해방 후 채취한 작업의 흔적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어
과학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 일제강점기 안면도 송진 채취, 그리고 아소상점이 완공하지 못했으나 착공하였던 간척
터에 관한 표시나 설명은 없다. 그러나 자료에 의하면 현재 승언리 면사무소 자리에 아소
임업소 사무실이 있었으며 그 주변에 일본인들의 주거지역과 주재소(관리소)가 있었다고
한다.
▣ 참고문헌
하야시 세이죠(최석영 역), 최석영, 오석민, 김월배, 일제 강점기 안면도와 아소상점 , 태안
문화사, 2020.
鈴木文子, 「記録と記憶の比較から-朝鮮安眠島における植民という日常」, 文学部論集 94,
佛敎大學文學部,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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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사진
자연휴양림 지구 입구
휴양림 내 설치된 안면송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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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산림전시관
산림전시관 내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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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 내 송진 채취 소나무
휴양림 내 송진 채취된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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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휴양림 내 송진 채취된 소나무
휴양림 내 송진 채취된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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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지구 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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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나) 풍전저수지
① 개관
풍전리는 2013년 2월 기준으로 면적은 2.29㎢이며, 총 80세대에 2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군내·역말·팥골[두곡]·풍전들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
졌지만 역말은 풍전리의 중심마을로 조선시대 공문서 전달과 관리들이 왕래할 때 숙박 제공
과 관물 수송을 위해서 만든 지명에서 유래됐다. 또 옛날에 밭에다 팥을 많이 심어 얻어진
팥골이 있다.
풍전저수지 건설 공사로 농토도 줄어들고 수몰지역 주민들이 인근 성리, 갈산으로 이주하여
주민 수도 감소하였다. 그래서 인지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풍전저수지는
농업 관개용 1종 저수지이다. 1942년 1월 21일 착공해 1944년 12월 29일 준공되었다.
풍전리에서는 풍전저수지 건설 이전에도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물을 제공하기 위한 제언
(堤堰) 건축 공사가 있었다. 매일신보 1935년 3월 28일 자는 「풍전리 제언 소작인이 완성」이
라는 기사를 실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풍전리 제언 소작인이
완성 ( 매일신보
1935.3.28.)
▣ 기사 내용
“서산군 인지면 풍전리 제언 복개수 공사는 현재 농한기를 이용하여 5일간 250명의 인부
출역으로 완성할 예정인데, 이 지구에서 그 익을 받는 면적은 15정(町) 2반(反) 5무(畝)
외(外)이고, 지주 수는 25명으로 지주와 소작인의 협력으로 자진 출역하여 착착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개수공사의 완료에 의하여 금년도의 관개사업은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19
풍전저수지는 1982년 재보수 공사를 통해 배수량이 두 배 증가하였다. 제당 형식은 균일
형 필댐(fill dam)이며 취수 형식은 사통형이다. 2011년 기준으로 구역 면적은 751㏊이고
제방의 높이 12m, 제방의 길이는 648m이다. 총저수량은 262만 2,800톤이며, 유효 저수량
은 261만 2,200톤, 사수량(死水量)은 1,600톤이다. 유역 면적은 1,110㏊이고, 홍수 면적
76.12㏊, 만수 면적 70.25㏊, 수혜 면적은 655.1㏊이다. 가뭄 빈도는 10년이며, 홍수 빈도
는 100년이다. 서산 지역에 있는 저수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저수지이며, 규모 면에서는
고풍저수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
2024년 풍전저수지 둘레길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2024년 올해 서산시는 풍전저수
지의 수변경관 자원을 바탕으로 농촌지역의 정주환경을 개선하고 지역관광 네트워크를 구축
해 시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둘레길과 휴게 쉼터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시에 따르면 풍전저수지 둘레길 조성사업은 총사업비 60억 원을 투입해 약 5.3㎞ 규모의
둘레길, 휴게 쉼터 6개소, 연결목교 4개소, 기타 편의시설 등을 설치한다. 시는 2022년
11월 사업을 위해 도비 10억 원을 확보해 환경영향 평가를 거쳐 한국농어촌공사와 협의를
마쳤으며 2023년 10월 사업 대상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주민설명회를 개최했다. 주민설명회
를 통해 제시된 의견을 반영하고 2024년 4월 기본계획 및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했으며
2025년 7월 준공을 목표로 6월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할 예정이다. 시는 조성이 완료되면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여가 공간으로서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서산 풍전저수지 둘레길
조성사업 계획(「서산시,
풍전저수지 시민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박차」, 스카이데일리
2024.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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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강제노동의 기억을 찾아서 : 풍전저수지(豐田貯水池)
▣ 주소
충남 서산시 인지면 풍전리 164-1
▣ 위치
21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풍전저수지
풍전저수지 관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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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교통, 접근(서산공용버스터미널 출발 기준)
대중교통 이용 시: 서산공용버스터미널 – 풍전리 하차 - 도보 787m
(총 4.1km, 소요시간 약 25분, 가장 단거리 접근 방법임)
▣ 유적 현황
- 현재 풍전저수지는 치수탑과 저수지로 올라가는 곳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고 자물쇠로
잠겨 있다. 답사팀은 사전에 관리소에 연락해서 방문 목적 등을 밝히고, 방문 일에 철문
가까운 곳에서 관리소 담당자(김동흥 선생님)를 만나 함께 올라갈 수 있었다.
- 풍전저수지 관리자: 40년 이상 저수지를 관리하고 있으며, 어릴 때 저수지에서 수영도
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때부터 풍전저수지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고, 40년 이상 풍전저
수지를 관리한 분으로서, 그분이 부모 또는 조부모 세대한테서 들어왔던 이야기, 그 지역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일제강점기 이야기 등 다양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그분으로부터 풍전저수지와 그 지역 관련 구술을 받을 필요가 있다.
- 초록색 풀들이 있는 곳이 저수지 둑이고, 두 사람 사이로 멀리 저수지 물이 보인다. 방문한
날 비가 많이 와서 저수지 둑길을 걷지는 못했다.
23
▣ 현장 사진
저수지관리소(67-2번지)와 치수탑(오른쪽 붉은 박스 안)
저수지 철문을 여시는 김동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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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저수지 물이 넘치면 흐르는 저수조(오른쪽 바닥)
풍전저수지 둑 위에 서 있는 치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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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수탑 앞에서 관리 담당자와 답사 방문자가 대화하는 모습
풍전저수지 둑이 있는 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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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둑에서 바라보는 풍전저수지
▣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jindo.grandculture.net/seosan/toc/GC04101111>
『내포시대』 (2014.8.13.) 「마을공동체탐방-서산시 인지면 풍전리」
<https://www.np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45>
『스카이데일리』 (2024.5.29.) 「서산시, 풍전저수지 시민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박차」,
<https://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33873>
* 풍전저수지 관리소: 041-662-2064
풍전저수지나 그 지역 관련 상세한 이야기 등을 듣고 싶을 때는 관리소 담당자에게 미리
연락하면 도움이 되지만, 그냥 편하게 가서 주위를 돌아볼 수도 있다.
27
다) 장항역(옛 장항역 행 기차 선로)
① 개관
일제강점기 국영철도는 대륙진출을 위한 종단철도와 간선철도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
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지방 개발을 촉진하고 간선철도의 배양선(培養線)으로 삼을 목적으
로 사설철도(私設鐵道, 이하 사철) 조성 방침을 세웠다. 1912년 총독부는 「조선경편철도령
(朝鮮輕便鐵道令)」을 제정·공포하였고 사철에 대해 보조금도 지원하였다. 장항선은 조선경
남철도주식회사(이하 ‘경남철도’)에 의하여 건설·운영된 사철 ‘충남선’이었다. 경남철도는
경기선과 함께 두 개의 철도를 건설·운영하고 있었다.
㈜경남철도가 개통한 장항선과 안성선
*출전: 『조선공론』 1931년 8월호; 심승희, 현지은,
「장항선의 기능 및 연선 지역의 변화: 일제강점기부터
서해선과의 연결까지」, 『문학과 역사지리』33-1,
2021.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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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장항선은 1921년 12월 천안∼온양온천 구간을 시작으로, 1931년 천안∼장항에 이르는
전체 노선을 개통하고, 1933년 장항잔교역까지 연장 개통했다. 당시 서울(경성)에서 장항까
지 열차 소요시간은 7시간이었다. 경기선은 천안역∼안산∼장호원까지의 노선이었다. 이들
노선의 지리적 위치를 통해 경남철도가 장항에서 장호원에 이르는 서남평야와 중부지방을
잇는 평야 철도를 운영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 충남선은 장항선으로(1955),
경기선은 안성선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경남철도의 노선이라는 의미에서 장항선과 안성선
을 함께 일러 ‘경남선’이라고도 하였다.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에 따라 1920∼1930년대 장항선의 주요 기능은 충남과 경기도 일대
의 미곡을 일본으로 운반하는 것이었다. 장항선 개통은 1937년 준공된 장항제련소(당시
㈜조선제련)의 입지 선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제는 전쟁물자 구매에 필요한 금을 생산하기
위해 제련소 건설을 추진했는데, 항구와 철도가 연결된 장항이 최적지였다. 당시 충청도에는
중소형 금광이 다수 존재했고, 거기서 채굴한 광석을 장항선을 통해 가져와 제련한 다음
항구를 통해 이출하려고 구상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경제성이 낮은 광산이었기에 장항제
련소는 1940년대부터 수입 원광석에 의존했다. 이를 근거로 장항제련소의 물자 이출입은
주로 항구 위주로 이루어져 장항선에 미친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경남철도의 운수 수입 추이를 살펴보면 장항선 개통 초기에는 화물 운송에 중점을 두었으나,
점차 여객 운송 기능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장항역 ( 조선신문 1936. 3. 19.)
29
1946년 5월 10일 ‘사설철도 및 부대사업 일체에 대한 국유화 조처’에 따라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대도시나 큰 산업단지를 끼고 있지 않았던 장항선은 수도권 광역 전철화 및 군산선
통합 전까지 단선비전철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로 인해 수송 기능이 도로교통에 밀리게
되었다. 장항역은 2000년대 초반까지 여객 열차가 오가는 중요한 역이었으나, 이후 노선의
일부가 폐지되고 역이 운영을 중단하면서 선로가 활용되지 않게 되었다. 현재 장항역 부근의
선로는 지역 개발이나 보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부 구간은 철거되었고, 일부 구간은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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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장항역으로 향하는 옛 기차 선로
▣ 주소
서천군 장항읍 신창리 장항항 입구 앞 일대
▣ 위치
31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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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 남・북도 -
▣ 교통, 접근 방법(장항버스정류장 출발 기준)
대중교통 이용 시: 장항버스정류장에서 버스(23번, 303번) - 공단주유소사거리 또는 신흥
아파트 하차, 도보 약 29분 소요(약 2km)
33
▣ 현장 사진
오늘날 장항역 모습
장항제철 생산물 등을 나르던 옛 장항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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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 남・북도 -
시멘트로 덮인 옛 장항 철길
통행을 위한 나무로 메워진 옛 장항 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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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역 바로 뒷길에서 건너편으로 가로질러 달렸음을 보여주는 철길 흔적
장항역 앞 큰길의 장항선이 지나가던 철길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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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 남・북도 -
라) 장항항
① 개관
장항은 금강 하구의 작은 포구로서 현재의 행정 주소는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제 수도 부여의 관문이었으며, 나당 전쟁 때 최후의 격전지 기벌포(伎伐
浦), 왜구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암진성 등을 통해 군사기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
대까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는 크게 활발한 면이 드러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장항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1920~1935년 일제는 산미증식계
획을 추진하면서 조선에서 전국적인 쌀 수탈을 진행하였다. 충청남도 일대에서도 미곡을
운반하기 위한 대안적 항구가 필요하게 되었고 장항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 대지주인
카타끼리(片桐和三)를 중심으로 한 서천수리조합은 장항 시가지 매립, 장항항 건설을 조선총
독부에 제안하였고, 이후 민간 주도의 항구도시로 장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시기별 장항의 간석지 매립 규모
*출전: 박재민, 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2013.
37
장항포구에 개발 바람이 크게 불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초부터이다. 조선경남철도주식
회사가 부설한 충남선(1955년 장항선으로 개칭, 이하 장항선) 철도의 종착역이 된 것이
계기였다. 경남철도는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미곡을 장항선으로 운반해서 이출한다는 계획
이었다. 따라서 미곡이 집산되는 장항의 항만 능력 구축은 장항선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도
관건이 되는 사업이었다. 그렇게 초기 장항항 개발은 경남철도 주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1931년 9월 4일 자 동아일보 기사 「급속도로 발전하는 신흥된 장항항, 충남미 집산지」
에서는 “장항은 본시 무가(無價)의 벌판으로 갈대가 욱어진 펄이었던 것이 경남철도가 장항
을 종점으로 하고 철도의 개통을 보게 되자 일약 신흥도시, 신흥항구가 된 곳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1. 9.4: 장항선을 소개하는 기사
장항항 개발은 충청남도와 도회라는 식민지 지방 행정권력, 지역 유력자 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주변 지역과의 경쟁도 촉발하였다. 즉 금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대안항(對岸港)인 전라북도 군산항과 장항항과의 경합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군산항
은 호남선과 연결되면서 미곡 이출항으로 1912년 개발되어, 경기·충청·전라 등 조선의
서부 곡창지대 미곡을 집산하여 일본으로 보내는, 서해안 대표적 이출항으로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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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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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1930년대 경남철도가 대일 미곡 이출이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장항선과 연결한 장항
항을 개발하는 것에 대해, 군산은 그동안 장악했던 미곡 물류를 빼앗으려는 것으로 인식하고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한편 1931년 장항항에서는 장항항분쟁소요사건이라는 부두노
동자들에 의한 쟁의가 발생하였다.
1935년 장항제련소 건설은 장항항 개발을 가속했고, 항구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미곡반
출항과 함께 공업항적 성격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그 과정은 식민지 중앙권력의 본격적
개입을 통해 장항항의 모습을 바꾸는 과정이었다.
일제강점기 장항 시가
(「발전하는 장항 시가 일부」, 조선신문 1936.3.19)
이처럼 일제강점기 장항항은 일본으로 미곡을 수탈해간 ‘식민지 미곡 침탈’의 장소였다.
오늘날 장항 지역주민이 장항항과 관련하여 장항선, 미곡창고, 정미소와 노동자, 우마차
등을 기억하는 것도 그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항에서 일어난
토지매립, 항구와 제련소 건설 등은 장항에 있던 전통적 주거지의 해체와 새로운 주거지의
형성을 발생케 하였다. 즉 산업화 이전 장항 내 전통적 중심 주거지였던 수동리와 지구지는
산업화에 의해 해체되었고, 황금정과 창선동은 장항의 중심주거지로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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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애정으로 키운 쌀, 조선을 떠나다: 장항항(長項港)
▣ 주소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산로 232
▣ 위치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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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지도
▣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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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접근 방법
대중교통 이용 시: 장항버스터미널 승차(23번 버스) - 공단주유소사거리 하차 – 도보
762m, 약 19분 소요
도보 약 2.1km. 소요시간 약 30분
▣ 유적 현황
장항에 건설된 잔교는 부잔교(浮棧橋)이다. 부잔교를 설치한 것은 서해안의 특성상 그
지역 조수간만의 차이가 7m에 달했기 때문이다. 수면의 높낮이가 수시로 변하는 곳에서는
부력을 이용하여 배와 다리의 높이를 맞춰주는 부잔교를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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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사진
1930년대 잔교(『조선신문』1936.3.19.)
B잔교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2024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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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교(A,B 잔교) 중간 지점 모습: ‘1938년 개항’이라는 푯말을 볼 수 있다.
여전히 장항을 지키고 있는 2개의 부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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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장항미곡창고
① 개관
장항항은 충남과 경기 지역에서 생산한 쌀을 일제가 일본으로 반출하는 곡물 출항 창구였고,
그 중심에 미곡창고들이 있었다. 현재 장항항에 남아 있는 옛 미곡창고 건물은 2개이다.
하나는 장항읍 장산로 323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 부근인 장항로 156번길 17(장항읍
창선1리 264)에 있다. 장산로 323 소재 옛 미곡창고는 1936년 지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전국에서 수탈한 곡식과 자원을 보관하던 곳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미곡창고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2010년 6월 서천군에서 거점 자원의 하나로서 개인 소유였던 창고를 매입하였다.
2012년 공장미술제를 거쳐 2013년 리모델링을 통해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탄생했
다. 건물 내부는 철근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상부에 목조 구조물로 만든 골격 등이 고스란
히 남아 있으며, 등록문화재 591호이다. 누구나 무료로 작품 전시와 공연을 감상하고, 체험
까지 즐길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장산로 317번길 미곡창고는 1941년에
지어졌으며, 현재 개인 소유로 건물 외관상으로는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듯하다.
일제강점기 장항 내 주요 미곡 관련 시설과 운반 경로
* 출전: 박재민,『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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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검사 장항출장소 (『조선신문』 1936.3.19.)
과거 장항에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마차 모습. 앞에 작은 바퀴가 달려 있다.
*출전: 박재민, 『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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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장항미곡창고 (현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 등)
▣ 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산로 323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으로 리모델링하기 전 모습)
서천군문화예술창작공간 근처에 있는 다른 미곡창고, 현 개인 소유)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항로 156번길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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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
▣ 상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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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위성지도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장항역주차장∼약 29분(21번, 106번 버스, 4.7km, 가장 단거리 교통)
49
▣ 유적 현황(현장 사진)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외모를 단장한 장항의 한 미곡창고
장항미곡창고였음을 알리는 안내판
5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변신한 내부 공간 안내도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 안에서 본 바깥 풍경
51
옛 장항미곡창고 기둥들 사이로 전시한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
옛 장항미곡창고 벽과 기둥들 사이로 전시한 장항 관련 사진들
5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 근처의 옛 미곡창고 모습을 많이 간직한 다른 미곡창고(장항에 현존하는
미곡창고는 ‘서천군 문화예술 창작공간’과 이곳으로 모두 두 개).
미곡창고가 훗날 어물을 취급했던 곳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생선 그림판들
53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옛 미곡창고 입구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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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바) 장항제련소
① 개관
일제는 대 중국전쟁을 앞두고 군사와 물자 확보를 위해 금이 절실히 필요했다. 일제가
조선에 제련소를 건설한 것은 일본제국주의 핵심 국책인 ‘산금정책’의 일환이었고, 그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직접 개입이 따랐다. 장항제련소는 북한 진남포 제련소(1915), 흥남제련
소(1933)에 이어 남한에 최초로 건설된 제련소였다. 장항이 제련소 건설 지역으로 결정된
주요 요인은 1930년대 전반기 미곡 이출을 위해 구축된 교통인프라, 즉 장항선(충남선)과
장항항 개발에 주목한 것이다. 즉 ‘육해로 교통이 편리한 임해(臨海) 지점’이라는 것이었다.
1932년 11월 식산국은 남한에 국영 금광제련소 건설을 발표하였고, 1934년 조선식산은
행 계열사 성업사(부동산매매업)는 제련소 건설 예정지로 장항항 부근의 농지를 은밀하게
매입하였고, 6개의 금광도 매입하였다. 1935년까지 항만개발이 집중되었던 반대편 전망산
아래의 부지조성과 공장건설은 1년 정도 만에 완료되었다. 주요 공사 내용은 부지조성을
위한 약 2만 평의 매립, 방조제 공사, 광석 하역 전용 잔교 공사(2기), 공장 내 광석 운반을
위한 경편궤조(輕便軌條), 전망산에 이르는 연도(烟道), 연돌(煙突) 건설, 공장건물 건설 및
관련 기계 기구 설비공사 등이었다. 공사비는 총 83만 엔이었다. 제련 설비는 일본 도쿄에
있는 오츠카(大塚)철공소가 제작하였다.
장항제련소 부지 및 설비 배치도
55
초기 장항제련소 건설로 인해 전통적 거주지에 살던 주민들은 강제 이주 명령을 받았다.
강제 이주는 기존 거주민에게 있어 삶의 터전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강압적 명령에
대한 저항은 두려움과 분노만을 남기게 되었다. 마을의 이전과 제련소의 건설로 인해 과거
일상적 삶의 터전에서 지역주민들은 배제되었다. 또한 전망산도 자유롭게 거닐 수 없는
공간이 되었으며,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장소로 바뀌었다. 특히 제련소 둔 턱에 있던 일본
신사는 접근할 수 없는, 금지된 공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산업화에 의한 주거지 변화 과정 : 본 배경 도면은 장항항 계획도면으로 신창리 일대 도로 등 일부는
현재와 다르다.
* 출전: 박재민, 『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2013.
5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장항제련소는 1936년 1월부터 시험 가동에 들어갔고, 6월 3일 성대한 준공식을 하였다.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가 참석하여 축사에서 “전국 도처에 있는
금광을 개발하여 산업진흥을 도모해야” 한다는 취지의 축사를 하였다.
1930년대 장항항에서 바라본 제련소 전경(전 장항읍장 박수화 제공)
장항제련소 초기 전경 (장항읍사무소 제공)
* 출전: 박성신, 「근대 산업도시 장항의 형성과 변천 그리고 산업유산」 『한국지리학회지』 9-1, 2020.
57
장항제련소는 100톤 용광로(角爐), 30톤 환로(丸爐), 5톤 지상로, 소결로(燒結爐) 각 5기를
이용한 건식제련을 통해 1개월 당 금 150kg, 은 1,000kg을 제련하고, 기타 전기제련 설비를
통해 전기동 100톤의 생산능력을 지닌 규모였다.
장항제련소 내 용광로 (『조선신문』1936.3.19)
<장항제련소 생산량과 종업원 추이>
*반올림한 수치임
*출전: 민족문제연구소 편, 「소화18년 제84회 제국의회 설명자료(광공)」,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21권,
2000,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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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장항제련소는 1941년 최전성기를 기점으로 조련 주종제품인 금 생산에 난국을 맞게 되었
다. 1943년 금산정비령이 발효되며 금광은 일제히 폐광되었고 제련소는 거의 정지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해 11월 일본계 삼성광업으로 경영권이 이양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청이 관리주체가 되어 장항제련소의 운영을 시도했으며, 1950년 100톤의
용광로를 가동하였으나 곧 한국전쟁을 맞게 된다. 1970년대 말 장항제련소의 가동이 극대화
되며 장항의 대기오염은 심각해진다. 장항제련소는 1989년 장항제련소 제련 공정이 폐쇄되
었다. 장항의 오랜 상징이며 정체성이 투영되었던 장항제련소 굴뚝은 이제 번영과 발전이
아닌 옛 장항을 이야기해주는 상징적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장항제련소 주변의 토양오염 범위
장항 후망산에 남겨진 대기오염의 흔적
* 출전: 박재민,『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서울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2013.
59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장항제련소 (長項製鍊所)
▣ 주소
장항읍 장암리 78-6(현재 엘에스메탈 장항공장)
▣ 위치
6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6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장항버스공용정류장 ∼ 신흥아파트 하차 ∼ 도보 약 2km(총 거리
3.2km) (소요시간 약 35~40분, 가장 단시간 소요 교통) 장항버스공용정류장에서 23번
버스를 타고 갈 때 코스
▣ 유적 현황
오른쪽에 전망산과 당시 제련소 굴뚝으로 세워졌던 굴뚝이 보인다. 공장 입구 맨 뒤쪽에
붉은색 건물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건설되었던 장항제련소 관련 건물이라고 한다. 현재
외부인의 방문은 금지되고 있다.
일제가 장항을 제련소 건설 지역으로 결정한 계기 중 100m 높이의 바위산인 전망산에
배연시설을 설치할 수 있고, 넓은 간석지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자연조건이었다고 한다.
6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현장 사진
옛 장항제련소 자리: 현재 엘에스(LS)메탈
장항 전망산에 여전히 서 있는 옛 장항제련소 굴뚝
63
▣ 참고문헌 (장항항, 장항미곡창고 등 장항 관련 전체)
김민영·김양규 공저 (2005)『철도, 지역의 근대성 수용과 사회경제적 변용-군산선과 장항선』,
선인.
김응식 (1994) 『일제하 한국의 항만 노동운동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
논문.
민족문제연구소 편(2000), 『일제하 전시체제기 정책사료총서 21권』.
박성신(2020) 「근대 산업도시 장항의 형성과 변천 그리고 산업유산」 『한국지리학회지』
9-1.
박재민(2013)『장소기억으로 해석한 근대 산업경관 -근대 산업도시 장항을 사례로-』, 서울
대학교 협동과정(조경학) 박사학위논문.
배석만(2020) 「일제시기 장항항(長項港)개발과 그 귀결」, 『역사와 현실』117.
서천군지편찬위원회(2009)『서천군지』2(역사·문화유적).
심승희, 현지은(2021)「장항선의 기능 및 연선 지역의 변화」: 일제강점기부터 서해선과의
연결까지, 『문학과 역사지리』33-1.
엘지금속60년사편찬위원회(1997)『엘지 금속 60년사』.
『조선신문』
6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사) 광천석면광산
① 개관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에 위치하는 구 광천석면광산은 1930년대부터 본격
적으로 가동되었다. 제국 일본이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군사 목적을 위해 정부가 석면
산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일본은 1890년대부터 캐나다, 구 소련,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석면을 수입하고 있었으
나, 가격이 상승과 고갈 가능성을 우려하여 국내와 식민지 조선, 중국 동북지역의 광산
개발에 기대하였다. 그러자 1930년대 전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석면의 국가 생산체제
확립이 시급하였다. 무엇보다도 석면은 항공기, 군함(軍艦), 군수품 제조에 필요했기 때문이
다. 그 결과 1930년대 말 일본 국내 지역과 조선, 대만, 중국 등 식민지, 점령지에서 광상
조사(鑛床調査)를 실시한 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부터 석유와 같은 천연자원과 함께 석면수입도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석면광산 가동을 지원하였고 각지에서 석면은 산출되었다. 식민지와 점령지에도
가동시켰는데 조선의 경우 이미 1933년에는 강원도(1곳), 황해도(2곳) 그리고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면에 광산이 있었다. 채굴은 소규모 노천 채굴이었고 손 작업으로 제련하였다.
1930년대 광천
석면광산 모습
65
광천석면광산은 일본아스베스트(日本アスベスト)주식회사 사장이 경영하였다. 일본아스
베스트는 1896년에 설립된 석면 제품을 제조, 판매하는 대기업이었다 (현재는 니치아스(ニ
チアス)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화약을 사용하여 사문암(蛇紋巖)과 함께 시굴한 후 쇠망치
로 채굴하여 모암(母巖)과 석면을 분리하였다(모암에 대한 석면 비율은 약 10%). 석면 섬유
1톤을 채굴하는 작업에 약 150~200명이 필요하였다고 한다.
1943년 한반도 내 석면광산은 총 16개 있었다. 14곳은 온석면(溫石綿), 2곳은 토면(土綿)
을 산출하였는데, 생산된 석면의 약 80%는 충청남도 광산에서 산출되었다고 한다. 생산
후 제련과정을 거친 석면은 한반도 내 공장에 수송되어 방적, 석면판, 보온재, 굴뚝, 시멘트
를 제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1930년대 광천 석면광산 모습
해방 후에도 일부 석면광산은 가동되었으나 석면 생산량은 감소하고 석면을 대체하는
새로운 자재, 그리고 인건비 상승의 결과 해외 수입에 의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결국 광천석면광산도 1984년 폐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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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광천석면광산
▣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상정리
▣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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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 지도 (일반지도)
▣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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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장항선 광천역 하차, 광천읍행정복지센터에서 버스를 타고 광천소방서
하차, 도보 덕정마을회관 방향
▣ 유적 현황
해방 후에도 석면을 채굴하였으나 지역주민들의 석면으로 인한 피해로 인하여 현재 광산
의 갱은 막아 놓은 상태다. 현지 인근에 사는 주민에 의하면 최근 5년 전부터 태양광 패널로
광산을 덮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광산의 모습은 거의 알 수 없다.
인근에서 태어나서 자란 주민에 의하면, 해방 후 광산이 있었을 때 갱구에 돌을 던지거나
광산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그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도
사무실 공간으로 사용되었는데 현재 민간기업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과거 폐광된 수많은 광산에서는 최근 들어 오염물질이 발생하여 인근 주민의 건강에 악영향
을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울러 해방 후에도 가동되었던 석면광산에서 일했던 사람들
도 석면의 피해를 입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충청남도는 석면 피해자 수가 많은 지역인데,
과거 광산이 많았던 것이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피해자와 환경단체의 요청에 의해 환경부
는 과거에 있었던 광산을 검사하여 현재 여러 광산이 폐광되며 접근금지 구역으로 지정되고
있다.
69
▣ 현장 사진
덕정마을 입구
태양광 패널로 덮어진 석면광산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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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정자에서 보이는 석면 터
지금도 광산 터 주변에 석면이 노출되어 있다,
71
광업소 사무실 터
태양광 패널로 덮은 석면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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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참고문헌
최정근 외, (1998) 「우리나라의 석면 생산과 사용 및 근로자 수와 노출농도의 변화」, 『한국산
업위생학회지』 8(2):242-253.
『한겨레신문』(2022.03.11.), 「국내 최대 석면 피해지역 충남...“끝나지 않는 고통”」
<https://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1034114.html>
『홍주일보』 (2023.07.30.),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석면광산이 있었던 ‘광천석면광산’」
<https://www.hjn24.com/news/articleView.html?idxno=11>
中皮腫・じん肺・アスベストセンター編(2009),『アスベスト禍はなぜ広まったのか:日本の
石綿産業の歴史と国の関与』, 日本評論社.
73
아) 구봉광산
① 개관
구봉광산은 일제강점기 구봉금산(九峯金山)이라 불리며 현재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일대
광산과 함께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금 채굴 광산이었다(본 답사서 직산광산 참조.) 충청남도
청양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20세기 초 주민들이 찾아낸 다음 한국인이 1911년부터 채굴하
기 시작하였다. 1917년에는 일본인 소토죠(外城市朗)가 채굴권을 인수하였다. 그 후 1934
년 일본 내외광업주식회사가 인수하여 인근에 17개의 광구도 사들여 제련장도 설치하였다.
이때 일제는 한반도 내 금 광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던 시기로 기존에 은을 채굴하고 있었던
구봉광산은 1935년부터 금을 본격적으로 채굴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한번 이탈한 금본위체체에 1930년에 다시 동참하였다. 금이 화폐로서 기능하게
되었고, 대외 결제수단으로 금을 확보해야 했다. 더불어 전쟁물자 결제수단으로 금이 필요했
다. 그 결과 1932년 산금 5개년계획을 공포하여 금광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금을 고가로
매수하면서 금 채굴을 장려하였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금 광업도 그러한 보조를 받았으나
1920년대 전 광산액의 70∼80%는 일본 자본이 독점하고 있었다. 반면 조선인 금, 은 광업
은 전 광산액의 20분의 1에 불과했다. 더불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총독부 소유 광구를 부여받으면서 일본 광업은 이윤을 창출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구봉광산의 금 생산량도 증가하였는데, 1941년 금 생산액은 한반도에서 9번째로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금 광산 광부들은 그러한 이윤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신문
기사에는 조선인 인부들이 사고로 부상, 사망하는 사건을 다루었던 기사가 눈에 띈다.
구봉광산 인부 참사를 보도한 기사( 조선일보 1938.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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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구봉금산에서 광부
1명 참사
( 조선중앙일보
1936. 1. 10.)
실제로 1936년 금 광산 재해 건수는 7,940건이었다. 그 내역은 사망자 310명, 중상자
623명, 경상자 7,150명으로 8,000명을 넘는 광부들이 재해를 입었는데 금 광산과 석탄광산
에서 일어난 갱내 낙반이나 기계사고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금 광산의 노동환경
이 열악함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에는 구봉광산에 대명광업개발주식회사(大明鑛業開發株式會社)가 들어섰다. 대명
광업은 한국전쟁 후 구봉광산과 무극광산(*본 답사지 무극광산 참조), 그리고 부여에 있는
임천(林川)광산, 경북 봉화군에 있는 금정(金井)광산을 개발한 회사다. 구봉광산은 1971년에
폐광되었으나 현재도 구룡3리 노인회관 앞에는 대명광업과 정명선 초대 사장 업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75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구봉광산 (九峯鑛山)
▣ 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구룡리
▣ 위치
7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일반지도)
▣ 위성지도
77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청양시외버스터미널 – 구룡3리 하차
▣ 유적 현황
현재 구 구봉광산 터에는 아무 표시가 없으나 해방 후 30년 동안 일했던 현지 주민의
이야기를 통해 금산 위치를 확인하였다.
광산을 둘러싸는 길을 따라가면 해방 후에도 금, 은 채굴 시 광물을 운반하였던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위로 올라가면 광산에서 금을 채광한 후 지상에 올린 터가 있다.
광산을 둘러싼 길을 따라가면 광산과 광부 벽화가 보인다. 해방 후에도 광물을 채굴했던
광산과 당시 일했던 광부를 기억하는 그림이 남아 있다.
▣ 현장 사진
구봉광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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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위는 식물 보관용 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금을 운반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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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운반했던 길
금 채광 및 운반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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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광산 아랫벽에 그려진 벽화
광산 아래 광부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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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 인근 구룡3리 노인회관과 기념비
해방 후 구봉관산을 인수한 대명광업주식회사 정명선 사장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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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의 식민통치”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5>
류승렬, 박기주, 최병택, 일제문서해제(광업, 미곡 편) , 국가기록원. 2013.
83
자) 천안역
① 개관
역사적으로 철도 부설은 광업권 획득과 함께 식민지 체제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구한말 한반도에서도 미국, 프랑스 회사가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나 자금 부족으
로 완공하지 못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은 한반도의 철도 부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철도는 일본에게 중국대륙과 러시아 침략의 발판이자 제국주의 세력 확장의 교통로
였기 때문이다. 결국 일제는 군사적인 목적과 더불어 일본의 상품판매 시장 확장과 한반도에
서 약탈한 식량과 자원을 일본에 반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철도는 일본 군대와
조선인 인력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도 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경제적 흐름 속에서 한반도 남북을 종단하는 경의선(京義線)과 경부선(京釜
線)이 부설되었다. 일본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는 1898년 서울역과 부산역을
잇는 경부선의 부설권을 획득한 후 1901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때 철도건설을
위해 대규모 토지를 수용하고 노동력을 동원하였다. 1905년 1월에는 전 구간을 개통하여
영업을 시작하였고 1906년에는 국유화하여,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이 관리, 운영하였다. 또한 일제는 중국침략 전쟁을 앞두고 1936년 경부선 복선에 착공하여
1945년 3월에는 부산에서 현재 중국 단둥지역 구간을 개통하였다. 경부선은 관부연락선,
경의선, 경원선과 연결되면서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이어졌다.
서울에서 충청남북도 경계점을 지나는 경부선은 기존 충남지역의 경제 축이었던 공주-연
산-금산을 구간이 아닌 천안-조치원-대전-부산을 연결하였는데 이때 천안역(1905년)은 경
부선 정차역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철도 부설은 충남지역 경제구조를 크게 변화시
켰다. 철도 중심의 대전권, 천안권, 청양/부여 내륙권, 서산권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던
반면 전통적으로 금강유역 중심으로 형성된 유통권을 쇠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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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1939년 조선철도 약도
朝鮮總督府 鐵道局, 『朝鮮鐵道状況」 (1939.12)
85
1935년 천안역(출전: 천안시)
1922년에는 천안과 장항을 연결하는 충남선(현 장항선), 그리고 1925년에는 천안과 경기
도 안성 사이를 연결하는 안성선(경기선)이 경부철도의 지선으로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화물을 유통하는 것 외 일본산 공산품을 한반도와 만주로 반입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남부지역과 충청남도 평야 일대에서 수확된 쌀과 같은 농산물과 충청남도에서 채광,
채취된 광산품은 장항선 노선을 통해 항만과 군산으로 수송되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천안
역은 경부선, 장항선, 안성선의 분기점이자 화물 집산지로 기능하였으며 한반도 중부지방은
일제의 식민지 경제체제에 통합되었다.
1943년 천안역 선로 (출전: 천안시)
8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천안역은 인력, 물자 수송의 현장이자 또 다른 동원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전시체제기인
1938년 10월 1일 천안읍 국민정신총동맹 연맹은 “精動日(정동일·정신총동원일)”을 즈음하
여 각 町에서 접수처를 정하여 오전 6시에 각 가구에서 1명 씩 출동시켜 역사 앞 사원과
거리 등을 청소 수리하는 ‘근로봉사’에 동원하였다고 한다. 각급 학교에서도 이에 준해 이날
에 애국의 날 행사를 치렀다고 한다.
천안 정동원(精動員) 근로봉사를 전하는 기사
( 조선신보 1939. 10. 3.)
87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천안역
▣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대흥로 239
▣ 위치
8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89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전철 1호선 천안역
▣ 유적 현황
현재 천안역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문을 연 위치와 동일한 위치에 있으며 철길 동쪽과
서쪽에 출구가 있다. 천안역에서 도보 8분 거리에 있는 중앙시장 앞 천안지역사전시관에는
천안시의 역사와 함께 일제강점기 천안역 모형과 관련 영상이 전시되어 있다. (*천안지역사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행사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천안지역에 대한 강의를 통해 지역사를
배우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천안역 동부 광장에는 천안시 관광안내소가 있으며 각종 안내 자료 외 천안시 투어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동부 광장에서 사거리로 나오면 각종 음식점과 천안시 특산품인
호두과자 가게, 상점 등이 즐비하여 주말에는 관광객과 지역민으로 북적인다. 천안이나 충청
지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며 인도, 네팔, 베트남, 태국 식당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현장 사진
동부 광장에서 바라본 천안역
9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동부 광장에서 바라본 천안역
서부 광장에서 바라본 천안역(현재 로터리 공사 중)
91
전철1호선,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이 정차하는 플랫폼
천안역 앞 동부 광장 로터리와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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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천안 지역사 전시관 내 천안역 모형과 영상 전시물
천안 지역사 전시관 내 천안역 영상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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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디지털천안문화대전 (2013) 천안역
<https://www.grandculture.net/cheonan/toc/GC04501643>
정태헌(2017), 『한반도 철도의 정치경제학』 선인.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경부선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9827>
朝鮮總督府鐵道局(1939.12), 『朝鮮鐵道状況 : 外秘』 第30囘,朝鮮總督府鐵道局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https://dl.ndl.go.jp/pid/1900003>
천안 지역사 전시관 전시물(일제 식민지 시기인 1940년 증기기관차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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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차) 직산광산
① 개관
구한말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를 비롯한 구미 제국주의 열강들은 한반도에
매장된 광물과 그 광업 채굴권을 쟁탈하기 시작하였다. 제국 일본과 재벌도 한반도의 광업
채굴권을 요구하여 경작지와 농지를 광물 채굴을 위한 자원 수탈의 현장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 있던 직산군 일대 금 채굴권은 일본이 한반도를 본격적으
로 식민지로 삼기 전부터 일본 재벌들이 노리고 있었다(*직산군은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
로 목천군, 천안군과 통합되어 폐지됨). 현재 일본에서 “일본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
사와 에이치(澁澤榮一)와 한 때 일본 최대 시멘트 회사이자 아사노(淺野)재벌 총수였던 아사
노 소이치로(淺野總一郞)는 1899년부터 대한제국 궁내부 소속이었던 5개의 광산채굴권을
요구하여 여러 번 거절당했으나 연이은 교섭으로 결국 1900년 7월 고종으로부터 직산금광
의 특허를 얻어냈다. 그리하여 직산금광채굴합동조약을 체결하여 직산 일대의 채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인들은 이 조약을 통해 직산 일대 동서 60리, 남북 40리 금광과 사금장을 획득하였고
보덕원에 사무소를 설치하여 자원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일본인들 주식회사가
사금장 광업권을 취득한 결과 현재 천안시 서북구에 위치하는 직산읍, 성환읍, 성거읍, 입장
면에 해당하는 지역 일대에는 사금장과 금 채광장, 광산이 펼쳐졌다. 직산광업주식회사는
양대리를 중심으로 도림리, 기로리, 호당리, 시장리에 있는 석광을 관리, 운영하였는데, 시장
리 금광은 성거 천흥리 금광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율금리, 성거산에서도 금이
채광되었다.
시부사와와 아사노는 평안도 운산금광에서 감독관으로 일하고 있었던 광업전문가인 미국
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와 데쉴러(J. W Deshler)를 주주로 삼아 직산의 금
채굴 사업에 참여하게 하였고 1911년 직산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앨버트 테일러는
언론인이기도 하며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했다. 데쉴러는 과거 인천 제물포에서 하와이
이주 대행을 맡았던 사업가이자 운산금광 재정 책임자였다.) 시부사와와 아사노는 보다 강력
한 고정자본을 확보하여 미국의 광업 기술을 도입하여 1927년까지 광산을 경영하였다.
1907년에는 금광과 사금광에는 약 2,000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평안도에서 직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광산물 가격이 급등하고 금값도 올랐다. 이때 조선인 광업이 점차
95
쇠퇴하는 반면 일본인 광업은 대규모 개발에 착수하였는데, 직산에서는 처음으로 사금선을
사용한 대규모 사금 채취를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직산금광주식회사가 떠난 후 조선광업
주식회사가 양대리에 중앙광산 사무소를 설치하였고 정련소도 건설되었다. 이와 같은 대규
모 기계화에 이어 1930년대 일본이 금을 국내에서 보유하기로 하고 일본정부가 법정 가격보
다 비싼 값으로 금을 매입하면서 금광업의 수익성이 높아짐에 따라 조선의 금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에는 군수품 수입이 증대되어 상대국이 금으로 결제할 것을 요구하자
일제는 산금 5개년계획을 공포하여 금 채굴을 장려하였다. 다만 금 채굴 증대를 위해 각종
보조금을 증액한 반면 관리와 통제도 강화하였다. 일본 재벌의 대규모 개발과 정부 정책으로
금 생산량은 증가하여 1942년에는 충청남도에서만 2,254kg을 생산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총생산(22,932kg)의 약 10%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이 막히자 다른
광물의 수요가 급증하여 금 수요는 사라졌다. 결국 일제는 1943년 공식적으로 금 채광을
중단시켜 한반도 내 사금 채취와 금 채광도 멈추게 되었다. 일제의 필요에 의해 대규모
금광이 개발되다가 금 생산은 폐쇄되었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쳐 3년이 지난 1956부터
직산 일대에서는 금 채취사업이 재개되었다. 양대리에서는 중앙광업주식회사가 채광작업을
시작하였고 성환, 성거에서도 금 생산 및 광물이 채굴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수익성의
문제로 1980~90년대에 문을 닫았다.
직산금광
9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97
② 강제동원의 기억을 찾아서: 직산광산(중앙광산)
▣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
▣ 위치
9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99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전철 1호선 성환역에서 택시로 20분(18km)
▣ 유적 현황
현재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는 조선광업주식회사 사무실 터가 남아 있다. 해방 후에도
㈜중앙광산이 운영하고 있었으나 광산이 폐광된 이후에는 ㈜한국컴퓨터가 들어섰다. 현재는
한국컴퓨터도 이전하여 회사 건물만 남아 있으며 출입은 통제되어 있다. 이 부지 뒤쪽에는
수직형 갱구가 남아 있다.
양대리 마을 주민이 살고 있는 주거 공간 곁에는 갱구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지었던
우물, 일본 헌병대 터, 그리고 당시 미국인 광업 기술자 등이 있었을 때 지었던 주방 건물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갱구는 현재 폐쇄된 상태이다.
일부 양대리 마을 주민은 마을회관 안에 직산광산과 양대리 역사를 전시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회관 옆 창고에는 일본 소방서에서 사용된 기구들을 보관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전시와 유물을 관리, 보관하면서 지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입장면 양대리는 이곳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과 희생자를 기리는 기미 독립 기념탑이
있다. 1919년 3월 양대 광명학교 여학생이 주동하고 동월 28일 직산금광 광부들이 궐기하
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제의 발포로 7명이 총에 맞아 3명이 사망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에서 사용된 태극기를 제작한 곳의 터도 남아 있다.
기로리에는 채광된 금을 운반하는 철길이 남아 있으나 해당 공간은 현재 골프장 건설부지
에 포함되어 있는 관계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볼 수 없다.
입장면의 외에도 성환읍, 성거읍 일대에서도 광물을 채광하고 있었기 때문에 폐쇄된 갱구
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성거산 등산길에서 갱구 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0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현장 사진
중앙광산 터
충남 중앙광업주식회사 사무실이 있었던 곳(현재 한국컴퓨터 사옥)
101
입장면 양대리 마을회관 옆 역사 전시관
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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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일제강점기 소방용으로 사용되었던 도구
입장 3·1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103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제작한 곳
중앙광업주식회사 사무실 터(한국컴퓨터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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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의 식민통치”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5>
김용범(2024)『달쿠샤 100년의 기억』, 수동예림.
우영환 (2009) 충남지역의 금광업에 관한 경제사적 고찰, 『경영사학』24(3):9-54.
충청남도문화원연합회 (2020) 『충남 잊혀진 시간을 말하다 2』충청남도문화원.
중앙광업주식회사 사무실 터(한국컴퓨터 사옥)
105
나. 충청북도
1) 개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는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행정구역 가
운데 하나로 도청 소재지는 청주군이며 면적은 7,418.38㎢(1940년 당시 기준), 인구는
980,488명(1944년 당시 기준), 인구 밀도는 132.2명/㎢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충청북도
의 전체 지역, 세종특별자치시의 일부 지역에 걸쳐있었으며 10개 군을 관할했다. 청주군을
시작으로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진천군, 괴산군, 음성군, 충주군, 제천군, 단양군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1935년 당시 959,490명이었는데, 전시체제기에 접어든 1940년에는
944,870명으로 인구가 줄었다. 하지만 1944년에는 다시 980,488명으로 늘어났다. 1944
년 인구조사에서는 일본인이 8,642명이고 그 외의 민족이 386명, 조선인이 971,460명이었
다. 충청북도 역시 금광과 광산이 총 432개소가 채굴되고 있었다. 특히 조선제16군 마병역
창, 제17방면군 제16군마병역창 등이 존재했었다고 하지만, 현재 어느 지역인지는 명확하
지 않다. 1938년에는 충청북도 도청에서 조직한 애국근로봉사단에 각 지역의 청년들이
강제동원되어 대강면, 제천면 등에서는 철도공사를 맡아 했고, 괴산면, 주덕면, 소이면 등에
서는 사방공사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2) 강제노동 피해의 흔적
지역
장소 (경로)
유적지
음성군
무극광산(無極鑛山)
무극광산 터 (연풍파일 공장)
제천시
엽연초 수납취급소
엽연초 수납취급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사무국)
충주시
호암저수지, 구 동양광산(활옥동굴)
호암저수지, 구 동양광산 터
청주시
주성초등학교-군시(郡是)제사공장-
청주역사(驛舍)전시관
보통학교 강당
두산위브아파트 및 상가 부지
구 청주역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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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가) 무극광산
① 개요
고려시대부터 산금지로 알려줘 중국인들이 채금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1896
년에는 한 때 독일인들이 채광하기도 하였다. 1913년 일본인이 채광권을 취득하고 1938년
조선총독부 관료 출신 마쓰모토 마코토(松本誠)를 대표로 하는 조선제련주식회사(朝鮮製鍊
株式會社)가 본격적으로 인수하여 가동했다. 조선제련주식회사는 조선식산은행의 방계회사
로 1936년 6월 창설되었으며 서천군 장항에 장항제련소를 설치하였다. 아래 도면은 무극광
산 광업권자인 조선제련주식회사가 충북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 용계리, 봉곡리에서 금,
은 광업 허가를 받은 광구 도면이다.
경성공업고등학교 광산학과는 재학 3년 차에 광산실습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 광산학과
는 1929년 4월에 설립된 경성광산전문학교(京城鑛山專門學校) 채광(採鑛)학과로 계승되어
1940년대 무극광산에서 실습을 실시하였다는 보고가 있다.
107
무극광산 금은광광구도 (e 뮤지엄)
1940년에는 충북지역 농업의 노동 부족으로 인하여 “국가의 손실”이 우려되는 가운데
무극광산 광부 약 200여 명을 총동원하여 해당 지역에서 모내기 작업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광부를 투입하여 모내기 완료를 전하는 기사( 조선신문 194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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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전시체제기인 1941년에는 2천여 명의 ‘광업전사’(노무동원한 광부들을 칭함)가 10시간
교대로 증산보국(增産報國)에 종사하고 있으며 운반된 광석은 ‘소년광부 및 부인’으로 구성된
선광반(選鑛班)이 걸러내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노무자의 90%는 인근 농부들이었고 갱도
마다 애국반(愛國班)이 설치되어 작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 경성일보 1941. 10. 14.)
해방 후 대명광업(大明鑛業)이 인수하여 광산을 가동시켜 왔으나 부채로 인하여 1972년에
폐광되었다. (*대명광업은 정명선(鄭明善)을 대표로 하여 한국전쟁 후 구봉(九峯), 임천(林
川), 무극, 금정(金井)광산의 이른바 ‘4대 금광’을 경영한 광업회사. 본 답사지 구봉광산
참조). 1972년 폐광된 지 15년 후인 1987년 영풍광업(永豐鑛業)이 무극광산을 인수하여
배수와 수갱을 보수하고 선광시설을 준공 완료하고 채광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998년
IMF의 여파로 휴업, 폐광되었다.
무극광산 ‘광산증산운동’ 기사
(『경성일보』 1941. 10. 14)
109
② 광업전사로 불리웠던 강제노동 : 무극광산
▣ 주소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용계리
▣ 위치
11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1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무극버스터미널 – 영풍아파트 (소요시간 10분)
▣ 유적 현황
현재 무극광산 터에는 민간기업이 자리 잡고 있어 갱구를 직접 볼 수 없다. 그 외 광산을
알 수 있는 표시는 없으나 갱구와 가까운 곳에 갱도와 광부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에도 광산이 있었던 관계로 광산, 광부에 대한 기억은 쉽게 사라
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왕 용계2리 주민들은 2024년 10월 5일 토요일 제1회 “추억의 광산축제”를 개최하였다.
해방 후 탄광에서 종사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가요 경연 등
행사도 함께 추진했다. 이제 광산은 없지만, 마을 행사를 ‘광산축제’로 칭하는 것으로부터 광산과
광부의 삶의 경험이 용계리의 장소성과 지역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임을 엿볼 수 있다.
인근에 있는 평택제천 고속도로 금왕휴게소가 용계 2리의 명소가 되어, 주민들은 마을과 문화
회관 공간을 정원, 공원처럼 꾸며 주민들의 교류와 마을만들기 활동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현장 사진
구 무극광산 부지 앞에 있는 용계1리 표시
11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무극광산 터
현재 공장 자재가 늘어진 무극광산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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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자재가 늘어진 무극광산 터
광산, 광부 벽화
11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광산, 광부 벽화
광산, 광부 벽화
115
▣ 참고문헌
디지털음성문화대사전 <https://eumseong.grandculture.net/eumseong>
e 뮤지엄 <https://www.emuseum.go.kr>
용계2리 ‘추억의 광산축제’ 홍보물
11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나) 엽연초 수납취급소
① 개관
일제는 조선을 원료와 식량 공급지로 삼을 것을 목적으로 농업정책을 펼쳤다. 한편으로는
식량과 원료를 약탈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 상품의 판매 시장으로도 재편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연초업이 재편되었고, 그 주된 목적은 연초를 식민지 작물로, 연초를
세금 확보의 매개로 이용하는 것에 있었다.
일제는 1918년 엽연초경작조합을 설립하여 일제 식민지 시기 전부터 엽연초 생산이 활발
했던 제천을 관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제천 엽연초 생산협동조합은 수납취급소와 함께
사무소, 창고, 사택과 같은 건물을 지었다. 엽연초 수납취급소는 재배한 담배를 숙성시키는
장소이며 현재는 옛 사옥과 함께 보관 및 유지되고 있다.
제천은 일제 식민지 시기 이전부터 연초생산이 활발하였는데, 일제는 경술국치 이후 제천
엽연초 생산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일전쟁 발발 후 전시체제기로 들어서면서 제천
이 연초 산출액이 높은 곳으로 지목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조선철도주식회사
는 철도국으로부터 강원도 영월에서 제천을 지나 충북선 충주까지 철도 연장 인가를 받았다.
이는 영월에서 충주까지의 산악지대에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으며, 그 일대 연초 산출액이
조선에서 가장 높다는 이유였다. 결국 철도 연장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일본은 한반도
중부지역을 제국 정치경제 구조 속에 통합하기 위해 철도 연장을 계획하였고 여기에 연초
생산지인 제천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담배는 수출과 국내 소비를 위한 상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체제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물품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특히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전시체제
로 들어서면서 담배를 모집하였다. 중국으로 수송된 황군(천황의 군대)을 ‘위문’하기 위해
담배를 시민들에게서 거두었다. 당시 담배 모집의 광고도 제작하였고 모집한 담배는 담배를
모집한 후 전선에 있는 ‘황군에 바치는 위문물품’으로서 기능하였다.
117
충주 영월선 개통을 보도한 신문
( 동아일보 1937. 7. 27.)
1937년에는 제천연초판매소에서 황군위문연초 ‘가치도키’를 모집하여 3천 600개를 전선
등에 보내는 의례를 거행하여 여기에 수백 명의 학생을 참석하게 하였다. (* 가치도키란
전쟁에서 이겼을 때 전장 터에서 내는 함성을 말한다.) 그 외에도 1939년 6월 11자 조선신문
에는 제천 엽연초 판매소에서 모집한 담배 수량이 공지되었는데, ‘모집 성적’이라는 제목으
로 담배를 많이 바치도록 경쟁시키고 그것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제천판매소 산하의 연초 모집 성과를 보도한 신문 기사. 조선신문 1939.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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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제천 엽연초수납취급소는 조선인 노무자 동원의 현장이 아니나, 일제강점기 충북 제천지
역에서 농업 개편 및 통제, 그리고 자원 수탈이 이루어진 대표적인 산업인 연초산업을 상징
하는 공간이자, 침략전쟁을 수행하였던 일본군에게 ‘바치는’ 담배를 생산, 수송한 제천의
특성을 기억하기 위해 답사지로 선정하였다.
「제천의 황군위문연초, 제2회분 3천 6백개 발송」
(『부산일보』 1937.12.25.)
일본군 위문용 담배 ‘가치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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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엽연초 수납취급소
▣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의병대로 12길 14-1
▣ 위치
12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2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제천버스터미널에서 도보 11분 (약 800m)
▣ 유적 현황
2006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엽연초수납취급소 건물은 현재까지 보존, 유지되어
왔다. ‘ㄱ’자 형 모양의 목조 건물은 전시체제기인 1943년 엽연초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기존의 수납공간을 철거하여 재건축한 건물이다. 건물 입구에서 들어가면 하치장, 배열장,
경작자대기실, 계산실, 감정실, 현품대조실, 갱장장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 내 감정실에는 원형 레일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갱장장에 들어가면 습도 조절 장치
가 남아 있다. 엽연초를 관리, 보관할 때 건물 내 온도와 습도 조절이 중요했기 때문에
바닥에 특수한 흙과 소금을 내려 자연스럽게 온도와 습도를 관리했다고 한다. 그 일부가
보관되고 있다.
현재 수납취급소 건물은 국제음악영화제 사무실이 있으며 그 외 행사 관련 물품이 일부
전시, 보관되어 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2005년부터 개최됐으며 2024년 20회를 맞이
하였다. 행사 중에는 수납취급소와 구사옥 부지 일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어 주민
들과 관광객들이 모여 문화예술 활동, 관람을 즐기는 관광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수납취급소 앞은 작은 공원, 야외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을 끼고 국가문화재인
옛 사옥이 있다. 또한 부지 전면에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 “엽연초하우스” 건물이 있다.
건물과 공원은 2017년부터 추진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다양한 연령대의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 참고문헌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
디지털제천문화대전 <https://www.grandculture.net/jecheon>
이영학 (1989), 「1910년대 일제의 연초정책과 조선인의 대응」, 『한국사연구』 65:
119-160.
제천국제음악영화제 <https://jimff.org>
12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현장 사진
엽연초 수납취급소
엽연초 감정실
123
수납취급소 내부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전시물 및 도구 보관소
국제음악영화제 도구 보관소 /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바닥 모습. 건물 내 습도 및 온도조절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12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수납취급소
수납취급소 옆 엽연초생산조합 옛 사옥
125
수납취급소 옆 엽연초생산조합 옛 사옥
12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다) 호암지
① 개관
호암지(虎岩池)는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에 있는 둘레 약 4km에 이르는 도심 속의 저수
지이자 인공 호수이다. 호암지는 1898년 편찬된 『충주군읍지(忠州郡邑誌)』에 충주읍의 남쪽
5리 남변면에 위치하고 연지(蓮池)·소제(小堤)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충주시 사직
산 서쪽에 있는 저수지로서 과거에는 연꽃이 만발하여 연지라고도 하였고, 대제 저수지보다
작아서 소제라고도 하였다.
이 소제는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았고 1916년 6월경 대홍수로 남아 있던 제당(堤塘)까
지 크게 파손되어 구조물까지 유실되었다. 당시 충청북도장관 영목융(鈴木隆)이 기술자를
파견하여 조사함과 동시에 관개설비를 개선하기 위한 수리계(水利契)를 조직하게 하였다.
아울러 그 계(契) 총대(總代, 대표) 10명에게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에서 3만 5천 653
원을 빌리게 하였다. 그에 지방비 보조 2천 137원을 더하여 1917년에 대제(大堤)와 소제의
둑 수리와 면적 확장, 용산과 봉계(鳳溪)의 두 보(洑)를 개수하는 등의 공사를 하였다. 1918
년에는 수리조합사업계획을 조성하여 조선총독부에 신청하였으며, 소제를 확장하고 호암제
(虎岩堤)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2년 4월 수리조합설치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부터
충주수리조합장이던 영정목일(鈐木政一, 스즈키 미사이치)이 충주 면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저수지 개발 착공, 1933년 3월에 준공하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조선을 항구적인 식량 공급지
로 만들려는 정책을 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의 독점자본 성장과 함께 일반
대중의 생활은 곤궁해지고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고, 전쟁 중에는 대규모 식량 폭동이
일어났다. 산미증산계획은 일제의 안정적인 식량공급과 저임금정책 유지 등 일본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산미증식계획의 중심사업은 토지개량사업이었고 수리조합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1922년 충주수리조합을 설립함 동시에 호암지 개발·확대하는 공사를 시작
한 것도 그 사례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저수지 부근에는 1933년 5월 1일에 세운 호암지 사업성공 기념비가 남아 있다.
비석 앞면에는 ‘충주수리조합장 영목정일 씨 사업성공 기념비’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저수지 공사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호암지를 건립한 사람은 일본 야마나시현 출신 영목정일 씨로 충주를 사랑해 호암지
를 만들게 되었다. 달천평야를 만들어 주민들의 이익을 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심단
결해 성심성의껏 호암지를 만들었다. 이 성공에 감사해 조선인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127
비석의 내용과 달리 호암지 개발의 주된 목적은 천수답 성격을 띤 모시래들(일명 달천평야
또는 충주평야)을 곡창지대로 조성하여, 일본이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할 군량
미를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저수지 공사를 위해 1922년부터 11년간이나 충주면
주민들을 강제노역시켰다. 기계와 장비 없이 삽과 지게, 우마차 등을 이용해 사람의 손으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충주수리조합사업은 달천평야에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의 쌀 생산 증가와
토지 겸병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충주의 조선인 농민은 토지를 잃거나
소작민으로 전락하고 더욱더 가난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충주수리조합 몽리(蒙利, 수리 시설로 물을 받음) 구역 일부
( 동아일보 1927. 9. 6.)
2019년 영목정일의 비석이 훼손되었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 조선인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 강행으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
던 때여서, 누군가가 고의로 쓰러뜨린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상황은 파악할
수 없다. 당시 충주시는 비석 처리를 두고 호암지 관리주체인 한국농어촌공사와 협의했다.
결국 농어촌공사에서 비석을 수습해 2명의 한국인 조합장 공덕·공적비와 일본인 잠수부
위령탑이 있는 곳에 다시 세웠다. 현재 비석 머리는 얹혀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상태이다.
12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1956년 8월 21일 건설부 고시 제342호에 의하여 호암지 주변은 호암공원으로 지정되었
다. 과거에는 충주분지의 중심을 이루는 모시래들의 젖줄이었지만 지금은 농업용수보다는
유원지의 역할이 더욱 크다. 2024년 현재 호암지 둑의 안전보수를 위해 4년여 동안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129
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호암지
▣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호암동 609
▣ 위치
13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3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충주공용버스터미널 - 도보 173m - 터미널(하이마트 앞) 승차 - 호수
마을 하차 - 도보 112m(157번, 101번 등, 약 25분 소요, 가장 단거리 교통)
▣ 유적 현황(현장 사진)
저수지 근처에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들
13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호암지 서북쪽 산책로 옆 일대에 있는 위령탑, 비석 등
호암지 건립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1938년 만든 위령탑
133
위령탑에 대한 설명글
충주수리조합장 영목정일(鈴木政一)의 사업 성공 기념비와 떨어져 나간 비개석
13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영목정일(鈴木政一)의 사업 성공 기념비. 뒷면에 호암지 축조 경위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135
‘충주수리조합장 영목정일씨 사업성공 기념비. 忠州水利組合長 鈐木政一氏 事業成功記念碑’라고 적혀 있는 비석 앞면.
원래 영목정일(鈴木政一) 비석이 있었던 곳
13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참고문헌
박재천, 「전조선수리조합실황답사기-충청북도: 2할 미만의 일본인이 소유로는 반분(半分)
이상, 천부(天賦)의 부고(富庫)에 조선인 부력(富力)은 미미(微微)>, 『동아일보』
1927.9.6..
박찬희, 「일제만행 얽힌 충주 호암지 일본인 수리조합장 기념비 제자리로」, 『연합뉴스』
2020. 5.7.
전흥식 (2008),「일제강점기 충주의 식민통치 연구-식민통치 조직과 구조를 중심으로」, 충주
대학교 경영·행정·외국어대학원 행정학석사학위논문.
충주시 누리집 <충주이야기> 중 ‘호암지 일본인 수리조합장 친일 비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누리집
<https://www.grandculture.net/korea>.
137
라) 동양광산
① 개관
1906년 광업법 제정 후 일제는 조선 내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리에서는 일찍이 활석맥이 발견되었다. 1912년 일본인 다케시타 도쿠지로(竹下篤次郎)
가 활석광산을 소유하였다. 일본은 제지, 화장품, 도료, 약품, 치약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활석을 만주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사변으로 수입이 두절해질 것을 우려하여
1930년대 초부터 조선 내에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 다케시타 도쿠지로(1866-1930)는 현재 일본 후쿠오카 지역 출신으로 식민지 사상 실행에 관심이 많으며 그
실전으로서 개간사업에 관여해 온 인물이다. 조선, 중국을 옮겨 다니면서 장사와 농업경영을 영위해 왔으며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활석은 국내 생필품 생산에 사용되었고 충북선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부산을 거쳐 일본으
로 반출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함경남도에서 질 좋은 활석이 채광되었으나 충주
시 살미면 일대에서도 개발은 지속되었다. 해방 후에는 개발 규모가 확장되어 1970년대에는
활성 생산량이 연간 10만 톤을 넘었다고 한다.
만주품 수입 두절로
활석광산도 활기
(『조선일보』
1932.12.18.)
13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동양광산(현 활옥동굴)
▣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목벌안길 26
▣ 위치
139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4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충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하이마트 앞 정류장에서 514 버스 이용, 목벌
동 정류장 하차.
입장료: 성인 10,000원, 청소년 9,000원, 유아 8,000원, 특별요금 8,000원
(개인 외 별도로 단체 요금 있음.)
▣ 유적 현황
구 동양광산은 현재 활옥동굴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우선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활옥동굴과 동양광산 역사가 서술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동굴이 단순히
관광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활옥동굴은 동굴 속에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인들이
활석을 채굴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박물관,
사료 보관 기관, 관공서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사진을 현장에서 직접 공개, 공유함으로
써, 활옥동굴의 역사를 몰랐던 시민들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노동 탄압이라는 역사의
현장성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동굴 내부 곳곳은 장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고추냉이 재배, 포도주 저장고와 같은 시설
이 있으며, 보트 타기 등 다양한 놀이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 조성으로
어린이, 가족, 성인 단체를 비롯한 관광객들이 연중 찾아온다.
현재 관람하는 동굴 대부분은 해방 후 확장공사를 거쳐 관광지로서 개발하면서 조성한 공간
이다. 일제 식민지시기 광산의 규모를 알 수 있는 표시 등이 있으면 해방 전후의 변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玄洋社員·名簿 <https://www5e.biglobe.ne.jp/~isitaki/page051048.html>
141
▣ 현장 사진
활옥동굴 주차장에서 동굴 입구로 가는 길
동굴 입구
14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동굴 안 역사 전시 패널
광산, 동굴의 역사 안내판
143
동굴 안 모습
해방 후 사용되었던 권양기
14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빛 장식
정원처럼 장식된 동굴 내 모습
145
일제 식민지 시기 동양광산 사진 / 동굴 내 전시물
일제 식민지 시기 동양광산 사진 / 동굴 내 전시물
14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광산체험장”
“광산체험장”
147
마) 충북도청 본관
① 개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화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충청북도청의 본관 건물이다. 1908년
6월 5일 충주의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중앙공원 자리에 위치하였다. 1928년
말 운주헌 바로 앞쪽으로 목조 단층 건물을 신축하여 충북도청의 본관으로 사용하다가,
1937년 현재 도청이 있는 자리에 큰 논을 메워 철근 콘크리트조 2층 평슬래브(slab)로
신축한 것인데, 1959년 봄 3층 함석지붕으로 증축하였다. 1990년경 지붕 및 천장을 교체하
였다.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충북지역 공공기관>
* 출전: 김양식,
충북지역 근현대
문화유산
기초조사-역사기념물
및 건조물을 중심으로 ,
충북개발연구원, 2001.
14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본관은 일제강점기 충북지역 공공기관 중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특징은 내외부
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외벽을 적벽돌로 쌓고 타일로 마감한 것이 특징적이다. 형태는
당시 관청 건물의 기본 평면에서 볼 수 있듯이 청주 충청북도청 본관은 중앙의 현관 포치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적 구성을 가지는 동서로 기다란 장방형이며, 3층을 증축하였어도 2층
당시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건물의 분위기는 현대식 근대건축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청주
충청북도청 본관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공용청사로는 유일하게 ‘충청북도민의 협력과
한국인 지주의 기부로 건립되었다는 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라고 보기도 한다. 당시에
과연 조선인들이 일제에 능동적으로 협력하였다고 할 것인지 의문이 없지 않다. 일제강점기
동안 연맹결성식 거행, 청년단 맹훈련, 지원병 훈련 등 조선인 동원 관련 행사나 훈련 장소로
이용되었다.
충청북도청에서 실시하고 있는 연맹단체 훈련 모습
( 황민일보 1942. 12. 30.)
149
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충북도청 본관
▣ 주소
충청북도 상당구 상당로82(문화동 89)
▣ 위치
15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5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청주시외버스터미널~26분(814번, 6.4km, 가장 단거리 교통)
▣ 유적 현황
2024년 9월 충청북도는 충북연구원 대회의실에서 충북도청 본관 복합문화공간 조성 공청
회를 개최하고 도민 의견 수렴에 나섰다. 3층 건물인 본관에 있는 사무실은 2026년까지
신관으로 모두 옮기고 그림책도서관과 미술관, 북 카페 등을 조성해 개방할 방침이라고
한다.
▣ 현장 사진
충청북도청 본관 정면
15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충청북도청 본관 측면
충청북도청 본관 내 1층 계단
153
충청북도청 본관에 관한 설명판
충청북도청 본관 앞에 있는 충북산업장려관
15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충청북도청 본관 앞에 있는 충북산업장려관 측면
충북산업장려관 안내판
155
충북산업장려관 내 전시품들
충북산업장려관 내 벽에 대한 설명문
15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바) 옛 청주역사
① 개관
옛 청주역사는 1921년부터 신도시 개발정책으로 청주역이 1968년 11월 우암동으로 옮
겨지기 전까지 47년 동안 청주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한 역이다.
청주역은 사설 철도회사인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가 1921년 11월 1일 조치원에서 청주에
이르는 22.7km 노선을 개통한 충북선의 한 기차역이었다. 충북선은 경부선(충남 연기군
조치원역)과 중앙선(충북 제천 봉양역)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철도 노선이다. 조선중앙철도주
식회사는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운반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하였
다. 당시 충북지역은 농업과 광업이 발달해 일제는 그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경부선 철도역
인 부강역에서 청주로 도로를 뚫고 철도건설 계획을 세웠다. 이후 1923년 5월 1일 청주에서
증평, 1928년 증평에서 충주까지 연장 운행하면서 충북선 철도는 청주를 중심으로 경제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 청주역은 2만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총건평 116평 규모의 근대양식건물로 개축
하였다.
개축 후 청주역 정면 모습( 조선신문 1930. 9. 20)
157
신축된 청주역( 매일신보 1930. 9. 14.)
청주역은 만주로 파병되는 일본부대에 동원되어 열하(熱河)의 성문으로 돌입하여 일장기
를 게양한 약산광(若山光, 청주 본정 출신) 군을 맞아 환영하는 장소 등으로도 이용되었다.
당시 그를 환영하기 위해 청주 공립 각 학교 학생들이 역전 광장에 모여 환영가를 불렀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다른 기차역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조선인을 일본의 군인으로 동원하기
위한 선전 또는 전략적 장소로도 이용된 것이다.
열하 토벌 용사 개선,
청주역두의 환영
( 부산일보 1933. 12. 1.)
15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청주역은 해방 이후에는 국유철도가 되었으며, 1958년 5월 충주역~봉양역 간의 35.2km
가 개통됨으로써 현재의 충북선이 완전히 개통되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충북선 기찻길은
청주 중심을 관통하는 여객 열차와 화물열차가 왕래하였다. 이후 도심 철도 이설계획에
따라 1980년 10월 17일 흥덕구 정봉동 정봉역과 통합하고 그 정봉역(현재의 청주역) 자리
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주시는 1921년부터 1968년까지 청주역으로 운영되던
곳을 복원해 ‘옛 청주역사공원’으로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옛 청주역 대합실과 개찰구를
고스란히 재현해 놨으며 청주역의 옛이야기를 담은 전시관이 있다.
159
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옛 청주역사 (전시관)
▣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중앙로 36(북문로2가)
▣ 위치
16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상세 지도 (옛 청주역사공원 내에 있음)
▣ 위성지도
161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청주시외버스터미널~27분(109번, 6.7km, 가장 단거리 교통)
▣ 유적 현황(현장 사진)
청주역사 건물 정면
16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청주역사 건물 앞에서 열린 먹거리 장에 모인 인파들
옛 청주역사 전경 사진과 설명
163
철길 흔적이 드러난 옛 청주역사 뒤편
철길이 있던 곳에서 보는 옛 청주역사 후면
164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옛 철길 옆에 서 있는 청주역 표지판
옛 청주역사관 내 전시물
165
▣ 참고문헌
박명수, 「충북선 폐역의 기록화와 문화콘텐츠 활용방안 연구」, 한국연구 13, 2003.
부산일보 1933.12. 1.
「청주역 개축」, 조선신문 1930. 9. 20.
「신축한 청주역」, 매일신보 1930. 9. 14.
166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사) 주성초등학교 강당 (옛 청주공립보통학교)
① 개관
청주 주성초등학교는 1896년 청주군 공립소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07년 청주공립보통
학교로, 1937년 영정공립보통학교, 1941년 청주공립영정국민학교, 1948년 청주공립주성
국민학교로 각각 학교 이름이 바뀌었다.
주성교육박물관 전경(주성초등학교 누리집)
1944년 1월 16일 충청북도 각 청년대 훈련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주성초등학교(당시
학교 이름은 영정국민학교(榮町國民學校))에 모인 청년대 ( 경성일보 1944. 1. 19.)
167
주성초등학교는 1896년 개교 당시 청주군 관아 건물을 교실로 사용했으며, 1907년 지금
의 북문로 1가 175-10(쥬네스 건물 자리)에 청주공립보통학교 교사를 준공하였다. 1922년
7월 지금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23년 지방 유지와 교육선각자들의 사재
로 강당을 지었다. 당시 일본인이 설립한 심상소학교 강당보다 큰 규모에 영사실까지 갖추었
다고 한다. 이 강당은 2001년 개축하여 주성교육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2024년 현재
국가등록문화재이다. 위의 주성교육박물관과 1944년도 사진의 배경에 있는 건물이 같은
것으로 보아, 당시 강당 건물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주성초등학교 강당 내부 전면 모습
(주성교육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주성교육박물관(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기록화조사보고서 , 2010.
168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
▣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교서로 45(영동 48-1)
▣ 위치
169
▣ 상세 지도
▣ 위성지도
170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청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약 30분 (109번, 6.6km, 가장 단거리 교통)
▣ 유적 현황(현장 사진)
옛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이자 현재 주성교육박물관 정면 모습
171
주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주성교육박물관 모습
가까이서 본 주성교육박물관 입구
172
일제강제동원 피해 유적지 답사
- 충청 남・북도 -
주성교육박물관 부근에 모아 둔 우리 전통 생활 도구들
오랜 역사를 안고 있는 오늘날 청주초등학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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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디지털청주문화대전 누리집 <https://www.grandculture.net/cheongju>
문화재청(2010)『주성교육박물관(구 청주공립보통학교 강당)/기록화조사보고서』
주성초등학교 누리집 <https://school.cbe.go.kr/jusung-e/M01>.
경성일보 194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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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군시제사공장
① 개관
제국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 양잠업 진출을 노렸다. 일본 정부는 식민지정책인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미곡 증산과 함께 양잠업을 강요하였다. 조선을 일본공업에 필요한
노동력 확보와 유지를 위한 식량 공급처이자 섬유 산업자본 축척을 위한 원료공급지로 삼았
다. 즉 농민들에게 부업으로 양잠업을 할 것을 강제로 ‘장려’하여 1924년에는 “산만백만석
증식계획(産繭百萬石增殖計畫)”을 실시하여 조선의 농업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은 1910년대 말 제국 일본의 외화획득을 위해 수출용 제사(製絲) 생산을 그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고 당시 세계 생사 생산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중국에 대항하고자
저렴한 누에 가격과 저렴한 임금으로 실을 생산하기 위해 조선 양잠업을 지배하였다. 마지막
으로 1910년부터 1920년대까지 일본 국내에서 양잠업이 보급됨에 따라, 점령지와 식민지
에도 새로운 원료공급지 혹은 투자처 기반을 닦으려고 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지 양잠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정치경제적 흐름 속에서 일제는 1920년대 말부터 대규모
제사 자본과 양잠업 기업의 조선 진출을 지원하였다.
1869년 설립된 일본 제2의 섬유제품 기업인 군시제사주식회사(郡是製絲株式會社)는 조선
총독부의 요청을 받아 1926년 6월 대전에 공장을 개설한 3년 후인 1929년 11월 충청북도
청주시에 제2공장을 설립하였다. 현재 이 기업은 군제주식회사(グンゼ株式会社)라는 이름으
로 일본을 대표하는 섬유제품 회사로 알려져 있다. 청주 공장에서는 잠종(蠶種), 제사(生絲),
부잠사(副蠶絲), 대마면혼방직물(大麻綿混紡織物) 제조를 하고 있었다.
군시제사 공장을 비롯한 제사공장에서는 조선인 여성들이 일본인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
되어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12시간 이상 일해야 할 일도 흔하였다. 더불어 공장 부지에는
기숙사가 설치되었는데, 이를 일견 여성 노동자를 위한 복지로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2교대
작업을 통해 심야까지 일을 시켜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규율 권력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부당한 차별과 열악한 처우에 남녀 3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거듭 파업을 진행하였
다. 예를 들어 1932년 1월 31일에는 빈번한 노동자 해고, 직급 상승의 기회를 적용하지
않는 것, 조선인한테만 현미밥을 제공하는 차별, 공장 내 비치한 서적 외 자유로운 독서를
허락하지 않는 것, 기계 고장으로 일에 지장이 생겼을 때 업무시간 외 연장근무를 시키는
것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기업 측은
조선인 남성 35명을 무단 해고하였고 이에 조선인 노동자들은 기업 측은 조선총독부 경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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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탄압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청주 공장은 단지 노동의 현장이 아니었다. 전시체제기인 1938년 9월 11일에는
일제가 공산주의 사상 보급을 박멸하고 일본정신을 고양하기 위해 만들었던 조직인 조선방
공(防共)협회산하 청향단(淸鄕團) 발족식을 공장 부지에서 진행하여 여기에 여공 약 600여
명을 참석시켰다 (매일신보 1938, 9.19). 이는 청주 공장이 반공 이데올로기 선전과 일제에
대한 충성심 고취라는 정신적 동원을 거행한 탄압의 현장이었다. 군시제사공장은 대전에도
있었으나 대전공장에 비해 청주공장의 기록은 없는 편이다. 그러나 해방 후 청주공장을
인수하여 들어선 남한제사공장 전경 사진이 1967년 동아일보에 실려 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청주군시공장의 가늠할 수 있다.
청주 군시공장 청향단 발족식 보도( 매일신보 1938.9.19.)
남한제사주식회사 광고 ( 동아일보 1967.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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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강제노동 현장의 기억을 찾아서 : 군시(郡是)제사공장
▣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
▣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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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지도
▣ 위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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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접근
대중교통 이용 시: 청주시외버스터미널 – 사직사거리 하차, 도보 약 300m
▣ 유적 현황
현재 군시제사공장 터에는 두산위브 아파트, 시장, 복합상가,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다.
그러나 공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표시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두산위브 아파트가 들어서
기 전 청주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던 관계로 이미 그 당시 산업시설이었던 건물이나 상징물
도 허물어졌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또한 청주군시제사공장은 대부분 목조 건물로 건립되
었기 때문에 각종 공장 내 건물을 쉽게 철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산업시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흔적은 해방 후 들어선 남한제사공장의 일부
수납시설로 추정되며 건물 내부에는 상점 등이 입주하고 있다. 공장 부지에 있는 시장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대부분 해방 후 상황에 대한 기억이었다.
▣ 현장 사진
군시제사공장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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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시제사공장 부지
군시제사공장 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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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군시공장 폐업 후 들어선 남한제사공장 부속건물로 추정되는 건물들
현재 공장 터에 있는 시장 뒷골목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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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충북인뉴스』 (2019. 03.23), 「뽕나무는 죄가 없겠지만...수탈의 잔재, 청주군시제사공장」
<https://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329>
『충북타임즈』 (2020.09.24.), 「극심한 차별, 착취...저항운동에 불 붙였다」,
<https://www.cc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629014>
郡是製絲株式会社社史編纂委員会(編) (2000), 『郡是製絲六十年史』, ゆまに書房.
藤井光男(1987), 『戦間期日本繊維産業海外進出史の研究:日本製糸業資本と中国・朝鮮』,
ミネルヴァ書房.
山田智子(2009), 「朝鮮における郡是製絲株式會社分工場の形成過程」, 『京都文教短期大学研
究紀要』 48, 4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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