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국민통합과 평화, 인권신장에 기여

송문수 (宋文壽) 이야기

송문수 (宋文壽) 이야기 - 제주도 비행장 조성작업 동원

부신봉
  • 1922년

    제주도 안덕면에서 출생

  • 1944년

    알뜨르 비행장 조성 작업 동원

동원될 때, 알뜨르비행장 가셨잖아요? 그때 상황을 좀 여쭤볼께요. 그러면은 비행장 간 게 여기 44년이라고 쓰셨는데 몇 살 때 거기 비행장에 가신 거예요.

스물셋 인가 넷 인가 그 정도 되었을 거여. 하여튼 그 사이 되잖아요. 그때 더운 철에 갔으니깐 늦은 봄이나 아니면은 초여름이야. 어느 철인가 모르겠는데 늦은 봄 아니면 초여름이야. 뭐 그 날짜는 모르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으니까.

그 뭐 영장이 나왔던 거예요? 어떻게 가게 되신 거예요? 그때 상황을 좀 말씀해 주세요.

영장도 아니고 그떄는 거기서 몇 사람 동원해라 나오라고 하면은, 이장이 거기서 누구누구 그 반별로 해가지고 나오라고 해서 그래서 나갔지. 나가면 몇 사람 가가고. 그래서 꼭 거기서 1개월이면 1개월, 1년이면 1년 꼭 하는 것이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교체를 해줘. 그렇게 해서 살았지. 중간에 교체를 해줘요. 한 달에 몇 번씩. 한 달에 한 번 정도 두 번 정도. 그러니까 서로 교대하면서 나가는 거지.

그러면 이 부락에서 이 비행장에서 일을 시키기 시작한 게 언제쯤부터예요? 부락에서 동원, 반별로 사람이 할당돼서 나가서 착출 돼가지고 일한 게 언제쯤부터예요?

일한 것이 한 2~3년 됐을 거예요. 거기가. 한 이년쯤 됐을 거예요. 나는 안 갔어.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은 있었고. 많이 있었지. 우리는 그때 어린사람 취급했고. (연령)이상 사람들이 다 다녔거든요. 그러다가 우리까지 다 동원되었지. 우리 아버지도 가서 많이 일했지. 일하다가 외국까지 갔다 왔는데 징용당해서. 북해도. 비행장에서 일 하다가 나와 가지고 그것도 한.. 언젠지 잘 모르겠는데 한 2년 살았던가... 북해도 가서. 해방이 그때 8월에 됐으니까 봄나서 돌아왔는가 겨울에 돌아왔는가 모르겠네. (해방 후)몇 달 있다가 돌아왔지.

항만건설 근로봉사 기념사진

북해도 미쓰이 신비바이 탄광으로 동원된 제주도 주민들

그 비행장에서 일을? 아버님이 없고 이러니까 할아버지가 동원대상자가 된 건가요?

대상자 꼭 대상자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지만도 차례로 돌아가면서 하니까. 임의적으로 하게 돼있지. 동원은 한 18세 때부턴가..

딱 정확하게 몇 살이다 이런 거는 없구요?

아 정확하게 그런 거는 모르고 또 그렇지도 않고. 정확하게 호적상으로 따져가지고 너 가게 돼있다. 징병제도처럼 하지는 않았고. 그저 임의적으로 교체를 해라 그러면 교체를 하고. 꼭 몇 살 되면 간다는 그런 것도 없고.

그렇게 해서 일한 게 얼마나 돼요? 한 일 년 돼요? 그렇게?

일 년 까지는 안 되지만은 한 일 년 되지. 나는 그때 손가락을 다쳐가지고, 미리 돌아와 버리니까. 일하다가 흙 나르고 돌 일하다가, 손가락을 좀 다쳤어.

얼마나 다치셨어요?

지금도 본체는 있는데, 그땐 병원도 없고 하니까 이거 싸매고 일할 수 없으니, 가라고 해서 와가지고 그 후에는 다니지 못했지만도.

할아버지 왼손 검지는 사용을 지금도 못하세요?

아니 사용은 하지.

그 당시 조금 다치셔서 그 뒤로는 할아버지 안가셨어요?

에. 지금 본체가 남아있지만서도. 그 후로는 안 갔지. 일 년까지도 안 갔을 거야. 십 개월? 그렇지 않으면 더 오래했어야 하지만도. 또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그 비행장에 가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흙 나르는 일, 돌멩이 치우는 일. 뭐 그런 일이지 무슨. 여러 가지 일을 다 다르니까. 반장이 있어가지고 거기 반장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니까. 그때 그 비행장이 잘 돼있어. 비행기 집도 지었고. 여기 와서 일하는 사람은 함바집이라고 해서 길게 지어가지고 거기 하나가 한 100명 들어가서 잤을 거야. 밤에 자는 때는. 함바가 한 네댓 개 있을 거야. 돌 나르는 사람도 있고. 흙 정리하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로 했지. 건축하는데 가서 또 심부름 하는 사람도 있고. 나는 주로 흙 나르는 거 돌 나르는 거, 바닥 정리하는 거 그런 일 했어.

할아버지가 가서 일하는 그것을 이름 붙인 것 들어 본적은 없으세요? 가서 일하는 거가 뭐 어떤 형태다. 징용은 아니죠?

징용은 아니고. 노무자라고 했지. 뭐. 하여튼 노무자 노무자 했는데, 보국대라는 말도 있긴 있었는데, 우린 거 까지는 안 하고.

그러면 그 생필품 같은 거 거기서 일하면서 뭐 그런 것들이 좀 지급이 됐어요? 뭐 옷이랑 작업복이라든가.

에이. 그런 거 없어.

임금 같은 것은 어땠어요?

임금 같은 것도 없고. 무보수지.

그것에 대해서 많이 불만감이 있었겠어요? 거기 동원돼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할 적에 그 말 할 정신이 없어. 돈이 문제가 아니니까. 일이 힘든 것보다도 사람이 여유시간이 없으니까.

할아버지는 손을 좀 심하게 다치고, 심하게 부상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일하다가?

상하는 사람들도 있지. 있으면 그 사람들은 돌려보낼 밖에 할 수 없지. 죽은 사람은 모르겠어. 그런 소식을 못 들었으니까.

일제시대 때 동원 돼서 일을 하고 통치가 조선인들에게 가혹하게 하고 이랬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생각들을 하셨나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거에 대해서 그때 당시에.

그때 당시 지배하는 거야 뭐 그대로 순응해서 듣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지. 불만이 있어도 불만을 표현을 하질 못했어. 표현 할 수가 없는 때야 일정때는.

일제시대 때 동원됐던 그런 것이 살아오는 과정에서 어떤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이 되시는지? 일제 때 이렇게 동원돼서 일하고 그랬던 게 살아오면서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살아오면서 자기일 못해서 피해봤다는 생각밖에 더 할 수 있어? 단 하루라도 자기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가야하니까. 거기부터 우선 가야 되니까. 때가 그렇게 되면 할 수가 없었죠. 불평을 해봤자 소용없고 그때는 안가고 반항하고 있으면 반항한다고 처벌을 준다는 생각에서 반항하질 못했어. 반항하면 그만한 대가를 받기 때문에 반항하는 말이나 반항을 하거나 그렇게 허들 못했지.

『일하지 않는 자는 황국 신민이 아니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회생자 등 지원위원회 발간) p346~p381. 요약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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