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Community

성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아’의 상태에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언어지시일 뿐이다.

방수영 2018-10-30 3071
성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무아’의 상태에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언어지시일 뿐이다.

성경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왜 나왔을까?
당시 우매했던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강한언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말을 불교용어 ‘無我’로 바꿔 표현하고자 한다.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랑 같이 살아야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원수를 사랑하면, 원수를 닮아가고, 원수처럼 된다.)

이렇게 언어에 너무 집착하면,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따라서 ‘지시적 언어’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이러한 함축적인 언어로 오해를 살만한 일들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參禪)’을 통해 사실을 인지하고, ‘법’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화’를 일으키기 쉬운 일제 강점기 관련 역사관은 ‘명상’하기 좋은 곳으로 짓는 것이 좋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되어 학살당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일본군을 매우 미워했다. 일본군이 행한 잔학한 일들은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뿐만이 아니라 그 상대는 나약한‘국가’이고, 나약한‘부모’가 될 수도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삶이 힘들 수밖에 없는 이유도, 늘 이런 ‘분노’와 늘 투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에 가서 고문당하는 마네킹인형을 보면서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계속 상기하다보면(분노에 집중하다 보면), 내 안에 내가 미워하는 일본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나에게 고통을 준 일본군이 되고 만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나는 불교의 ’무아無我‘에 대해 설명할 때 영어의 ’She kills me’라는 표현을 인용하곤 한다.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는 나를 죽인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내 마음 속에 그녀 생각 밖에 없다.’고 풀이해야 맞다.

왜 내 마음속에 그녀 생각 밖에 없을까?
내 안에 나를 밀어내고 그녀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미국인들은 ‘그녀가 나를 죽인다.(She kills me)’고 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구조를 쓰는 사람들은 ‘태초에’ ‘無我’를 알았던 것일까?

‘무아’상태의 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알아차려야 할 단계가 이 단계다.
이 ‘無我’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 경우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하근기 ‘신’이 들어오는 ‘빙의’현상 때문에 신병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된다. 자신보다 수승한 신이 들어오면 모를까, 대부분이 자신보다 하근기 신이들어므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사상에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에 대한 복종이 아닌 철저한 수행으로 자기가 ‘부처님’이 되는 수행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보다 더 수승한 ‘부처님’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꿈꾸는 ‘成佛’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신에 의해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에 의한 ‘무한한 사랑’을 구하고, ‘신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다.(기도의 간절함으로 ‘신통지’를 얻을 수는 있으나, ‘법’을 모르면 삿된 욕망과 어리석음에 허우적 대기도 한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成佛한다)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를 사랑해 주고, 스스로를 구원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 나와 내 조국에게 고통을 준 일본을 미워하면(미움에 집착하면), 내가 미워하는 일본이 내 안에 들어온다.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짓밟고, 죽이고, 유린하는 나쁜 세력이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베트남 전에 가서, 반대로 베트남 여자들을 성노예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면, 똑같은 가해자가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일본군을 계속 미워하고, 분노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내가 미워하는 ‘일본군’ 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이 아니라, 일본이 했던 나쁜 일들을 되풀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미움’과 ‘혐오’가 그러한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과 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미움’과 혐오‘에 집착하면, ’미움‘과 ’혐오‘가 내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분노‘를 ’삼독심‘으로 생각하고, 철저하게 경계하는 수행을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분노‘와 ’혐오‘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 가? ’분노‘와 ’혐오‘를 주는 대상이 아닌 ’나 자신‘을 학대하고, 못살게 굴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
(분노로 막행막식을 하고, 함부로 행동하며, 막된 언행을 하게 된다.
이것이 대대손손 업보가 되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성격이 모질고 험하다는 평을 듣는 것이다. 그러한 업보(남을 미워하여 자신 안에 가둔)로 삶이 힘들어지고, 업의 되물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러한 부조리를 막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분노와 혐오의 기운에 집착하기 보다는 ‘사랑’의 기운에 몰입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게 수승한 기운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런 표현은 ‘언발에 오줌누기’식의 임시방편성에 불과하다.
좋은 에너지로 강한 힘을 키울 수는 있으나, ‘법’을 모르면 또 다시 ‘어리석음’으로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에 몰입하는 방법은 분노를 빨리 사그라들게 하고, 좋은 기운이 맴돌게까지 하는데 그친다. 여기까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통한다.
그러나 그 후에 ’법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계에 부닥치는 경우에 이르게 된다.
기독교 명상가들이 간과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 분들은 좋은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으나, ’법‘을 통찰하는’지혜‘가 부족하여 어리석은 일에 종종 엮이게 된다.
(예를 들면, 일본성노예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등 여러 가지 청산해야 할 국가적 보상문제를 애매모호 하게 만드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맹점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에 머물고 끝나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다.

명상은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이루어져야지, 이렇게 분노에 계속 몰입하면서 악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그런 것에 몰입한 사람도 계속 분노와 악한 기운을 증가시키게 되고 만다.
명상은 ’분노‘를 가라앉게도 하지만, 에너지를 키우기도 한다.
명상 시 ’분노에 몰입‘한 사람은 악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선한 기운에 몰입한 사람은 선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된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처럼, 정말 나쁜 사람을 만나서, 분노가 치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 제시한 가장 좋은 방법을 ‘선정’에 드는 것이다.

편안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 아무 생각하지 말고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혼자 앉아있으면 된다. 이것이 선정에 드는 기본자세이다.
경전에서는 ‘선정’은 독약보다 무서운 삼독심인 ‘분노’가 올라왔을 때, 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아주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다.

분노에 집중하면 무서운 상황을 만들어 나를 파괴한다. 모든 것은 ‘성주괴공’하는 법의 논리에 의해 반드시 사라진다. 이 사실을 알면, ‘분노’가 두렵지 않으며 상황이 더 쉽게 풀린다.

일단 ‘화’가 가라앉으면 ‘지혜’가 생기고, 다음할 일이 생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삼독심에 의한 극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은 다음 나쁜 사람을 여전히 사랑해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부처님도, 신도 아닌, 여전히 악한 상황에서 악해지고, 좋은 상황에서 좋아지는 나약한 중생이므로...)

상황이 좋아지도록 지혜로운 대처가 필요하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초발심자경문에는 ‘나쁜벗은 멀리하고, 좋은 벗을 가까이하라’는 말이 제일 첫 번째로 나온다.
나쁜 상황을 최대한 피하는 게 중요하다.

참고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사랑하지 말라’는 책을 펴내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일인지 통찰해 보자. 또한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로 남을 속이고, 또 속고 살고 있으며, 이렇게 중요한 국가적인 피해보상이 미뤄지는 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 지 짚고 넘어가자.
내 안에 ‘인간애’라고 변명하면서 채워진 다른 사람들을 빼고, ‘無我’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지혜롭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