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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종 (張翰鍾) 이야기

장한종 (張翰鍾) 이야기 - 성산포 해안동굴 구축작업 동원

장한종
  • 1922년

    전라남도 광양시에서 출생

  • 1940년

    광양 광산에서 화약출납업무

  • 1945년 1월

    현원징용되어 제주도 성산포 해안동굴 구축작업에 동원

그 제주 갈 때 그 상황들 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제주로 징용되서 갈 때 그 상황들.

음. 그러니께 인자 한 날 한 시에는 다 못가고. 한 뭐야 오늘 한 일주일 만에도 가고 인자 이렇게 됐는디. 나는 순천에서 있어 노니까 순천서 나가갈 때가 에 또 ... 음 41년, 41년 1월 21일 날 1월 말 경에 그때 인자 차가 전부 거기서 집합해 갖고 갔어. 거기 제주 갈 사람들 집합해 갖고 거기서 타고 나갔지. 10시에 탔는디 출발을 아마 새벽 음... 한 3시 경에나 했을 거야. 그랬는데 하이튼 사흘을 갔어 사흘을 가. 그때는 인자 참 바다에다가 왜놈들 뭐야 군, 군함 오면 터진다고 교라이, 교라이를 전부 띄워놨거든. 우선 그놈 무서워서 빨리 못가고 그놈 피해가면서 가느라고 사흘을 갔어. 근께 그 사흘 가는 동안에 그 배에서 춥지 그래갖고 많이 희생당했어요. 가는 도중에서는 죽지 않아도 거기서 전부 감기를, 독감이 들어갖고, 그래갖고 인자 가는데 거기는 뭐가 있냐면은, 사람 집이 아니고 이 밭에 밭에다가 이 가막사를 지었단 말이야. 나무로잉. 그리고 밑에는 전부 저 살정이라고, 우리말로 그 살정이라고 나무로 지은 것을 싹 깔아. 그럼 거기는 인제 제주는 이 뭐야 쇠가 많거든. 쇠란 거이 제주 사람들 산에서 베다가 한 거 그걸 갖다 깔아갖고 그놈들 그걸 깔아놓고 거기다 인제 자는, 재우는 거에요. 사람을 이 아주 사람 취급도 안해줬지. 그런께 거기서 감기 이 독감에 되게 걸린 놈은 닳다가 죽어버린 거야.

일반 광산 그 탄 캐는 노동자들도 가고 사무 보는 사람도 가고?

그렇지. 직원도 가고. 일본인들 가고 우리 인솔자도 일본 사람이고 이시이라고. 그때 왜놈들 소위가 있었어. 요새 소외, 대위, 중위 하는 소위. 그때는 참 소위 그 이시이란 사람이 계급은 소위인데 완전 시방 연대장감이여. 그러니께 계급이 좋아 막 요만한 칼 차고.

예 이 사람이 회사 사람이에요? 회사 직원이에요?

하 직원이지. 이 사람이 인솔자여.

인솔자? 예, 그러면은 회사가 이렇게 군대식으로 짜여져 있었나봐요? 호칭도 뭐 소위 중위 막 이렇게 부르고?

아니. 군인에 있을 때 계급이. 전역해 갖고 이 뭐야 회사로 와서 근무하는거야.

아, 예. 그럼 처음에 갈 때 회사에서 뭐라고 얘기했어요? 뭐라고 얘기하면서 데리고 갔어요?

무조건 뭐 징용이지 뭐 뭐라고 이야기하든 뭐 뭔 작업을 하니 뭘하니하든 간 거 아니지. 진해 해군 본부에서 제주도에다가 그 뭐냐 방비 작업을 한다고 그래서 징용을 가게 되었다고 그랬지.

예. 근데 현장징용되면은 그 뭐 어떤 규칙이 있다던가 뭐 어떻게 해야된다거나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거 통 우리는 모르지. 그냥 잡혀만 간 거이지. 가면 일종의 군인 심바람꾼이지. 뭣할지 모르는디 군인들 시키는대로 군인들 작업 뭐야 도움, 도움을 주러 간 거이지.

윤영욱 명의의 차용증

매일신보 1944년 2월 8일자
‘현원징용’ 관련 기사 (1940년 5월경)

주변에 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거나 이러진 않았어요?

그런, 그런 건 없고 전혀 잉. 헌병만 어쩌다 하나씩 있지. 이 작업이란 건 뭔 작업이냐하면, 요리 인자(그림을 그리며) 이거이 산이란 말이여. 이거이 어디에 필요하냐 그러면, 요만한 배가 있는디. 그러면 꼭 이 수면하고 굴 밑면하고 똑같아. 수면하고 잉. 근디 여가 군인이 이 배가 온단 말이야. 그러면 요놈을 요거이 줄을 밀고 가면 물로 푹 들어가게 돼있어. 근디 요거이 교라이라. 여기다가 인자 교라이, 미사일을 실었단 말이야. 그러면 여기 인자 사람이 요리 탔다 그러면은, 발동해서 가면 군함과 군함이 부딪힐 거 아니라고. 부닥치면 이거 이 터져. 그러면 이건 사람은 여까지 터지는 데까지 가는 게 아니야. 발동시켜가지고 중간에 가다 뛰 내려버려. 사람은. 그러면 인자 후비가 와서 사람을 주워갖고 데리고 가지. 그, 그 작전을 뺑하니 성산, 성산 여 테두리를 다 해놓은 거여. 이 뺑 돌리.

그 굴을 몇개나 팠나요?

개수도 모르지 뺑 돌리 거의 성산 다 해놓으니께.

음, 몇 명이 작업하는데요? 하나 파는데 들어가는데?

하나, 하나 파는데 들어간 거이 보통 한 7-8명? 한 10명. 그때는 인제 이 굴, 돌이니께 전부 이 손으로 망치로 두드려서 일하거든. 인자 요리 두드리 구녕 뚫어갖고. 뚫어갖고 거기다가 인자 다이너마이트 넣어갖고 터트리는 거야. 그런께 하루 요만씩밖에 못들어가지. 인자 그래갖고 인자 발파해놓으면 그놈이 좀 굵은 놈이 있고 인자 그러니 저, 여 박힌 놈이 있으니께 그놈 파는 곡괭이지. 곡괭이는 별로고 주로 인자 그걸 노미라고 해요잉 정. 정을 갖고 인자 때리 파는 거여.

윤영욱 명의의 차용증

매일신보 1944년 2월 8일자
‘현원징용’ 관련 기사 (1940년 5월경)

그러면 처음에 갈 때 가족들은 제주도로 간 걸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지 아마. 아니 저 참 그 이야기를 하면. 나가 인자 거기 있다가, 인자 거기를 가게 됐단 말이야. 근데 우리 집에서는 달랑 어머니 아버지밖에 없어. 근디 인자 집에 와서 제주 가겠다 소리를 못해. 근디 하이튼 집에는 왔다 가야겠는데, 집에 오니까 아버지가 안계셔. 그래 어디 갔냐 하니께 그때는 경상도가 좀 식량이 나았어. 그 경상도로 식량 구하러 갔다 이거야. 식량이 없응께. 그러고 어머니만 혼자 있는디. 나 그 소리 하면 어머니가 기절할까 싶어. 나 하나 보고 키웠는디. 그래 그 소리 못하고 도로 왔어. 그랬더만 마침 나온 날 저녁에 아버지가 왔던 모냥이라. 그런께 인자 소문을 들었을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한테 인자 간다는 것을. 근데 이야기를 했어. 그래 왔다 갔다 하니께 가서 자니란께. 우리 집에서 그 죽청광산까지가 60리라. 3시간 넘게 왔어. 아버지가. 나를 찾아와. 광산으로. 근디 왔는디 본께 계한 3개하고 곶감 한 꼬지하고 갖고 왔더라. 그 얼마나 ...(목이 메이심) 그마만큼. 근디 밤이야 그때는 뭐 요새같으면 요새는 밤이라도 밝지만은 그때는 그, 칠흙같은 산길이야. 근디 산길로 거의 60리를 걸어왔더라고. 얼마나 그걸, 그걸 생각하면 통 밤마다 눈물을 흘렸어 그런 존재였어.

그때 그럼 제주도로 간 사람들. 사람들 이름 기억나는대로 한번 말씀해주세요.

그때 인자 우리 하태호도 갔고, 하태호 하용필 박정성. 이건 다 간부들이야. 인자 거 가서 죽은 살마. 인자 손, 손인석이가 있고. 잉. 음. 이 광부들 이름 다 몰라 광부들은 많이 갔는데.

손인석 이분이 사망을 했네요? 이분은 어디 사람인데요?

우리 동네, 나와 한마을 사람이여.

그래서 이분이 어떻게 하다가 사망을 하셨어요?

그분 사망은 그러니께 아까 저 뭐이냐 그 군함이 3일동안 가니까 거기서 독감 걸려 갖고. 그래서 그 바라크에 가 갖고 일주일을 넣어놓으니께 왜놈들이 약은 줘. 치료를 해줘도 안돼. 그래서 거기서 죽었어.

자세하게 말씀을 해주셨고, 그래서 그 다음에 그 마지막으로 이 뭐 일본의 통치라든가 이런 거에 대해서 뭐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시면은 해주세요.

아니, 근데 그 뒤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억울하고 너무나 당했어 우리가. 인자 우리가 젤 어려울 때는, 아까 이 논 이야기 했지만은 800평을 짓는디 나락을 그때는 비료도 없을 때야. 수확하고 나니께 수중에 없어. 풍로 뒤에 나온 거밖에 없어. 그렇게 무작허니 착취를 받아갔단 말이야. 그러니 뭐 좋아할 턱이 없지.

『일하지 않는 자는 황국 신민이 아니다』(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회생자 등 지원위원회 발간) p46~p71. 요약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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