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국민통합과 평화, 인권신장에 기여

김종배 (金鍾培) 이야기

김종배 (金鍾培) 이야기 - 비바이 탄광 노무

김종배
  • 1924년

    경북 선산군에서 출생

  • 1936년

    가족과 함께 일본 세토시(瀨戶市)로 이주

  • 1940년 4월

    미쓰비시(三菱)광업(주) 비바이(美唄)광업소로 동원

  • 1944년

    징병통지를 받고 세토시(瀨戶市)로 돌아와 그릇공장에서 일하며 징병대기

  • 1945년

    해방 이후 가족들과 고향으로 귀환

나는 1924년에 경북 선산군(現 구미시)에서 태어 났습니다. 13살 되던 해에 농사가 잘 되지 않고 먹고 살기가 곤란하여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하면 서 경북 선산을 떠났습니다. 내가 선산을 떠나던 해에는 가뭄이 아주 심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사람들이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하천에서 심하게 싸웠다고 하더군요.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고향 사람들 중에는 만주로 떠난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합니다.

우리 가족은 일본 나고야(名古屋) 근처에 있는 세토시(瀨戶市)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세토시는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고, 그릇을 만드는 공장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 온 조선사람들 은그릇의재료가되는흙을파내는일또는공장에 서 그릇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도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내가 17세 되던 해(1940년) 4월, 세토시에 살고 있던 조선사람 50여 명과 함께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북해도 탄광으로 가게되었습니다. 그것은 징병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안가고 싶다고 해서 안갈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나와 같이 북해도로 갔던 사람들은 모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차와 배를 갈아타며 도착한 곳은 미쓰비시(三菱) 비바이(美唄)탄광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숙소는 군대 내무반 처럼 생겼는데, 방 하나가 100명 정도 함께 잘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그 큰 방에서 함께 간 사람들과 계속 같이 생활했습 니다. 식당도 숙소 안에 있었었습니다. 그 때는 전쟁 때문에 식 량이 귀할 때니까 콩과 쌀을 섞어 콩밥을 해서 주었습니다. 밥에 들어간 콩은 메주를 만드는 콩인데, 너무 맛이 없고 질려버려서 많이 먹지를 못했습니다.

작업시간은 밤과 낮을 구분하여 2교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 다. 아침에 굴에 들어가는 사람의 경우에는 아침밥을 먹고 오 전 7시쯤 들어가서 오후 6시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낮에 일하 는 사람은 점심도시락을 가져가서 굴 안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굴 안에서 일을 하려면 탄차를 타고 20분 정도 들어가야 합니 다. 굴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면 또 굴이 사방으로 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서 또 각자의 굴을 배치받아 일을 하러 가게 됩니다. 나는 굴 안에서 기둥을 세우기 위한 목재를 나르는 일 을 주로 하였지만, 때로는 탄을 캐거나 탄을 차에 싣는 일도 하 였습니다. 돌덩이 사이에 박혀있는 큰 석탄을 캐는데, 그 석탄은 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북해도에서 생산되는 석탄은 질이 아주 좋아서 불을 때면 불도 잘 붙는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때 몸이 젊었으니까 크게 다친 곳은 없었지만, 일 하다가 다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일하다가 미끄러져서 벽에 손가락을 심하게 부딪쳐서 왼손 검지손가락 한마디가 끊어져나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난 큰 부상도 아니었어 요. 몸이 힘든 것보다 깜깜한 곳에서 불빛 하나에 의지해 위험한 일을 해야 하는 두려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월급을 받기는 받았는데 워낙 작아서 얼마를 받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밥값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돈을 모아서 가족에게 부치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비바이탄광에는 ‘다코베야’라는 숙소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돈을 받고 팔려온 사람들이 모여 노예처럼 일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줄을 지어 일터로 나오는데 줄을 이탈하면 곡괭이로 맞았습니다. ‘다코베야’사람들은 위험한 곳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많았을텐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장사지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일하는 도중 그 사람들과 마주 친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국수 부서진 것을 점심으로먹고 있었습니다. 감시가 심해 대화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경우에는 도망치다가 붙잡히면 죽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보다 대우도 나쁘고 처지가 훨씬 안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나는 계약기간을 정하고 일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중간에 돌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4년 계약이 끝나갈 무렵 군대갈 나이가 되어 징병에 걸렸습니다. 탄광에서 나와 징병을 기다리기 위해 세토시로 돌아왔습니다. 세토시로 돌아온 때는 1944년 여름쯤 으로 기억합니다. 징병을 기다리는 중에도 그릇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군대에 가기 전에 해방이 되어 온 가족이 모두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전쟁을 세 번이나 겪었습니다. 처음에 일본으로 이사 갈 때는 ‘지나사변(중일전쟁)’이 났다고 세상이 시끄러웠고, 탄광에서 일할 때는 ‘대동아 전쟁(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해방 후에 집에 돌아오니 얼마 후에 또 6·25전쟁이 나서 군인으로 참전했지요. 되돌아보면 참 어려운 시절을 살았던 것 같아요.

김종배의 사진

신현대가 하루토리(春採)탄광으로 동원된 후, ‘하루토리 사진관’에서 촬영하였다는 사진

일본 아이치현(愛知縣) 세토시(瀨戶市)에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소재 미쓰비시(三菱)광업 비바이(美唄)광업소로 동원된 조선인들의 단체 사진 (1940년 5월경)

신현대가 하루토리(春採)탄광으로 동원된 후, ‘하루토리 사진관’에서 촬영하였다는 사진

앞의 단체사진을 촬영한 후, 같은 날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김종배가 오른팔에 두른 완장은 작업장에 도착하자마자 지급받은 것이며, ‘세토근로보국대(瀨戶勤勞報國隊)’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두번째줄 왼쪽 다섯 번째 인물이(점선 원안) 김종배이다. 기증 당시 사진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리던 그는 “어르신 인물 좋으시네요” 라는 조사관의 칭찬에 “젊었을 때 호랑이 안 잡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며 재치있게 웃어넘겼다.

사진속의 인물들은 모두 일본 아이치현(愛知縣) 세토시(瀨戶市)에서 생활하고 있던 조선인들로, 김종배와 함께 동원된 사람들이다. 앞 줄 가운데 모자를 쓰지 않은 두 사람은 ‘일본인 인솔자’라고 한다. 이 사진은 김종배가 동원된 지 1~2달 후 자신이 생활하던 숙소 앞에서 찍은 것이다. 사진에는 숙소의 이름인 ‘성심료(誠心寮)’ 세 글자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정근경쟁우승기념(精勤競爭優勝記念)’ 이라는 문구를 보면, 석탄 증산을 위한 숙소별 대항전을 열어 가장 열심히 일한 노무자들이 속한 료(寮)와 반(斑)의 단체 구성원들을 표창하였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김종배 본인은 “말 잘 듣고 일 잘 했다고 찍어준 사진이며, 이왕 북해도에 왔으니 기념하자는 뜻으로 사진을 찍어 나눠준 것”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사진속의 인물들은 ‘지카타비(노동작업화)’와 각반을 착용하고 있다. 모자 가운데 흰색으로 보이는 부분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캡램프(모자에 붙이는 전구)를 부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상의는 작업복이 아니라 동원 당시에 입고 왔던 옷이다.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모두 작업복 대신 집에서 입고 왔던 좋은 옷으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김종배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이었 기 때문에 대부분 1944년에 징병 대상 연령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사진은 앞의 단체사진을 촬영한 후, 같은 날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김종배가 오른팔에 두른 완장은 작업장에 도착하자마자 지급받은 것이며, ‘세토근로보국대(瀨戶勤勞報國隊)’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사진촬영을 위해 동원 당시 집에서 입고 출발했던 옷과 모자를 꺼내어 착용하였다.

김종배는 그의 가족과 함께 피폐해진 고향의 농촌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가족 뿐 아니라 농촌의 몰락으로 생활의 수단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방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시작된 노무동원은 그를 포함한 이주 조선인들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김종배와 같은 젊은 나이의 청년들은 노무동원 뿐만 아니라 ‘징병’의 무게까지 감당해야 했다.

‘다코베야(タコ部屋)’

‘다코베야(タコ部屋)’란 노무자 인신구금형태의 숙소를 뜻하는 말이다. ‘다코(タコ)’란 일본어로 ‘문어’를 뜻하는 말이며 '헤야(部屋)'란 ‘방’을 의미한다. 즉 다코베야를 직역하면 ‘문어 방’이란 의미이다. 이 곳에 수용된 노무자를 비하해서 ‘다코(タコ)’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들에게는 일체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채 가혹한 노동만이 부과되었다.

메이지(明治)정부는 홋카이도 개척 초기에 토목공사장 외, 탄갱·광산의 채굴·정련 등에 죄수를 사역하였다. 한랭을 견디며 원시림을 개척하는 일에 많은 희생이 뒤따르자, 이 죄수노동은 1894년에 폐지되었다. 죄수노동이 폐지된 이후에 개척을 위한 토목공사 등에 민간업자의 청부가 증가하였고, 업자들은 함바를 만들어 노동자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의 합숙소가 죄수 노동의 나쁜 전례를 이어 인신구금형태의 숙소로 변질되었고, ‘다코베야’ 또는 ‘간고쿠베야(監獄部屋)’ 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곳에 수용되는 일본인들은 전차금(前借金)을 받고 몸을 팔았거나, 죄를 짓고 도주한 사람들이 불법적인 인신매매 형태로 끌려오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코베야’노동자에 대한 혹사와 학대가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한때 개선의 조짐도 있었다. 그러나, 전시(戰時)의 노무동원체제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개선의 노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상당수가 홋카이도 각지의 토목공사장과 탄광에서 ‘다코베야’에 수용되어 최저변 노동자로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

특히 홋카이도의 토목공사장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부분의 노동자 숙소가 ‘다코베야’ 형태로 운영되었다. 청부업자들은 입찰비 내에서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극단적으로 낮추었다. 때문에 노예적 착취가 이루어졌으며, 낮은 임금에 비해 높은 식비와 필수품비는 노동자의 생활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또한, 장시간의 노동으로 내몰기 위해 ‘다코베야’ 내에서는 공공연한 폭력지배에 의한 계급질서가 형성 되었으며, 이 질서를 범하거나 도주하는 경우에는 죽음에 이르는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홋카이도로 동원되었던 생존자들 중 상당수가 이러한 ‘다코베야’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토목공사장으로 동원된 이들의 경우, “본인이 다코베야에 수용되어 일하였다”고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탄광이나 광산으로 동원된 이들의 경우에는 목격진술이 많다.

한편, 탄광이나 광산을 운영하는 기업이 소속 노무자를 잘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하나의 위협 수단으로 ‘다코베야’를 이용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광산으로 동원되었던 생존자들은 “그곳의 노동자들은 감금되어 폭행당하며, 위험한 일만 한다는 소문을 자주 들었다”, “다코베야는 아주 무서운 곳이며, 탄광에서 도망치다가 잡힌 사람은 다코베야로 보내진다” 라고 진술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코베야’의 어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이 명칭의 유래를 하나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는 노동자, 감독 또는 간부, 노동자를 고용하는 오야가타(親方)등 각각의 입장에 따라 이 노동형태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어원에 대해서는
1. 문어를 잡는데 사용하는 항아리처럼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다는 의미
2. 한 번 ‘다코베야’에 들어가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결국 문어가 자신의 손발을 먹어 살아남듯이 자신의 몸을 팔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
3. 타지에서 알선업자에 의해 모인 노동자(他雇 : タコ)라는 의미
4. 노동자가 항상 도주의 기회를 노리며 도망치는 발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실이 끊어진 연(タコ)에 비유한다는 의미 등이 있다. 위원회의 피해조사 과정 중 만난 한 생존 자는 ‘다코베야’의 어원에 대해 ‘사람을 뼈가 없어질 정도로 두드려패서 일을 시킨다는 의미’ 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사진으로 보는 강제 동원』(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회생자 등 지원위원회 발간) p70~75.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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