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국민통합과 평화, 인권신장에 기여

주용근 (朱龍根) 이야기

주용근 (朱龍根) 이야기 - 가야노마 탄광 노무

  • 1928년

    전북 김제에서 출생

  • 1942년 3월

    가야누마(茅沼)탄광으로 동원

  • 1945년

    해방 이후 본적지로 귀환

나는 무진생(戊辰生) 용띠입니다. 내 나이 17살 되던 해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탄광에 가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때 읍에서 징용장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읍사무소의 직원들이 사람들을 잡으러 마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서암리에서 김제읍사무소로 가니, 나와 같이 가게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읍사무소 직원이 일본 탄광에서 온 직원에게 우리를 넘겨주더라고요.

읍사무소에서 김제역으로 기차를 타러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나왔습니다. 대부분 가족들인 것 같았는데 울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 역시 울고 계신 어머니를 뒤로 한 채 그렇게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김제역에서 기차로 여수까지 가서, 여수에서 배를 탔습니다. 일본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또 배를 타고 홋카이도로 갔습니다. 홋카이도까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걸린 것 같네요. 김제에서 나와 함께 70여 명이 출발하였는데 이동하는 도중 몇몇 사람들이 도망을 쳤고, 결국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홋카이도에 도착했습니다.

탄광의 이름은 ‘이와나이(岩內) 탄광’이라고 기억합니다. 탄광 주변에는 바닷가가 있었습니다. 낯선 해변가에서 고향 노래를 부르면서 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탄광에 도착한 후, 4일간은 일을 안 시키고 놀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4일이 지나고는 바로 탄광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탄광에서 캐낸 탄을 밖으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루 2교대로 2조로 나누어져 일했고, 한 조에 속한 40 명 정도의 인원은 몇 군데 광구로 나누어 들어갔습니다. 굴속에 탄을 캐러 들어가면 할당량을 채워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할당은 10트럭, 15트럭 정도로, 탄의 질에 따라 달랐습니다. 할당된 일을 마쳐야만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해야 했습니다.

주용근이 동원지(가야누마탄광)에서 촬영하였다는 개인 사진이다. 사진 속의 복장은 일이 끝나고 평상시에 입는 옷이며, 탄광에서 지급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뒷면에는 자필로 본인의 이름과 '17세 3월 24일’이라고 사진을 촬영한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굴속으로 일하러 들어갈 때는 감독관들이 단체로 인솔하였고, 나무로 된 명표를 탄광 입구에서 전등 달린 모자와 바꾸어 들어갔습니다. 명표를 안 가져온 사람들은 그 날 일을 못하게 됩니다. 일을 못한 사람들은 밥도 안주더라고요. 더러 일이 힘들어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잡혀 오면 심한 구타를 당했어요. 또 일하다가 쉬는 모습을 보이면 감독관이 구타를 하거나 밥을 굶기기도 하였습니다. 참 혹독한 곳이었지요.

한번은 한국에서 위문 공연을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고향 생각에 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15명이 도망을 갔습니다. 도망가다 잡혀온 사람들은 곡괭이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본보기로 구타하였습니다.

‘함바’에서 생활하였는데, 2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한방을 함께 썼습니다. 탄광에서 일을 잘 못하면 ‘다코베야’나, 지시마로 보내진다고 들었습니다. 일하는 노무자들은 죄다 한국 사람들이고 일본 사람들은 거의 감독만 합니다. 근처에 중국인 포로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한국인보다 생활이 더 비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탄광 안에는 작은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일하다가 사고나 병으로 죽은 사람은 화장을 시키는데, 그 후엔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탄광 안에 작은 병원도 있어서 다치면 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습니다. 나도 탄광에서 일하던 중 탄 차가 뒤집혀 오른쪽 갈비뼈를 다쳤습니다.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 정도 치료를 받은 후 다시 탄광으로 돌아와 일했습 니다. 지금까지도 다친 곳이 아파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하루에 1원 30전 정도로, 한달 월급은 13원 가량 됩니다. 그런데, 각종 명목을 빌려 다 떼고 나면 손에 쥐어지는 건 한달에 5원 정도였습니다. 감독관 말로는 식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저금하였다가 갈 때 준다고 말했는데 해방이 되고 나올 때도 저축한 임금은 받지 못했습니다.

탄광에서 3년간 일하다가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귀국 순서를 기다려서 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미군들이 와서 우리를 보내주었지요. 집에 오니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아주 반가워했고 특히 어머니께서 많이 우셨습니다. 귀향 길에 배가 폭격을 맞아 죽은 사람도 많다고 하던데, 나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강제 동원』(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회생자 등 지원위원회 발간) p92~94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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