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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2월] 포모의 소장자료 소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2024-01-31 199


남방에서 맞이한 설날


조선인 포로감시원 이야기 -

 

설맞이 떡 찧는 모습의 사진(피해자 김병수 기증)


일제강점기 중에서도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치러지던 시기의 설날은 어땠을까. 피해자 김병수님 기증 사진은설맞이 떡 찧는 모습으로 전해진다. 이 사진은 뒷면의 메모를 통해 194212월 태국 충카이(Chungkai) 수용소 취사장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19425월 조선인 포로감시원 모집 공고를 실시하고, 같은 해 12월 칸차나부리(Kanchanaburi) 수용소를 개설하였다. 충카이는 칸차나부리 인근으로 이들 지역은 콰이(Kwai)강의 다리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곳이다.

일본군은 포로들에게 무쇠솥과 껍질도 벗기지 않은 안남미를 식량으로 던져줬다. 포로들은 직접 벼 껍질을 벗겨내고, 쌀을 찧어 가루로 만든 다음 죽이나 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식량 사정은 포로감시원이었던 조선인도 별다를 바 없었다. 사진 속 모습이 당시 포로수용소 취사장의 일반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모집 내용과는 전혀 달랐던 강제동원지의 실상을 마주하며 피해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을지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더 알아보기

태국 포로수용소에 강제동원된 포로감시원 사진엽서(피해자 김시영 기증)

인도네시아 Java 포로수용소 스케치

(피해자 안승갑 그림)

BC급 전범으로 일본 스가모巣鴨형무소에 수감된 

피해자 김창희 증명사진


남방의 조선인 포로감시원

일제가 동남아시아 지역(이하 남방’)을 침략하면서 초기에 영//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수많은 서양인 포로가 생겼다. 일제는 남방의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많은 조선의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하였다. 서양인 포로 학대 문제가 발생하면 조선인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인 군속들은 포로수용소를 짓고,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맡아 처리하였다.

 

포로수용소 풍경

칸차나부리 부근의 충카이(Chungkai) 수용소에는 수 만 명의 포로가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콰이강의 다리 공사에 투입되어 혹사당했고, 각종 부상, 질병 등으로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하루도 시체 태우는 연기와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숙소나 식사가 제공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취사장에서는 부족한 식량 사정으로 끼니때마다 소란이 일어났고, 포로들의 불만과 원한은 고스란히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에게 향하였다.

 

BC급 전범이 된 남방의 조선인 포로감시원

연합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제전범재판을 통해 주축국의 전쟁범죄를 처벌하였다. 이때 전범으로 실형에 처해진 조선인은 148, 그 중 129명이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다. ‘지원형식으로 시행된 포로감시원 모집의 실상은 조선의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민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가해자 역할을 강요당하다가 종전 이후에는 BC급 전범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참고자료

조선인 BC급 전범에 대한 진상조사 포로감시원 동원과 전범 처벌 실태를 중심으로-(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발행, 2011.7.25.)

2020년도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일제강제동원의 국제적 비교 한국·일본·태국·미얀마·필리핀·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발생, 2020.5.28.)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최양현, 최영우 저, 효형출판)

세계일보 [콰이강의 다리위에 서있는 한국인의 슬픔]연합군 포로 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청년들 (2005.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